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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발레, 하면 떠올리는 그림이 있다. 순백색 의상을 입은 여성 무용수들이 신비스러운 자태로 줄지어 서서 마치 공기처럼 가볍고 우아한 몸짓으로 춤추는 모습, 바로 ‘발레 블랑(백색 발레)’이다. 발레 블랑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태어났다. ‘백조의 호수’ ‘지젤’ 그리고 ‘라 바야데르’등이 발레 블랑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발레 블랑은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 어스름한 달빛이 비치는 밤, 숲 속이나 호숫가 같은 곳을 배경으로 한다. 푸르스름한 조명 아래 백색 발레 의상은 더욱 빛나고, 무용수들의 몸짓은 우아하고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이들은 우리와 같은 세속의 인간이 아니다. ‘백조의 호수’에선 마법에 걸린 백조들이, ‘지젤’에선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죽은 처녀들이 윌리라는 정령이 되어, ‘라 바야데르’에선 망령의 왕국에 사는 영혼들이 춤춘다. 시인 이백이 보았다면 이 역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고 읊었을 것 같다.
‘백조의 호수’와 ‘지젤’은 비교적 자주 공연되는 편이지만, ‘라 바야데르’는 출연진도 많고 스케일이 큰 대작으로 쉽게 만날 수 없었다. 국립발레단은 10월 30일 개막하는 ‘라 바야데르’를 ‘3년만의 ‘귀환’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유니버설 발레단은 이보다 조금 앞서 ‘라 바야데르’를 창단 40주년 기념으로 6년만에 무대에 올렸다. 자주 공연되지 않을뿐더러 특별한 의미를 담아 공연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라 바야데르’는 프랑스어로 ‘사원의 무희’를 뜻한다. 인도의 사원에서 춤추는 무희 니키아가 주인공이다. 니키아는 전사 솔로르와 몰래 사랑을 맹세하고, 제사장 브라만은 니키아에게 구애했다 거절당하고 앙심을 품는다. 군주인 라자 왕은 솔로르를 자신의 딸 감자티 공주와 결혼시키려 하고, 솔로르는 왕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다. 브라만이 왕에게 솔로르와 니키아의 관계를 알리자, 라자 왕은 니키아를 죽이려 한다. 니키아는 솔로르와 감자티 공주의 약혼식 피로연에서 축하의 춤을 추다가 꽃바구니 속 독사에 물려 죽고, 솔로르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다가 환상 속에서 망령의 왕국을 본다. 망령으로 나타난 니키아는 솔로르를 용서하고 함께 사랑의 춤을 춘다.
‘라 바야데르’는 ‘블록버스터 발레’라고 불리는 만큼, 볼거리가 많다. 일단 배꼽을 드러낸 하렘 스타일 옷을 입은 무희들이 이국적인 매력으로 눈길을 끈다. 버전에 따라 대형 코끼리까지 등장하는 2막 감자티와 솔로르 약혼식 장면은 화려하고 다채로운 디베르티스망 (줄거리와 관계 없이 펼쳐지는 춤 모음)을 자랑한다. 인도 무희들의 부채 춤, 물동이 춤, 앵무새 춤, 전사들의 북춤, 황금신상 춤까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무대들이 잇따라 펼쳐진다.
물론 주역들의 파 드 되(2인무)와 솔로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국립발레단의 이번 공연에는 객원으로 해외 유명 발레단의 스타들이 합류한다.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에투알 박세은과 마린스키 발레단의 수석무용수 김기민이 출연한다니, 벌써부터 기대가 부풀어오른다.
그런데 ‘라 바야데르’의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역시 발레 블랑이다. 3막 망령의 왕국. 30명이 넘는 군무 무용수들이 하얀색 클래식 튀튀를 입고 스카프를 두른 채, 높은 언덕 위에 하나 둘씩 등장한다. 망령들은 차례로 아라베스크(한 발로 서서 다른 발을 뒤로 뻗는 동작)와 스텝을 반복하며 경사진 언덕을 천천히 줄지어 내려온다. 대열이 흐트러지지 않고 무용수들이 마치 한 몸처럼 정확하게 합을 맞춰야 완성되는 이 장면은 신비롭고 장엄하다.
