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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시련'을 오랜만에 본 김에 2006년 영국 출장길에 처음 만났던 이 작품의 감상기를 다시 올려본다. 옛 블로그에 올려놓았던 글이다. 옛 블로그가 폐쇄됐으니, 이렇게 생각 날 때마다 예전 글을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 글 끝에 한국에서 다시 '크루서블'을 볼 날을 기다린다고 썼는데, 실제로 그 이듬해였던 2007년, 나는 한국에서 이 연극을 다시 만났다. 그 때 쓴 글도 다시 올릴 생각이다.
지난번 영국 출장에서 본 공연 중에
아서 밀러 원작의 연극 '크루서블(The Crucible. 시련)'이 있었습니다.
(마릴린 먼로와 결혼해 유명세를 타기도 했던 아서 밀러는
‘크루서블’ 외에도 ‘모두가 나의 아들’ ‘세일즈맨의 죽음’ 같은 걸작을 남긴
20세기 미국 문학의 거장으로 지난해 타계했습니다.)
취재 때문에 런던 극장가를 돌아다니다, 길거드 극장에 내걸린 이 간판에 호기심을 느꼈습니다.
영화 '크루서블(1996)'을 봤기 때문에 연극은 어떨까 궁금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노래와 춤이 곁들여지는 뮤지컬과는 달리,
줄줄이 대사가 이어지는연극을외국어로 본다는 게 부담스러워서 볼 생각은 없었죠.
그런데 숙소에 비치된 공연 정보지 '타임 아웃'(이런 정보지가 한국에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 주의 모든 공연들이 장르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데다, 중요한 공연들은 평도 실렸거든요.
재미있는 것은 '게이&레즈비언' 섹션이 있어 동성애자들의 '문화생활' 혹은 '생활정보'까지
제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을 보고 구미가 당기기 시작했습니다.
'크루서블'이 받은 평점이 별 6개였거든요!!
(보통은 아주 뛰어나다고 하는 작품도 별 4개 정도랍니다.)
공연평의 첫 문장은 "Yes, that's six stars."로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타임 아웃의 평점은 꽤 영향력이 있다는데, 대체 어떤 작품인데 그럴까.
또 하나 구미를 당긴 것은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가 제작했다는 점이었죠.
제가 특별히 셰익스피어를 좋아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 유명한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RSC'라니,
연극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이름이거든요.
여기에 런던에서 우연히 만난 연출가 손진책 씨의 권유가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는'보통 런던에 오면 시차 적응이 되기 전에는 조금 졸아도 관계없는 작품을 보는데,
이번에는 보통 때와는 달리 '크루서블'을 하루라도 빨리보고 싶어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봤다'며, 이 작품을 꼭 보라고 했습니다.
손진책 씨도 그렇고,
요즘은 뮤지컬 연출을 주로 하지만 예전에는 정극 연출도 많이 하던 윤호진 씨도 그렇고,
이 작품을 한국에서 너무나 하고 싶었는데,아직까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도 곁들였습니다.
‘크루서블’은 1970년대 국내 공연이 금지된 작품이었다 합니다.
결국 '크루서블'을 보기로 마음을 굳히고 표를 샀습니다.
31파운드. 우리 돈으로 5만원 조금 넘는 돈인데, 1층 객석의 뒤쪽이었습니다.
공연 시간은 3시간. 졸리면 까짓 자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흰 색을 주조로 한 모노톤의 무대장치는 간결했지만,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되며 마을 사람들의 집과 법정,
그리고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숲을 형상화하고 있었습니다.
대사는 물론 다 알아듣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참 신기하게도, 하나도 졸리지 않았습니다.
출장 막바지라 무척 피곤한 상황이었는데도
저는 내내 귀를 쫑긋 세우고 무대를 주시할 수 있었습니다.
거의 10년 전이긴 해도 영화를 봐서 줄거리를 대략 알고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됐겠지요.
무엇보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뿜어내는 에너지가 너무 압도적인 데다,
작품 자체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서 졸고 싶어도 졸 수가 없었습니다.
(위노나 라이더와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나왔던 영화 ‘크루서블’의 감독은
니콜라스 하이트너입니다. 셰익스피어 전문가로 이름났고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초연 연출을 맡았던 연출가이기도 하지요. )
'크루서블'은
1692년 청교도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던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마을 세일럼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마녀 사냥을 소재로 쓰였습니다.
