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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라 바야데르'를 보고 쓴 글이니 두 달 전 글이다. 좀 늦었지만 블로그에 올려본다.
오랜만에 발레 공연을 봤다. 국립발레단이 무대에 올린 ‘라 바야데르’였다. 강수진 국립발레단장 취임 이후 첫 공연으로 화제가 되기도 한 작품이다. 인도를 배경으로 사원의 무희 니키아와 전사 솔로르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라 바야데르’는 ‘발레 블랑’, 즉 ‘백색 발레’의 대표작이다. 발레 블랑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태어났다. 순백색 의상을 입은 여성 무용수들이 신비스러운 자태로 줄지어 서서 마치 공기처럼 가볍게, 우아한 몸짓으로 춤춘다.
‘라 바야데르’과 함께 ‘백조의 호수’ ‘지젤 등이 발레 블랑의 특징을 보여준다. 발레 블랑은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 어스름한 달빛이 비치는 밤, 숲속이나 호숫가 같은 곳을 배경으로 한다. 푸르스름한 조명 아래 백색 발레 의상은 더욱 빛나고 나풀나풀 무용수들의 몸짓은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이들은 우리와 같은 세속의 인간이 아니다. ‘라 바야데르’에선 망령의 왕국에 사는 영혼들이, ‘지젤’에선 밤의 숲을 떠도는 정령들이, ‘백조의 호수’에선 마법에 걸린 백조들이 춤춘다.
<발레 '백조의 호수'. 사진 제공 국립발레단>
그런데 이 ‘발레 블랑’의 대표작들은 내용면에서도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1. 사랑하는 남자의 배신 때문에 여주인공이 죽거나 커다란 위험에 빠지게 된다. 2. 남자는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여주인공을 그리워한다. 3. 여주인공은 자신을 배신했던 남자를 용서하고 끝까지 사랑한다.
‘라 바야데르’는 인도의 사원에서 춤추는 무희 니키아가 주인공이다. 니키아는 전사 솔로르와 사랑을 맹세하지만, 솔로르는 왕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감자티 공주와 결혼하며 니키아를 배신한다. 니키아는 감자티 공주의 계략으로 독사에 물려 죽음을 당하고, 솔로르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망령의 왕국을 환상으로 본다. 망령이 된 니키아는 솔로르를 용서하고 함께 사랑의 춤을 춘다.
‘지젤’은 귀족 알브레히트를 사랑하는 발랄한 시골 처녀다. 알브레히트는 귀족 약혼녀가 있으면서도 신분을 숨기고 지젤과 만남을 즐긴다. 그러나 지젤은 우연히 알브레히트의 약혼녀를 만나 알브레히트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해 죽는다. 알브레히트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숲 속 지젤의 무덤을 찾아가는데, 이 숲은 지젤처럼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죽은 여자들이 정령 ‘윌리(한국식으로는 처녀귀신이 되겠다)’가 되어 남자들에게 복수하는 곳이다. 알브레히트 역시 윌리들의 표적이 되어 죽을 지경에 빠지지만, 죽어서도 일편단심 알브레히트를 사랑하는 지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라 바야데르’와 ‘지젤’은 분위기나 배경, 등장인물이 전혀 다른데도 굉장히 비슷하게 느껴진다. 니키아-지젤, 솔로르-알브레히트, 감자티 공주-알브레히트의
약혼녀, 이렇게 인물간 대응 관계가 성립된다. 두 작품 모두
니키아와 지젤을 ‘짝사랑’하는 다른 남자가 등장한다. 영혼이 돼버린 니키아-지젤을 만나고 나서 솔로르-알브레히트가 깊은 회한과 그리움에 사로잡히는 장면으로 끝나는 것도 똑같다. 그래서
‘라 바야데르는 인도의 지젤’이라는 말도 나왔다.
‘백조의 호수’ 역시
앞의 두 작품만큼은 아니지만, 유사성이 있다. ‘백조의 호수’의 여주인공은 나쁜 마법사의 마법에 걸려 백조가 된 오데트 공주다. 오데트
공주가 사랑하는 사람은 지크프리트 왕자다. 그러나 지크프리트는 오데트와 꼭 닮은 흑조 오딜(나쁜 마법사의 딸이다)의 고혹적인 매력에 빠져, 오데트에게 사랑을 맹세했던 것도 잊고 오딜에게 청혼해 버린다. 오데트는
연인의 배신에 절망하고, 영원히 백조로 살아야 하는 운명을 슬퍼하지만,
지크프리트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공연되는 ‘백조의 호수’의 일반적인 결말은 잘못을 깨달은 지크프리트가 마법사에
맞서 싸워 이기는 것이지만, 비극적 결말을 맞는 버전도 있다.)
니키아나 지젤, 오데트는 ‘철없는 남자’의 배신 때문에 죽음에까지 이르는 큰 상처를 받고서도, 끝까지 이 사랑을 간직하며 자신을 배신했던 남성을 용서한다. 이들은 발레의 대본을 쓰고 안무한 남성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여성상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사랑은 철없는 자식들이 엄청난 잘못을 저질러도 감싸주는 어머니의 사랑에 가깝다. (작가나 안무가가 여성이었다면 이 작품들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 작품에 ‘내가 잠깐 한눈 팔더라도, 그래서 당신이 괴롭더라도, 용서해 줘. 사랑하니까’ 정도의 심리가 반영돼 있다고 해석하면 ‘오버’일까.
그러고 보면 이렇게
헌신적이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지키는 여성들은 발레뿐 아니라 많은 예술 작품에서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과연
현실 속에도 이런 이상적인 여성들이 존재할까? 아마 만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작품을 만든 사람들은, 그래서 더욱 ‘이상적인 여성상’을 갈구하고,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무대 위에 끊임없이 이런 여성들을 재현했는지도 모른다.
*방송기자클럽 회보 4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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