무용수들이 아라베스크 동작을 하느라 한쪽 다리를 뒤로 뻗으면, 나는 바닥을 딛고 서 있는 나머지 한쪽 다리에도 자꾸만 시선이 간다. 아름다운 아라베스크 동작을 완성하기 위해 한쪽 다리가 얼마나 팽팽한 긴장으로 바닥을 디디고 있는지 본다. 이 다리는 얼마나 연악하면서도 강인한가! 다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질 때도 있다. 이 미세한 떨림으로 경사진 무대 위 아라베스크의 균형이 유지되는 것 같아 숙연한 느낌마저 든다.
‘망령의 왕국’ 군무를 볼 때마다 나는 ‘지젤’의 윌리들을 떠올린다. ‘지젤’에서는 백색의 로맨틱 튀튀를 입은 군무 무용수들이 아라베스크 자세로 박자 맞춰 자리를 옮겨가며 대열을 교차시키는 장면이 유명하다. 수많은 무용수들이 살짝 뛰었다가 착지하고, 다시 뛰었다가 착지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교차하고, 마치 나비의 날갯짓 같은, 혹은 꽃잎이 너울거리는 것 같은 전체 그림을 완성한다.
발레를 처음 보기 시작했을 때에는 높은 도약과 빠른 속도의 회전, 마치 곡예처럼 사람을 돌리고, 높이 들어올리고, 받는 고난도 동작에 매료됐었다. 하지만 점점 더 느릿하고 조용한 움직임에 마음이 간다. 이 느린 동작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는지 헤아려보며 뭉클해진다. ‘라 바야데르’나 ‘지젤’의 발레 블랑은 그런 면에서도 최고다.
사실 ‘라 바야데르’와 ‘지젤’은 내용 면에서도 통하는 데가 있다. ‘지젤’에서도 여주인공은 사랑하던 남자의 배신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된다. ‘지젤’의 윌리들은 망령과 비슷한 존재다. ‘라 바야데르 역시, 니키아가 솔로르에게 배신당하고 죽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라 바야데르’의 망령들도 뭔가 한을 품고 죽은 존재들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야기 구조와 등장인물 간의 관계도 유사하다. ‘라 바야데르는 동방의 지젤’이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나는 ‘라 바야데르’와 ‘지젤’을 볼 때마다 ‘남자들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젤과 니키아의 사랑은 어떤 장애도 굳세게 뛰어넘지만, 솔로르와 알브레히트의 사랑은 현실에 쉽게 굴복하고 타협한다. 나쁜 남자, 성숙하지 못한 남자, 한 마디로 말하면 배신자다. 발레 블랑의 또다른 대표작인 ‘백조의 호수’도 비슷하다. 아무리 연인과 닮았다 해도 다른 여자에게 사랑의 맹세를 쉽게 해버린 왕자가 문제다.
남주인공 입장에서 바라본 여주인공은 이런 사람이다. 다른 남자는 쳐다보지 않고 나만 바라보는 여자,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맞설 수 있는 여자, 심지어 내가 배신해도 용서해 주는 여자. 뒤늦은 후회에 괴로워하는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여자. 현대 여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저런 놈이 뭐가 좋다고?’ 싶지만 말이다.
세상에 이런 여자가 어디 있느냐고? 없으니까 발레 대본과 안무를 맡은 (남자) 예술가들은 희망과 동경을 담아 이런 여자를 작품에 등장시킨 것 아닐까. 죽음을 넘어서까지 무조건적인 사랑을 남자에게 바치는 이 여자는 순백의 고결함과 숭고함, 속세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발레 블랑의 무대에서, 마치 성녀처럼 남자를 ‘구원’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이 된다. 그러고 보면 신비로움으로 가득한 발레 블랑은 이렇게 비현실적인 사랑을 펼쳐 보여주는 데 아주 적합한 설정이었던 셈이다.
*국립발레단 소식지 '포인트 앤 플렉스'에 기고한 글. 예전에도 비슷한 맥락의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라바야데르' 공연에 즈음해 다시한번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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