많은 사람들이 발레, 하면 떠올리는 그림이 있다. 순백색 의상을 입은 여성 무용수들이 신비스러운 자태로 줄지어 서서 마치 공기처럼 가볍고 우아한 몸짓으로 춤추는 모습, 바로 ‘발레 블랑(백색 발레)’이다. 발레 블랑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태어났다. ‘백조의 호수’ ‘지젤’ 그리고 ‘라 바야데르’등이 발레 블랑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발레 블랑은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 어스름한 달빛이 비치는 밤, 숲 속이나 호숫가 같은 곳을 배경으로 한다. 푸르스름한 조명 아래 백색 발레 의상은 더욱 빛나고, 무용수들의 몸짓은 우아하고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이들은 우리와 같은 세속의 인간이 아니다. ‘백조의 호수’에선 마법에 걸린 백조들이, ‘지젤’에선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죽은 처녀들이 윌리라는..
*지난해 국립오페라단 '나부코' 공연을 보기 전에 썼던 SBS취재파일이다. 이 글에서는 공연이 기대된다고 썼는데, 정작 공연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연출가가 한국인의 한을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했는데, 그게 무대 전면에 커다랗게 '한'이라는 글자를 써놓는 거였다니.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나올 때 수많은 '소녀상'을 무대에 등장하는 걸 보고는 정말 놀랐다. 작품을 모방했다는 얘기를 들을까봐 그랬는지 앉아있는 소녀가 아니라 서있는 소녀였지만 그 '소녀상'을 염두에 뒀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왜 갑자기 여기서 소녀상이 튀어나오는 거지? 광복절 즈음에 열린 공연이라 굳이 그런 연출을 했을까. 외국인 연출가가 뭔가 한국적인 것을 쓰고 싶어한 것 같은데, 공감이 되기는커녕 약간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오페라 '나..
2021년에 본 공연들을 결산하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다. 한 동안 공책에 공연 티켓을 붙여 모았었는데, 몇 년을 모았던 그 티켓 스크랩북을 잃어버렸다. 프로그램 북도 모았었지만 요즘은 별로 미련이 없다. 쌓아놓고 한 번도 다시 들여다 보지 않을 거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블로그에 기록으로 남겨 정리하면 될 것 같다. 공연 전 장르를 다 맡고 있지만, 장르별 주요 공연을 다 보는 건 불가능하다. 예전에는 욕심을 부려 여기저기 쫓아다녔고, 공연 수도 그리 많지 않았지만, 이제는 공연 건수가 너무 많아졌거니와 체력도 따라주지 않는다. 공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공연 보는 게 일이 되면 피곤하고 힘들어진다. 보고 싶은 공연이라도 인연이 닿지 않으면 애를 써도 못 보고, 별 ..
‘공연장을 벗어나는(脫) 공연’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얘기를 듣고, 영국에서 본 오페라 한 편을 제일 먼저 떠올렸다. 10여 년 전에 본 공연이지만 그만큼 인상이 선명했다. 영국 연출가 그레이엄 빅(Graham Vick)이 이끄는 버밍엄 오페라 컴퍼니의 오페라 ‘이도메네오’였다. 그레이엄 빅은 로열 오페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같은 유명 오페라 극장에서 활동하는 연출가이면서, 1987년 자신이 창립한 ‘버밍엄 오페라 컴퍼니’의 작업에 열정을 쏟아왔다. 그레이엄 빅은 30여 년 전부터 대중이 오페라에 대해 느끼는 ‘장벽’을 없애기 위해 ‘탈 공연장’을 시도했다. 그는 바그너 이후 표준이 된 오페라 극장은 오케스트라가 무대와 관객을 이어주는 역할에서 벗어나 시야에서 사라지고, 관객이 어둠 속으로 물러나면서 ..
‘패왕별희’(Farewell My Concubine, 覇王別姬)는 리비화(李碧华)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중국의 천 카이거 감독이 연출한 1993년작 영화다. 장궈룽(장국영), 공리 등 유명 배우들이 출연했다. 베이징 경극학교에서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경극배우 뎨이와 샤오러우, 그리고 샤오러우의 여인 쥐셴의 엇갈리는 관계와 비극적인 운명이 일본의 중국 침략과 국공내전, 문화대혁명 등 중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 펼쳐진다. ‘패왕별희’는 ‘패왕이 우희와 이별한다’는 뜻으로, 유방과 패권을 겨뤘던 영웅 항우의 비극적 말년, 항우와 우희의 사랑을 담은 대표적인 고사이다. 영화에서는 뎨이가 우희 역을, 샤오러우가 항우 역을 맡는 경극 ‘패왕별희’가 중요한 소재이며 이야기를 끌어가는 모티브가 된다. 영화 ‘패왕별희..
