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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립극단이 지난해 관객들을 대상으로 ‘다시 보고 싶은 연극’을 묻는 설문 조사를 했다. 압도적인 차이로 1위를 차지한 작품이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었다. 국립극단은 이 연극을 창립 70주년인 올해의 주요 프로그램으로 선정했다. 6월 25일부터 7월 26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기로 하고 공들여 준비해왔다. 공연 티켓은 예매 시작한 당일 모두 팔려나갔다. 이 연극은 중국 고전 희곡 ‘조씨고아’가 원작이다. 과연 어떤 작품이길래?
‘조씨고아’는 원나라 때 작가 기군상이 중국 진나라를 배경으로 쓴 ‘복수극’이다. 중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제목 그대로 조씨 집안의 고아 이야기다. ‘조씨고아’는 ‘동양의 햄릿’으로 불리며 18세기에 이미 유럽에 소개되었다. 로열 세익스피어 컴퍼니 같은 해외 극단들도 이 작품을 공연했다. 연극뿐 아니라 드라마로, 영화로, 경극으로, 무용으로, 다양한 장르로 수없이 재창조되고 있다.
한국 국립극단이 공연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고선웅이 각색과 연출을 맡고 하성광, 장두이, 유순웅, 이형훈 등이 출연해 지난 2015년 11월 명동예술극장에서 초연 무대에 올랐다. 국내 주요 연극상을 휩쓸었던 이 작품은 다음 해인 2016년 중국 초청공연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고선웅은 ‘조씨고아’ 원작을 거의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적절한 각색으로 이 작품을 새롭게 창조해냈다.
‘조씨고아’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군의 총애를 받던 문신 조순을 질투한 도안고 장군은 간교한 계략으로 누명을 씌워 조씨 집안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조순 일가 300명이 모조리 죽지만, 갓 태어난 손자 ‘조씨고아’는 이 집안의 식객이었던 시골 의원 정영에게 맡겨지고, 정영은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늦둥이 귀한 아들과 바꾼다. 도안고는 정영의 아들을 조씨고아로 알고 죽인 후, 조씨고아를 정영의 아들로 알고 자신의 양아들로 삼아 무예를 가르친다. 조씨고아가 자라 20살이 되자, 정영은 조씨고아에게 진짜 신분을 알려주고, 집안의 복수를 당부한다. 조씨고아는 양아버지 도안고가 사실은 자신의 집안 원수라는 믿기 어려운 진실 앞에 고민하다가 복수에 나선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인들에게 ‘복수’는 중요한 테마다. 하지만 한국판 ‘조씨고아’는 통쾌한 복수극이 아니다. 고선웅은 ‘도안고에게 보복을 하고 난 정영의 기분이 어땠을까 무척 궁금했다’고 했다. 그 기분이 후련하고 만족스러웠다면 이 연극은 통쾌한 복수극이 됐을 것이지만, 복수를 했는데도 형언할 수 없는 공허가 밀려왔다면 복수에 대한 다른 주제를 다루는 연극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후자라고 판단했다.
판단 잘못으로 조씨 일가를 멸했던 주군은 이번엔 아무렇지도 않게 도안고 일가를 몰살하라 명한다. 권력자는 권력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언젠가 참사의 와중에 살아남은 누군가가 다시 복수에 나설지 모른다. 조씨고아는 원수를 갚았으니 기뻐하라고 하지만, 정영의 심정은 허망하고 쓸쓸하다. 극의 마지막은 묵자가 담당한다. 검은 옷을 입고 나오는 묵자라는 인물은 극중 내내 대사 없이 등장인물의 얼굴에 검은 부채를 펼치는 동작으로 그들의 죽음을 표현하는데, 결말에서는 핵심적인 대사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런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국립극단은 올해 상반기 코로나19로 기획공연이 대부분 취소되거나 연기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공연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으면서 방역 강화조치는 연장되었고, 국공립 공연장의 문은 굳게 닫혔다. 국립극단은 지난 15일 눈물을 머금고 공연 잠정 중단을 발표했다. 이미 팔린 표는 모두 취소하고 환불 조치에 들어갔다. 하지만 공연 준비는 예정대로 지속되었다. 원래의 폐막 예정일인 7월 26일 전에 공연장이 다시 문을 열 수 있으면 남은 기간만큼 공연하고, 공연장이 계속 닫혀 있으면 온라인 상영으로 돌릴 예정이라 한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지난 23일과 24일, 명동예술극장에서 최종 무대 리허설을 진행했다. 언제 개막할 수 있을지 기약 없는 공연이지만, 무대 리허설은 해야 했다. 공연과 똑같이 진행된 이 리허설은 공연 담당 기자들과 관계자에게만 공개되었다. 초연 때부터 공연을 이어온 배우들에 더블 캐스트로 일부가 새로 합류한 출연진이었다. 비록 관계자들만 참석한 리허설이지만, 오랫동안 코로나19로 무대에 서지 못했던 배우들에게는 오랜만에 객석을 채운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한 것과 같았다.
마지막 장면이 끝나자 길고 긴 박수가 이어졌다. 배우들 마음 속에서는 무대에 다시 선 기쁨, 기약 없는 개막을 기다리는 허탈함, 아쉬움, 수많은 상념들이 교차했을 것이다. 언제 개막할지 모르는 공연 리허설을 하는 배우들도, 보는 사람들도, 모두 비장한 마음이 되어 있었다. 고선웅 연출가는 자주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았다. 나 역시 울컥했고, 다른 기자들 중에도 눈시울이 붉어진 사람들이 많았다.
공연이 끝나고 만난 배우들은 ‘그래도 우리는 공연을 준비하며 관객을 만날 날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온라인 공연이라는 차선책이 있기는 하지만, 공연은 본질적으로 관객과 상호작용 속에 완성되는 ‘현장의 예술’이다. 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담긴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꼭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과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한다.
*2020년 6월 네이버 중국판 차이나랩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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