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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보면서 내가 나이 들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최근 그런 경험을 했다. 한국 공연 10주년을 맞은 뮤지컬 ‘맘마 미아’를 보면서였다. ‘맘마 미아’는 많이 알려져 있듯 아바의 히트곡 22곡의 가사를 바꾸지 않은 채, 가족애와 사랑, 우정의 드라마 속에 절묘하게 녹여낸 뮤지컬이다. 전세계적으로 5천만 명 이상이 봤고, 한국에서도 150만 명 이상이 관람한 인기작이다.
나는 이 뮤지컬을 몇 번이나 봤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2003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관람했고, 2004년 한국 초연을 취재한 이후 배우가 바뀔 때마다 여러 번 공연을 보았다. 합치면 10회 가까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난달 ‘맘마 미아’를 정말 오랜만에 다시 보러 간 건 솔직히 작품에 대한 기대 때문은 아니었다. 이 뮤지컬의 탄생지인 영국 배우들이 한국에 와서 공연한다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공연은 딱 내가 예상했던 대로 흘러갔다. 아빠 없이 엄마와 살아온 딸 소피가 엄마의 일기장에서 찾아낸 ‘아빠 후보’ 세 사람에게 자신의 결혼식 초청장을 보내는 첫 장면부터,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장면들의 연속이었다. 줄거리도 알고, 노래도 다 알고, 김이 빠졌다. 그저 ‘영어로’ 다시 본다는 정도였다. 나는 큰 감흥 없이 구경꾼 같은 시선으로 공연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공연을 너무 많이 봤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맘마 미아’를 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 다짐할 즈음, 생각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공연은 너무나 잘 알려진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소피는 아빠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혼란에 빠져 결혼식 직전 엄마 도나에게 달려간다. 엄마에게 직접 웨딩드레스를 입혀달라고, 머리를 손질해 달라고 부탁한다. 엄마는 딸의 머리를 빗겨주면서 나직하게 노래 부른다. 바로 ‘Slipping through my fingers’라는 곡이다.
이른 아침 책가방 들고 손 흔들며 미소 지으며 그 앤 집을 나섰지
그 앨 보낸 뒤 멍하니 한참 그냥 앉아 가는 뒷모습을 보았어.
난 그 앨 알지도 못한 채 영원히 그 앨 놓칠 것 같아.
허나 그 예쁜 꼬마가 웃을 땐 난 너무 기뻤어.
잡아보려 해도 언제나 내 곁에서 멀어져 갔어. 노력할수록 내 손에서 빠져나갔어.
나는 정말 그 앨 잘 알고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자꾸 클수록 내 곁에서 멀어져갔어.
눈 비비며 아침식탁에 마주앉아 그 소중한 시간 그냥 보냈지
그 애가 간 뒤 미안한 맘에 사로잡혀 죄책감마저 느꼈었어
우리가 계획했었던 여행들 그 멋진 계획 다 어디 갔나…….(중략)
나는 정말 그 앨 잘 알고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자꾸 클수록 내 곁에서 멀어져 갔어
시간을 멈추게 할 순 없을까 그 행복했던 모습으로 돌아갈 순
없나.
아. 이게 웬일인가. 나는 ‘객관적 관찰자형 관객’에서, 단숨에 ‘100퍼센트 몰입형 관객’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딸 시집 보내는 엄마의 심정이 되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내 얘기 같았다. 내 옆에는 중학생 큰 딸이 앉아있었다. 한 때는 내 품에 안겨 까르르 웃던 천진난만한 아기였고, 초등학교
등교 첫날 체격보다 훌쩍 큰 가방을 메고 내게 손 흔들며 교실로 뛰어가던 아이. 딸은 어느새 엄마보다는
친구가 좋고, 이유 없는 반항과 짜증을 달고 사는 사춘기 중학생이 되었다. 노래를 듣다 보니 딸을 키워온 지난 세월이 휘리릭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내 딸의 모습을 상상하며 무대 위 소피와 겹쳐보았다.
언제부터인가 내 눈시울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이 작품을 여러 번 봤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 장면이 주는 느낌을 전에도 좋아하긴 했지만, 나는 늘 엄마 도나보다는 딸 소피에 가까웠다. 내 딸이 아직 어렸기 때문에 내 딸이 결혼할 미래를 상상하기보다는 내가 결혼했던 날을 회상하며 내 어머니를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이 장면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세월이 흘러 더 이상 딸은 내 품의 아기가 아니고 낯설게 느껴질 때도 종종 있다. 내가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자각, 그리고 도나처럼 나도 딸 키우는 엄마라는 깨달음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쳤다. 딸을 떠나 보내야 할 그 날까지 더 아끼고 사랑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맘마 미아’를 여러 번 봤지만, 볼 때마다 달랐던 것 같다. 출연진이 바뀌고 연출이 달라지면 공연이 달라진다는 건 말하나마나다. 출연진과 연출이 같더라도 날마다 100퍼센트 똑 같은 연기를 하는 사람은 없다. 매일 공연장 분위기가 바뀌고 공연의 ‘디테일’도 달라진다. 공연을 보는 관객 역시 바뀐다. 공연은 매 순간 관객과 소통하며 이뤄지는 예술이다. 그러니 같은 작품을 갖고 공연한다 해도, 엄밀히 말해 ‘똑 같은 공연’은 하나도 없다. 무대에 오를 때마다 새롭다.
나는 이번에 ‘맘마 미아’를 관람하며 ‘엄마로서의 나’를 발견했고 내 딸과 나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맘마 미아’를 너무 많이 봤다고 속단할 일이 아니었다. 10여 년 동안 여러 차례 본 작품이라 별 감흥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또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으니까. 아마 이게 같은 공연을 여러 번 보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맘마 미아’를 또 관람하게 될 것 같다. 다시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길 기대하면서.
*방송기자클럽 회보 2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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