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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오천. 이 이름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면 중국인 작가 장하오천(张皓宸)의 이름이 먼저 뜬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당신이라는 책을 출간한 인기 작가인데 한국에도 독자가 꽤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장하오천(张昊辰)이 있다. 바로 랑랑과 유자왕의 계보를 잇는다고 불리는 중국인 피아니스트다.

사실 한국의 공연시장에서 중국인 피아니스트는 그리 장사가 잘 되는연주자는 아니다. 문화혁명을 겪은 중국의 음악가들이 클래식 음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경제적으로 낙후되었던 시절부터 걸출한 연주자들을 배출해왔다. 중국은 한국에 비해 클래식 음악 후진국으로 여겨졌고, 중국인 피아니스트에 대한 평가도 박했다.

중국 최초 쇼팽 콩쿠르 우승이라는 화려한 경력이 있는 윤디 리는 예외적으로 한국에서도 인기를 누렸지만, 2015년 내한공연에서 보여준 실망스러운 연주 이후로는 급격하게 시들해졌다. 세계적인 스타인 랑랑이나 유자왕도 연주 자체보다는 쇼맨십이나 연주의상 같은 연주 외적인 측면에서 더 관심을 끌었다. 한때 전세계에서 표를 매진시키는 랑랑이 한국 공연만은 매진이 안돼 신경 쓰고 있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랑랑이나 유자왕은 콩쿠르 경력이 아니라 유명 연주자의 대타로 무대에 섰다가 두각을 나타난 케이스다. 하지만 장하오천은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2009년 중국인 최초, 역대 최연소(19) 우승했다는 화려한 경력이 있다. (당시 시각장애가 있는 일본인 피아니스트 노부유키 쓰지가 공동 우승했고, 한국의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2위를 차지했다) 2017년 권위 있는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를 수여받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연주한 적이 있다. 그런데도 한국인 관객들에게 장하오천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다.

사실 나는 지난 2012년 차이나 내셔널 심포니의 내한공연에서 장하오천의 연주를 본 적이 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라는 경력에 호기심을 갖고 지켜봤지만, 당시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당시 그는 중국 곡인 황하 협주곡을 협연했다. 그런데 때로는 과장되게 느껴지기도 하는, 웅장한 영화음악에 중국풍을 섞은 듯한 이 곡 자체가 별 매력이 없었을 뿐 아니라 연주자의 개성을 드러내기 좋은 곡도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 11일에 열린 첫 내한독주회에서 장하오천은 자신이 어떤 연주자인지 확실히 보여줬다. 이번 독주회 프로그램은 슈만, 피에르 불레즈, 프란츠 리스트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장하오천의 연주는 흔히 섬세하다는 형용사로 묘사되곤 하는데, 첫 곡인 드뷔시 피아노를 위한 3개의 영상 제 2에서부터 실감할 수 있었다. 지극히 섬세한 터치로 드뷔시의 인상주의적 음향을 절묘하게 살려냈기 때문이다.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음색이 너무 좋아서 귀가 쫑긋해졌는데,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리고 객석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한동안 지속됐던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두 번째 곡인 슈만의 피아노를 위한 유머레스크역시 극과 극의 감정을 오가는 이 작품의 정서를 훌륭하게 표현해냈다. 자기도 모르게 하는 것일 텐데, 장하오천이 종종 연주하면서 허밍을 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휴식시간이 끝나고 2부가 시작되자마자 장 하오천이 마이크를 들고 나왔다. 장하오천은 피아니스트는 연주로 말해야 한다고 믿지만, 피에르 불레즈의 피아노 소나타가 이 공연장에서 처음 연주되는 것이라서 설명에 나서게 되었다고 했다.

지금 연주할 불레즈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은 미안하게도 아무 멜로디가 없습니다. 무조의 곡이기도 하지요. 아마 금호아트홀에서 처음 연주되는 곡일 거예요. 공연장에서 자주 연주되지 않는 곡이니까요. 그러나 멜로디가 없어도, 이 곡에 내재한 드라마적 요소, 색채, 강렬함 등이 너무나 멋지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곡입니다.”

 

또 불레즈에 이어 리스트 소나타를 선곡한 이유도 밝혔다. 리스트 소나타는 대표적인 낭만주의 곡으로 콘서트 홀에서 수없이 연주돼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지만, 작곡되었을 당시에는 역시 시대를 앞서가는 아방가르드였다는 것이다. 그는 불레즈에 이어 리스트를 들으면 이전과 다르게 들릴 것이라고 했다.

프로그램 선곡과 구성을 연주자가 직접 설명해주는 걸 본 기억은 거의 없는데, 장하오천의 설명은 적절했고 음악을 듣는 데 도움이 되었다. 불레즈 소나타는 정말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곡이었다. 하지만 나는 충분히 이 곡을 즐길 수 있었다. 따라갈 멜로디는 없었지만 장하오천의 안내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음의 세계를 이곳 저곳 탐험하는 느낌이랄까. 황진규 칼럼니스트의 프로그램 노트처럼 기이하고 섬뜩한 아름다움을 지닌이 곡의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이어진 리스트 소나타는 과연 장하오천의 말대로 아방가르드하게 들렸다. 여러 번 들었던 멜로디였지만 이번에는 음 하나하나가 귀 속으로 뛰어들어오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마치 리스트 소나타를 세심하게 분해했다가 입체적으로 새롭게 조립한 것 같았다. 장하오천은 섬세했지만 열정적이기도 했다. 학구적이면서 아주 다채로운 표정을 지닌 연주자였다. 앙코르로는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쇼팽 강아지 왈츠, 모차르트 소나타 중 한 악장을 연주해 갈채를 받았다.

뜻밖에 혼자 공연 보러 왔다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씨를 마주쳤다. 신문에서 장하오천 인터뷰 기사 보고 궁금해서 보러 왔다는데, 정경화 씨도 장하오천에 대해 정말 기가 막히는 연주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좋은 연주에 객석은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중국인 관객들이 꽤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한국인 유료 관객은 더 적었을 것이다.

장하오천의 공연이 열린 금호아트홀은 이번 달까지만 운영하고 문을 닫는다. 세든 건물의 주인이 바뀌면서 공간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공연은 금호아트홀 연세로 옮겨 계속 진행되겠지만, 이 장소에 서린 추억이나 역사를 생각하면 아쉬운 일이다.

중국인 피아니스트에 별 기대가 없다면 장하오천의 연주를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앞으로도 장하오천의 연주라면 찾아가 볼 생각이다. 장하오천은 랑랑, 유자왕과 마찬가지로 커티스 음악원에서 게리 그라프만에게 배웠지만, 완전히 다른 개성을 보여준다. 클래식 음악에 눈을 뜬 중국 대륙이 다양한 개성의 좋은 연주자들을 여럿 배출해내고 있다. 역시 강호는 넓고 고수는 많다.

*네이버 중국판 운영하는 차이나랩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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