*예술인복지재단 8월 웹진에 기고한 글. 코로나19로 공연장이 문을 닫고 온라인 공연이 급증했을 때, ‘방콕에 지친 당신을 위해’라는 제목으로 온라인 공연 소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3월에 시작한 기사인데 다섯 달 넘게 연재를 이어가고 있다. 이렇게 오래 쓰게 될 줄 몰랐다. 최근 코로나19의 기세가 다시 거세졌다. 공연 연기와 취소, 중단이 다시 잇따른다. 공연 취재 담당인 나도 우울하다. 이런 와중에 ‘예술가를 위한 제언’ 코너에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은 지 며칠이 지났다.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그저 최근 몇 달간 공연계를 취재하면서 느낀 점들을 적어볼까 한다. 코로나19 시대, '소통'의 가능성 그 어느 때보다 예술가의 ‘소통’이 중요해졌다.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이제 자신의 관객이 누..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최근 공연을 위해 한국을 다녀갔다. 요즘처럼 ‘공연한다’는 게 각별하게 다가오는 시기가 언제 있었나 싶다.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한 코로나19 시국이니까. 리처드 용재 오닐은 한국에서 공연하기 위해 입국 후 홀로 2주 격리 기간까지 거쳤다. 리처드 용재 오닐이 2주간의 격리가 끝나고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병원이었다. 코로나19 진료 거점병원인 고양시 명지병원을 찾아 의료진을 위한 감사 연주를 했다. 5월 19일, 명지 병원 로비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의 관객은 의료진과 환자, 환자 가족들이었다. 나도 취재를 위해 찾아갔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중 한 곡을 비올라로 연주한 리처드 용재 오닐은 피아니스트 이소영과 함께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 슈베르트의 가..
SPO 매거진 6월호 기고. '코로나19 시대 온라인 공연 현황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쓴 글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몇 달간 온라인 공연 관련 글을 정말 많이 썼다. 온라인 공연 큐레이션 기사인 취재파일 '방콕에 지친 당신을 위해' 시리즈가 50회 돌파를 앞두고 있고, 이런저런 매체 원고 청탁을 받아 외부 기고도 많이 했다. 코로나19 상황이 또 안 좋아지니 당분간은 온라인 공연 관련 기사를 더 많이 쓰게 될 것 같다. 씁쓸하고 답답하다. -------------------------------------------- 공연계는 코로나19로 타격이 심한 분야 중 하나다. 감염 우려로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거나 연기됐고, 지금도 여파가 이어지는 중이다. 그렇지만 공연장이 문을 닫았을 때에도 공연은 멈추지 않..
코로나 19로 공연장이 문을 닫고, 공연 취소와 연기 사태가 잇따르자, 공연 담당기자인 나에게 ’요즘 할 일 없겠다’고 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바빴다. 온라인 공연 스트리밍 기사를 매일 썼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공연 스트리밍 정보를 큐레이션하는 기사는 ‘집콕’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생활 정보이고, 공연 스트리밍 유행은 코로나19로 촉발된 ‘문화 현상’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렇게 오래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코로나19 상황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고, 연재 기사는 5월말부터 1주 1회로 주기는 길어졌지만, 40회 돌파를 눈앞에 두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온라인 공연 기사를 쓰면서 나 자신도 수많은 온라인 공연을 봤다. 거의 매일 한 편 이상씩 봤으니 편수로..
고선웅 연출 국립극단 제작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나에게 여러 모로 특별한 연극이다. 사드 갈등이 고조됐을 때 중국 베이징에서, 중국 관객들과 함께 공연을 봤고, 중국인들의 찬사를 들었다. 2020년, 국립극단 70주년 기념공연이 코로나19 때문에 취소된 상황에서, 마치 공연처럼 진행된 프레스 리허설을 보면서 울컥했다. 이형훈 배우로부터 초연 당시 임홍식 배우가 끝까지 무대를 지키다 세상을 떠난 사연을 듣고 또다시 울컥했다. 무대의 무게, 삶의 무게를 깨닫게 해준 이 연극. The Show Must Go On! 다음은 2020년 6월 네이버 중국판 차이나랩에 기고했던 글이다. ---------------------------------------- ‘조씨고아(赵氏孤儿)’는 중국 원나라 때 작가 기군..