당시 19명의 남녀가 교수형을 당했으며, 체포된 사람이 140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아서 밀러는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을 마녀로 몰아야 하는 상황을 풀어나가면서,
195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즘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프로그램북에 나오는 아서 밀러 전문가 크리스토퍼 빅스비의 글에 따르면,
1952년 4월, 아서 밀러는 절친한 친구였던 엘리아 카잔으로부터
의회 비미(非美)활동 특별조사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에서
1930년대 공산당 모임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댔다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아서 밀러는 카잔이 자신의 이름도 지목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세일럼으로 달려가 ‘크루서블’의 자료 수집에 들어갑니다.
(연극 연출가이며 영화감독인 엘리아 카잔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1948년 연출했으며,
후에 ‘에덴의 동쪽’ ‘워터프론트’ 등의 영화를 감독했습니다.
그는 1950년대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광고를 뉴욕 타임스에 게재하기도 했으나,
세월이 흐른 뒤인 1972년,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는 것(naming names)'은 역겨운 일이었으며,
인간적으로 후회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엘리아 카잔은 1999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았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박수를 보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200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
1953년, ‘크루서블’은 뉴욕의 마틴 벡 극장에서 막을 올렸습니다.
아서 밀러 자신의 표현대로, 이 초연 프로덕션은 ‘An Act of Resistance(저항의 연극)'이 됐습니다.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 힘겹게 지속됐던 공연은 몇 주 만에 막을 내렸고,
주역으로 출연했던 배우들은 모두 ‘블랙리스트’에 올라 고초를 겪었습니다.
아서 밀러 자신도 이 작품이 이후 벨기에에서 공연될 때 여권 갱신을 거부당했습니다.
1956년 ‘위원회’에 출석한 아서 밀러는 ‘이름을 댈 것’을 거부하고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I am trying to, and I will, protect my sense of myself.
I take responsibility for everything I have ever done,
but I cannot take responsibility for another human being."
자신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진실을 지키기 위해,
‘악마가 이웃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봤다‘는 거짓 고백을 거부하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크루서블’의 주인공 존 프록터의 대사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뜨거운 것이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는 것만 같았습니다.
초연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나 같은 이방인에게도 이럴진대,
당시 관객들에게는 이 대사가 얼마나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을까.
아서 밀러가 위원회 앞에서 증언을 거부하며 했던 진술 역시 이 대사였다고 합니다.
제가 본 연극에서는 포스터에 나온 이안 글렌이라는 배우가
순박하고 강직한 농부 존 프록터 역을 맡았습니다.
자신과 불륜관계를 맺었던 소녀 아비게일의 복수심에서 비롯된 거짓말이
온 마을을 휩쓰는 마녀 사냥의 광풍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은 그 광풍 속에 희생되는 역입니다.
영화의 존 프록터, 다니엘 데이 루이스도 훌륭했지만,
바로 제 눈앞 무대에서 펼쳐지는 배우의 연기는 더욱 압도적이었습니다.
존 프록터가 아비게일의 거짓말을 밝혀내기 위해 법정에서 서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마는 심문 장면은 영화에서도 그랬지만,
긴장을 한시도 늦출 수 없는 명장면이었습니다.
특히 존 프록터의 설득으로 아비게일의 거짓말을 증언하기 위해 나왔던 소녀 메리가,
악마가 보인다며 발작하는 다른 소녀들의 광기에 질려
‘진실을 말하는 소수’가 되기를 포기하고 ‘거짓말하는 다수’에 속하기를 간청할 때,
그리고 아비게일이 마녀로 지목한 존 프록터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재판관 앞에 끌려나와 남편과 아비게일의 관계를 추궁 당할 때,
무대가 뿜어내는 열기는 제대로 숨 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뜨거웠습니다.
‘마녀 사냥’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끌고 가려는 권력자들,
거짓말을 은폐하기 위해 광적인 발작 연기도 서슴지 않는 소녀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용기 있게 진실을 택하는 보통 사람들......
아서 밀러는 ‘배신은 인간이 타고난 본능이지만,
이 본능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것 또한 인간 본능‘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서, 저는 계속 가슴이 벅찼습니다.
작품에 감동했고, 배우들의 연기에 감동했고, 평일인데도 객석을 꽉 메운 관객들에게 감동했고,
이 작품을 선택해서 보길 참 잘했다는 생각에 제 자신이 대견스러워졌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찾아보니 지난 2002년 서울시극단이 ‘크루서블’을 공연한 기록이 있더군요.
당시 존 프록터 역을 강신구 씨가 했다는데, 호연이었다고 합니다.
왜 그 때는 이 작품을 놓쳤을까 뒤늦게 후회했습니다.
손진책 씨는 제가 볼 때 이 작품을 두 번째로 관람했습니다. 다시 봐도 역시 좋다고 했습니다.
언젠가는 손진책 씨가 연출하는 연극 ‘크루서블’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 다시 ‘크루서블’을 보게 될 날을 기다립니다. <2006.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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