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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사진제공 빈체로>
음악에는 마음을 움직이고 치유하는 힘이 있다. 힘들 때일수록 더 그렇다. 지난해 여름,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과 피아니스트 임동혁의 듀오 콘서트를 보러 갔을 때도 그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두 달 정도 지났을 때였는데, 젊은 음악가들의 연주를 들으면 우울한 마음이 좀 가벼워질까 해서 갔다. 과연 공연 내내 나는 마음 맞는 두 사람의 연주에 흐뭇하고 유쾌해졌다. 그런데 마지막 앙코르로 이들이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연주하기 시작하자마자 가슴이 턱 하니 내려앉았다. 이 곡이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침상 옆에서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성악곡을 골라 틀어드리고 있었다.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도 그 중 하나였다. ‘아베 마리아’가 울려퍼지자 한동안 아무 말씀 없이 누워만 계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입을 여셨다. “구노냐?” 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내가 틀어놓은 ‘아베 마리아’가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인지, 구노의 아베 마리아인지 헛갈려서, 궁금해서 물어보신 것이다. “슈베르트 거예요.” 고통스러운 투병 중에도 아버지의 호기심은 시들지 않았구나 싶었다. 나는 미소를 짓다가 곧 극심한 통증이 찾아와 괴로워하시는 아버지 모습에 웃음을 거둬들였다.
‘아베 마리아’를 듣고 있자니 당시 기억이 떠올라 눈 앞이 흐려졌다. 사실 나는 이 공연 이전에 ‘레퀴엠’이 연주되는 음악회에 갈 기회가 있었지만 일부러 피했었다. 레퀴엠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한 진혼곡이니, 아버지의 죽음을 다시 떠올리고 걷잡을 수 없이 슬퍼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공연에서 이렇게 아버지를 딱 마주치게 되었다.
사실 나는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연에 간 것이었다. 그런데 ‘아베 마리아’는 나에게 아버지를 다시 만나라고, 슬픔 속으로 다시 뛰어들라 했다.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걱정했던 것보다
담담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 날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는 나에게는 진혼곡이 되었다. 눈물을 닦고 공연장을 나서는 내 머릿속은
한결 맑아진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진혼곡은 죽은 자뿐 아니라 산 자의 영혼까지도 위무하는 음악이었다.
지난 4월 21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에서도 나는 그런 진혼의 음악을 만났다. 공연을 위해 단원들과 지휘자 데이빗 진먼이 입장하고 객석의 박수가 잦아들 즈음, 또 한 사람이 무대로 걸어 나왔다. 그는 지휘대 바로 옆에 서서
관객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 공연에 앞서 세월호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을 위해 바흐의 ‘에어(Air)’를 연주하겠습니다. 연주 후 박수는 삼가 주시고 묵념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외국인의 한국어 발음은 어눌했지만,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곧 이어 연주된 바흐의 에어. ‘G선상의 아리아’라는 제목으로 친숙한 이 곡이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곡이 되었다. 바흐의 단정하고 차분한 멜로디에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추모의 염이 깃들였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느새 곡은 끝났지만 객석은 한동안 깊은 침묵에 휩싸였다. 아마 그 순간, 공연장 안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수많은 공연들이 취소되었다. 사회 분위기와 너무 맞지 않는 공연은 취소하거나 미룰 수 있다. 하지만 공연을 하거나 보러 가는 것 자체를 무조건 부당하다고 몰아세우는 것은 마땅치 않다. 추모 분위기를 고려해 프로그램을 수정하고 수익금 기부 약속까지 했던 뮤지션들의 공연이, 이런 비난을 두려워한 공연장측 결정으로 개막 하루 전 일방적으로 취소되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의 충격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사람들은 여전히 생업에 종사한다. 예술가들에게는
공연이 생업 아닌가. 지난 5월 10일과 11일, 세월호
참사 여파로 공연이 취소된 뮤지션 80여 팀이 홍대 앞 거리에서 무료 공연을 열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를 지켜보며 느꼈던 답답함을 털어내고,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모였다. 이 소식을 보도한 SBS8뉴스를 보니, 한 시민이 ‘좀 잊혀진 것 같았는데, 오늘 노래 듣고 보니까 그 분들의 아픔을 더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음악의 힘이다.
진혼의 음악은 죽은 사람뿐 아니라 산 사람의 영혼까지 위로한다. 그리고 죽음을 잊지 말라고, 기억하라고 한다.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가
내게는 아버지를 기리는 곡이 되었듯, 바흐의 ‘에어’는 세월호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곡이 되었다. ‘에어’를 다시 찾아 들으며 나는 그날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떠올린다. 그리고
숙연해진다. 잊지 않겠다. 세월호의 당신들을. 비리도 위험도 사고도 없는 그 곳에서 영원히 평화롭기를.
*방송기자클럽회보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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