한국 국립극단이 지난해 관객들을 대상으로 ‘다시 보고 싶은 연극’을 묻는 설문 조사를 했다. 압도적인 차이로 1위를 차지한 작품이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었다. 국립극단은 이 연극을 창립 70주년인 올해의 주요 프로그램으로 선정했다. 6월 25일부터 7월 26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기로 하고 공들여 준비해왔다. 공연 티켓은 예매 시작한 당일 모두 팔려나갔다. 이 연극은 중국 고전 희곡 ‘조씨고아’가 원작이다. 과연 어떤 작품이길래? ‘조씨고아’는 원나라 때 작가 기군상이 중국 진나라를 배경으로 쓴 ‘복수극’이다. 중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제목 그대로 조씨 집안의 고아 이야기다. ‘조씨고아’는 ‘동양의 햄릿’으로 불리며 18세기에 이미 유럽에 소개되었다. 로열 세익스피어 컴퍼니 같은 해외..
1. 광화문 금호아트홀이 문을 닫던 날, 고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흉상과 그가 즐겨 앉던 자리의 명패를 보면서 고인의 생전 모습을 떠올렸다. 타계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많은 음악인들이 아직도 그를 그리워한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추모식이 열린 곳이 바로 광화문 금호아트홀이었다. 수많은 음악가들이 찾아와 애도했다. 그 자리에서 울려퍼지던 말러의 '아다지에토'. 이 음악은 2005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에서 고인에 대한 추모의 뜻으로 연주되었다. 아직도 당시의 '아다지에토' 연주가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2.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24일 시작된 한국 공연에서 특별한 추모 연주를 들려줬다. 다뉴브 강 유람선 사고 희생자를 애도하며 한국 가곡을 ..
장하오천. 이 이름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면 중국인 작가 장하오천(张皓宸)의 이름이 먼저 뜬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당신’이라는 책을 출간한 인기 작가인데 한국에도 독자가 꽤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장하오천(张昊辰)이 있다. 바로 ‘랑랑과 유자왕의 계보를 잇는다’고 불리는 중국인 피아니스트다. 사실 한국의 공연시장에서 중국인 피아니스트는 그리 ‘장사가 잘 되는’ 연주자는 아니다. 문화혁명을 겪은 중국의 음악가들이 클래식 음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경제적으로 낙후되었던 시절부터 걸출한 연주자들을 배출해왔다. 중국은 한국에 비해 클래식 음악 후진국으로 여겨졌고, 중국인 피아니스트에 대한 평가도 박했다. 중국 최초 쇼팽 콩쿠르 우승이라는 화려한..
BBC는 1999년 영국 중부 노스햄턴 지역의 한 신발 공장 이야기를 ‘트러블 앳 더 톱: 킹키 부츠 공장(Trouble at the Top: the Kinky Boot Factory)’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 노스햄턴은 한 때 전통적인 영국 신발 산업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지만, 저렴한 외국산의 공세와 새로운 패션의 흐름에 밀려 쇠락해 가고 있었다. BBC가 소개한 ‘WJ 브룩스(WJ Brooks)’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소규모 가족 기업으로, 역시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색다른 활로를 개척했다. WJ 브룩스의 대표는 43살의 스티브 페이트먼. 그는 아버지로부터 공장을 물려받아 23년째 신사화를 만들고 있었다. 경영난으로 고민에 빠져 있던 페이트먼은 어느 날 색다른 주문 전화를 받는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로 1999년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샘 멘데스는 연극과 뮤지컬 연출가로도 유명하다. 샘 멘데스는 최근 영국 내셔널 시어터가 제작한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연출했다. 샘 멘데스의 ‘리어 왕’은 현대적인 무대와 의상, 강력한 음악이 어우러져 원작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리어 왕을 연기한 배우 사이먼 러셀 빌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무대를 장악한다. 최고의 연출과 배우가 만났으니 과연 영국 언론들이 앞다퉈 격찬할 만했다. 나는 이 공연을 중학교 3학년 딸과 함께 관람했다. ‘리어 왕’을 예전에 책으로 읽기는 했지만, 실제 공연으로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시 잘 만든 공연의 힘은 컸다. 책으로 볼 때 별 감흥이 없었던 대사가 무대 위에서 생명력을 얻었다. 처음에 걱정했던..
