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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1999년 영국 중부 노스햄턴 지역의 한 신발 공장 이야기를 트러블 앳 더 톱: 킹키 부츠 공장(Trouble at the Top: the Kinky Boot Factory)’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 노스햄턴은 한 때 전통적인 영국 신발 산업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지만, 저렴한 외국산의 공세와 새로운 패션의 흐름에 밀려 쇠락해 가고 있었다. BBC가 소개한 ‘WJ 브룩스(WJ Brooks)’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소규모 가족 기업으로, 역시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색다른 활로를 개척했다.

WJ
브룩스의 대표는 43살의 스티브 페이트먼. 그는 아버지로부터 공장을 물려받아 23년째 신사화를 만들고 있었다. 경영난으로 고민에 빠져 있던 페이트먼은 어느 날 색다른 주문 전화를 받는다. 바로 여자 신발을 남자 사이즈로 만들어 달라는 것. 트랜스젠더와 드랙 퀸(여장 남자)들을 위한 상품을 파는 상점 주인 수 셰퍼드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

페이트먼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주문을 처음엔 거절했으나 셰퍼드의 설명을 들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지금까지 만들던 신사화와는 전혀 다른 신발을 만들어 틈새 시장개척에 나서기 시작했다. 화려한 스틸레토 힐(가늘고 높은 굽이 있는 여성용 구두), 무릎을 덮는 롱 부츠를 남성 사이즈로 만들되, 남성의 몸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굽에 강철 심을 박았다. ‘킹키 부츠의 시작이었다. (‘Kinky’라는 단어에는 성적 취향이 독특하다는 뜻이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영국에서 방영되자마자 큰 화제가 되었다. ‘킹키 부츠라는 소재 자체도 색달랐지만, 공장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휴먼 스토리가 시청자를 매료시켰다. 이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2005년 영국에서는 킹키 부츠라는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졌고, 몇 년 후 동명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탄생했다. 관록 있는 팝가수 신디 로퍼가 음악을 맡은 뮤지컬 킹키 부츠는 지난 2013년 권위 있는 공연상인 토니상 6개 부문을 석권했고, 현재 한국에서도 공연되고 있다.

폐업 위기의 신발공장 프라이스 앤 선즈(Price & Sons)’를 물려받은 찰리 프라이스가 드랙 퀸 롤라를 만나 드랙 퀸을 위한 킹키 부츠를 만들면서 공장은 활력을 되찾는다. 실화 속 ‘WJ 브룩스프라이스 앤 선즈, 스티브 페이트먼이 찰리 프라이스로 바뀌었다. 극화 과정에서 가상의 인물 롤라가 추가되었다. 찰리와 롤라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간 관계가 생생하게 부각된다. 아버지와 아들, 공장주와 직원의 관계도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신나는 음악과 춤에 절로 어깨가 들썩여지고,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고전적 스타일이지만 진부하지 않고 참신 발랄하다.

뮤지컬은 경쾌한 성공담이지만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며,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에는 울림이 있다.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롤라를 오해하고 외면하던 사람들이 롤라의 진심에 마음을 열고, 찰리와 롤라, 공장 직원들이 마치 한 가족처럼 똘똘 뭉쳐 일터를 지켜내는 모습을 보며 나는 흐뭇한 감동을 느꼈다.   

그런데 솔직히 이런 일들은 현실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현실에선 누군가를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 단정하고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사장과 직원이 저렇게 자유롭게 소통하며 가족처럼 지내는 기업이 얼마나 될까.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망하지 않는세상에서, 가족 같은 직원들을 실업자로 만들지 않겠다며 전 재산을 걸고 분투하는 기업주가 몇 명이나 될까. 나는 역시 무대는 환상일 뿐이라고 생각하다가, 이 뮤지컬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럼 무대가 아닌 현실의 킹키 부츠는 어떻게 됐을까? 알아보니 페이트먼의 공장은 한동안 킹키 부츠로 활로를 찾았지만, 이 틈새 시장에도 경쟁자들이 몰려들면서 다시 경영난에 봉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통적인 신발 시장에서 일어났던 일이 킹키 부츠 시장에도 똑같이 일어난 것이다. 페이트먼은 결국 공장 문을 닫았다. 그는 현재 소방수로 일하고 있다.

현실에서도 킹키 부츠의 성공담이 계속 이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현실과 무대가 다르다고 낙담하지는 않기로 했다. 현실이 있기에 무대도 존재하는 법. 무대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만 현실을 넘어서는 꿈을 꾸고 상상하는 곳이다. 비록 페이트먼의 킹키 부츠 공장은 문을 닫았지만, 찰리와 롤라의 킹키 부츠 이야기는 무대 위에서 이렇게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수많은 관객들을 함께 꿈꾸게 하면서

*방송기자클럽 협회보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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