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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라면 세계 금융의 중심지
월스트리트나 9.11 테러가 발발했던 옛 세계무역센터, 혹은 UN 본부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나에게 뉴욕은 ‘브로드웨이’다. 공연장이
밀집된 뮤지컬과 연극의 중심지 말이다. 나의 첫 뉴욕 방문 목적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보기 위한 것이었고, 이후에도 내게 뉴욕은 공연 보러 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올 여름 휴가로 10년
만에 뉴욕을 방문한 것은 동생 가족의 미국 이주 덕분에 ‘현지 숙소’가
생겼다는 것만 믿고 즉흥적으로 결정한 터라 공연 관람을 미리 계획할 여유가 없었다. 또 예전과는 달리 이번
여행은 남편과 두 딸까지, 온 가족이 함께 하는 것이라 공연은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뉴욕에 도착해서 타임스퀘어 주변의 휘황찬란한 공연
광고들을 보니 관람 욕심이 생기는 걸 어찌하랴. 문화부를 떠난 이후로 보지 못했던 공연에 대한 갈증이
되살아났다. 뉴욕에 도착한 그 날부터 서둘러 공연 세 편을 예약했다.
급하게 구하다 보니 100달러 이하 표는 없었다. 출혈이
컸지만 언제 뉴욕에 또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감수하기로 했다.
도착한 다음날 본 공연이 2012년 토니상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해 8개 부문을 휩쓸었다는 뮤지컬 ‘원스’였다. 하도 얘기를 많이 들어 전부터 보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동명의 음악영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뮤지컬 ‘원스’는 아일랜드 출신 기타리스트와 체코 이민자 여성이 우연히 만나 음악을 매개로 사랑을 키워간다는 이야기다. 오케스트라가 따로 없고 배우들이 악기 연주까지 겸하는 게 매력이고, ‘Falling slowly’를 비롯한 감미로운 음악에 잔잔한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내가 본 날은 공교롭게도 남자 주인공을 맡은 배우에게 사정이
생겨 대역 배우가 나왔다. 아쉽게도 이 배우의 가창력이 딸려 첫 노래부터 아슬아슬했다. 극에서는 이 노래를 우연히 들은 여자 주인공이 크게 ‘필(feel) 받아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이 노래가 불안하니 몰입도가 떨어졌다. 또 이민자들이 쓰는 낯설고
억센 영어가 이 공연의 큰 재미인 듯했지만, 비영어권 관객인 나로서는 현지 관객들만큼 큰 재미를 느끼기
어려웠다.
그런데 ‘원스’ 관람의 가장 큰 적은 따로 있었다. 낮 시간 동안 뉴욕 시내 미술관을
돌아다니면서 쌓인 피로와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졸음을 참으며 무대를 주시하다가 주위를 보니 큰
딸과 남편도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조는 중이었다. 둘째는 초반부터 아예 좌석 팔걸이에 엎드려
내내 잠이 들었다. 뮤지컬이 끝나고 한잠이 들어버린 아이를 깨워 데리고 나오느라 애 좀 먹었다. 둘째는 공연을 본 게 아니라 100달러짜리 수면실을 이용한 셈이다.
‘원스’ 이후에 본 뮤지컬은 ‘마틸다’였다. 영국의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작가 로알드 달의 소설을 뮤지컬로 만들었다. 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브로드웨이 에는 작년에 상륙해 성황리에 공연되고 있다. 딸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이상한 가족들 사이에서 자라난 어린 소녀 마틸다가 뛰어난 재능과 천성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간다는 이야기다. 아이들의 연기가 아주 깜찍하고 유쾌했다. 재미있게 봤지만 역시 시차 때문인가, 어김없이 졸리는 순간이 잠깐이었지만 찾아왔다.
귀국 전날 밤에 본 ‘킹키 부츠’는 지난해 토니상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뮤지컬이다. 여장 남자 ‘드렉 퀸’들이 등장한다. 파산 위기의 가업 구두 공장을 물려받은 찰리가 드렉 퀸 롤라를 만나 드렉 퀸들을 위한 신상품 구두(그래서 제목이 ‘킹키 부츠’다)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다. 짐작 가는 스토리에 갈등과 감동 코드를 넣어 만든 고전적 뮤지컬이지만,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마음을 움직이는 지점들이 있었다. 관록의 팝가수 신디 로퍼가 맡은 음악은 신났고 역동적인 안무도 볼 만했다. 이번엔 전혀 졸리지 않았다.
뉴욕에서 본 공연들을 결산해 보니, 나중에 본 작품일수록 더 몰입도가 높았던 것 같다. 사실 공연을
본 순서는 나의 관심도에 따른 것이었는데, 몰입도는 거꾸로였던 것이다.
‘원스’를 가장 기대하고 봤는데,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고, 가장 나중에 본 ‘킹키 부츠’는 앞의 두 공연에 비해 사전 관심도는 떨어졌지만 관람의 만족도는 기대 이상이었다. 시차 적응 정도가 영향을 줬을 것이다. 또 도착하자마자 본 ‘원스’는 음악 하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는 것 외에는 줄거리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관람했지만 ‘마틸다’는 이미 원작 소설과
영화를 봤고, ‘킹키 부츠’는 인터넷을 검색해 주요 넘버의
가사를 미리 보고 갔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공연 관람은 안 그래도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해외 여행 중 낮 시간에 관광지를 다니다 저녁 때 극장에 도착하면 이미 피로한 상태가 돼버린다. 밤낮이 거꾸로인 시차에 언어의 장벽까지 감안하면 공연 관람 시간이 취침 시간이 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뉴욕 브로드웨이이나 런던 웨스트엔드를 다녀온 많은 사람들이 ‘모처럼 유명 뮤지컬을 보러
갔는데 내내 자다 나왔다’며 ‘난 역시 문화적 소양이 없어’라고 자책하는 얘기를 종종 듣는데, 전혀 자책할 필요가 없다. 졸리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그러니 해외 뮤지컬 관람에는 요령이 필요하다. 나도 이번에 뼈저리게 느낀 것처럼, 도착하자마자 공연을 보기보다는
어느 정도 시차 적응이 된 후로 관람 일정을 잡는 게 좋다. 연극 연출가 손진책 씨는 그래서 ‘해외에 가면 가장 보고 싶은 공연을 가장 나중에 본다’고 했다. 또 사전 정보 없이 그냥 보는 것보다는 미리 줄거리를 훑어보거나 뮤지컬 넘버를 들어보고 가는 게 좋다. 가사까지 함께 읽어보고 가면 더욱 효과가 좋을 것이다.
뮤지컬 ‘원스’와 ‘킹키 부츠’는 올해
라이선스 공연으로 한국에서도 선보일 예정이다. 한국에서는 시차도 없고 언어 장벽도 없다. 한국어 공연으로 다시 보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고 기다려진다.
*방송기자클럽 회보 8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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