‘뉴욕’이라면 세계 금융의 중심지 월스트리트나 9.11 테러가 발발했던 옛 세계무역센터, 혹은 UN 본부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나에게 뉴욕은 ‘브로드웨이’다. 공연장이 밀집된 뮤지컬과 연극의 중심지 말이다. 나의 첫 뉴욕 방문 목적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보기 위한 것이었고, 이후에도 내게 뉴욕은 공연 보러 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올 여름 휴가로 10년 만에 뉴욕을 방문한 것은 동생 가족의 미국 이주 덕분에 ‘현지 숙소’가 생겼다는 것만 믿고 즉흥적으로 결정한 터라 공연 관람을 미리 계획할 여유가 없었다. 또 예전과는 달리 이번 여행은 남편과 두 딸까지, 온 가족이 함께 하는 것이라 공연은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뉴욕에 도착해서 타임스퀘어 주변의 휘황찬란한 공연 광고들을 보..
객석과 무대가 따로 없는 콘서트. 연주자의 숨소리와 땀방울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콘서트. 마룻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음악의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는 콘서트.종종 연주자와 관객이 함께 어울리는 즉석 뒤풀이로 이어지는 콘서트. 바로 ‘하우스콘서트’ 얘기다.하우스콘서트는 지난 2002년 7월 12일,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박창수 씨가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시작한 ‘작은 음악회’다. 박창수 씨는 연주자와 관객이 진정 소통할 수 있는 공연, 일상 속의 예술을 꿈꿨다. 하우스콘서트의 매력에 빠진 관객들이 늘어나면서 비슷한 형식의 공연이 유행이 되었지만, ‘원조’ 하우스콘서트(‘하콘’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는 도곡동 율하우스로 옮겨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콘’은 작은 음악회지만, 작다고 얕보면 오산이다...
*국립발레단 '라 바야데르'를 보고 쓴 글이니 두 달 전 글이다. 좀 늦었지만 블로그에 올려본다. 오랜만에 발레 공연을 봤다. 국립발레단이 무대에 올린 ‘라 바야데르’였다. 강수진 국립발레단장 취임 이후 첫 공연으로 화제가 되기도 한 작품이다. 인도를 배경으로 사원의 무희 니키아와 전사 솔로르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라 바야데르’는 ‘발레 블랑’, 즉 ‘백색 발레’의 대표작이다. 발레 블랑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태어났다. 순백색 의상을 입은 여성 무용수들이 신비스러운 자태로 줄지어 서서 마치 공기처럼 가볍게, 우아한 몸짓으로 춤춘다.‘라 바야데르’과 함께 ‘백조의 호수’ ‘지젤 등이 발레 블랑의 특징을 보여준다. 발레 블랑은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 어스름한 달빛이 비치는 밤, 숲속이..
음악에는 마음을 움직이고 치유하는 힘이 있다. 힘들 때일수록 더 그렇다. 지난해 여름,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과 피아니스트 임동혁의 듀오 콘서트를 보러 갔을 때도 그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두 달 정도 지났을 때였는데, 젊은 음악가들의 연주를 들으면 우울한 마음이 좀 가벼워질까 해서 갔다. 과연 공연 내내 나는 마음 맞는 두 사람의 연주에 흐뭇하고 유쾌해졌다. 그런데 마지막 앙코르로 이들이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연주하기 시작하자마자 가슴이 턱 하니 내려앉았다. 이 곡이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침상 옆에서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성악곡을 골라 틀어드리고 있었다.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도 그 중 하나였다. ‘아베 마리아’가 울려퍼지자 한동안 아무 말..
오랜만에 본 발레 '라 바야데르'. '발레 블랑'(백색 발레)의 진수를 보여주는 '망령의 왕국' 장면은 역시 감탄스럽다. 단순한 아라베스크 동작이 보여주는 저 아름다움이라니! 국립발레단의 '칼군무' 멋지다. '라 바야데르'는 볼 때마다 '지젤'이 생각난다. 현실세계에 대비되는 초현실적 세계, '지젤'의 윌리들은 '라 바야데르'의 망령들이다. 우유부단한 남자 주인공에게 배신당하고 죽음을 맞는 여주인공이라는 구도도, 여주인공을 짝사랑하는 또다른 남자들이 있는 것도, 남주인공을 차지하는 신분 높은 여자가 있는 것도, 남주인공이 회한에 젖어 이미 저세상의 혼령이 돼버린 비련의 여주인공과 춤추는 것도 비슷하다. 비슷한 구도라지만 '라 바야데르'는 '지젤'보다 훨씬 스케일이 크고 보는 재미가 있는 대작임에는 틀림없..
공연을 보면서 내가 나이 들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최근 그런 경험을 했다. 한국 공연 10주년을 맞은 뮤지컬 ‘맘마 미아’를 보면서였다. ‘맘마 미아’는 많이 알려져 있듯 아바의 히트곡 22곡의 가사를 바꾸지 않은 채, 가족애와 사랑, 우정의 드라마 속에 절묘하게 녹여낸 뮤지컬이다. 전세계적으로 5천만 명 이상이 봤고, 한국에서도 150만 명 이상이 관람한 인기작이다. 나는 이 뮤지컬을 몇 번이나 봤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2003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관람했고, 2004년 한국 초연을 취재한 이후 배우가 바뀔 때마다 여러 번 공연을 보았다. 합치면 10회 가까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난달 ‘맘마 미아’를 정말 오랜만에 다시 보러 간 건 솔직히 작품에 대한 기대 때문은 아니었다. 이..
*LG아트센터에서 열린 이자람의 판소리 브레히트 '억척가' 프로그램 북에 실린 졸고. 2년 전 '억척가'를 보고 와서 이 블로그에 썼던 리뷰를 바탕으로 다시 썼다. '추임새를 연습 중'이라고 글에도 쓴 것처럼, 이번 공연을 무척 기대하고 있었는데, 출장 일정이 잡히는 바람에 보지 못해 정말 아쉽고 원통하다. '억척가' 세번째 관람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 '예쁘다!' 추임새는 그 때 열심히 해야지. 2년 전, 이자람의 판소리 브레히트 를 처음 관람했던 날. 마지막 소리의 여운이 사라지자 관객들은 모두 기립했다. 여러 차례 이어진 커튼콜과 뜨거운 환호성. 나는 압도적인 감동에 휩싸여, 공연이 끝나고도 한동안 눈시울이 젖어있었다. 이 공연을 볼 수 있었던 게 고마웠다. 지난해 를 두 번째 관람했을 때에도 ..
객석과 무대가 따로 없는 콘서트. 연주자를 바로 코 앞에서 보면서 숨소리, 땀방울까지 느낄 수 있는 콘서트. 마룻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음악의 진동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콘서트. 공연이 끝나면 연주자와 관객이 함께 어울려 작은 파티를 여는 콘서트. ‘하우스콘서트’라고 들어보셨는지? ‘하우스콘서트’는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인 박창수 씨가 2002년 7월 12일, 자신의 집에서 처음 시작했던 작은 음악회다. 지금까지 350차례 이상 열렸다. 작다고 얕보면 오산이다. 클래식뿐 아니라 국악, 재즈, 대중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실력파 음악가들이 거쳐간 무대다. 피아니스트 김선욱, 김태형, 조성진,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 이경선, 가수 강산에, 하림, 아마도이자람밴드 등이 출연한 무대라면 감이 오는가? 하우스콘..
*연극 '시련'을 오랜만에 본 김에 2006년 영국 출장길에 처음 만났던 이 작품의 감상기를 다시 올려본다. 옛 블로그에 올려놓았던 글이다. 옛 블로그가 폐쇄됐으니, 이렇게 생각 날 때마다 예전 글을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 글 끝에 한국에서 다시 '크루서블'을 볼 날을 기다린다고 썼는데, 실제로 그 이듬해였던 2007년, 나는 한국에서 이 연극을 다시 만났다. 그 때 쓴 글도 다시 올릴 생각이다. 지난번 영국 출장에서 본 공연 중에 아서 밀러 원작의 연극 '크루서블(The Crucible. 시련)'이 있었습니다. (마릴린 먼로와 결혼해 유명세를 타기도 했던 아서 밀러는‘크루서블’ 외에도 ‘모두가 나의 아들’ ‘세일즈맨의 죽음’ 같은 걸작을 남긴20세기 미국 문학의 거장으로 지난해 타계했습..
임동혁과 리처드 용재 오닐의 듀오 연주회. 요즘 공연 볼 기분도 기운도 아니었지만, 무대에 오른 두 젊은이를 보고 있자니 미소가 떠올랐다. 둘이 평소에도 친하다더니, 연주자들이 좋아서 즐겁게 연주한다는 느낌이 객석에까지 전해졌다. 그런데 임동혁과 리처드 용재 오닐이 마지막 앙코르로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를 연주하기 시작하자마자, 가슴이 턱 하니 내려앉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침상 옆에서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성악곡을 골라 틀어드리고 있었는데,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도 그 중 하나였다. '아베 마리아'가 울려퍼지자 한동안 아무 말씀 없이 누워만 계셨던 아버지가 갑자기 입을 여셨다. "구노냐?" 아버지는 이 와중에도 내가 틀어놓은 '아베 마리아'가 슈베르트인지 구노인지 헛갈려서, 궁금해서 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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