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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을 벗어나는(脫) 공연’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얘기를 듣고, 영국에서 본 오페라 한 편을 제일 먼저 떠올렸다. 10여 년 전에 본 공연이지만 그만큼 인상이 선명했다. 영국 연출가 그레이엄 빅(Graham Vick)이 이끄는 버밍엄 오페라 컴퍼니의 오페라 ‘이도메네오’였다. 그레이엄 빅은 로열 오페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같은 유명 오페라 극장에서 활동하는 연출가이면서, 1987년 자신이 창립한 ‘버밍엄 오페라 컴퍼니’의 작업에 열정을 쏟아왔다.
그레이엄 빅은 30여 년 전부터 대중이 오페라에 대해 느끼는 ‘장벽’을 없애기 위해 ‘탈 공연장’을 시도했다. 그는 바그너 이후 표준이 된 오페라 극장은 오케스트라가 무대와 관객을 이어주는 역할에서 벗어나 시야에서 사라지고, 관객이 어둠 속으로 물러나면서 관객이 단순한 관찰자로 격하되었다고 생각했다. 또 오페라 극장이 너무 큰 것도 관객과 무대의 상호작용을 방해한다고 봤다.
버밍엄 오페라 컴퍼니의 초창기 작업은 그래서 오페라 극장을 벗어나 지역 스포츠센터나 옛 무도회장 등 색다른 장소로 찾아가는 공연에 집중되었다. 그 다음 단계는 지역 주민들을 공연에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원래 오페라 극장을 드나들던 관객이 아니라, 지역에 뿌리내려 살고 있는 버밍엄 사람들을 공연에 참여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봤던 ‘이도메네오’ 역시 그런 공연이었다.
사전 안내에 따라 이동하기 편한 옷차림으로 찾아간 버밍엄 시 외곽 공장지대. 공연 장소는 과거 고무 공장이었다가 방치되어 폐허가 되다시피 한 낡은 건물이었다. 황량한 건물 내부 빈 공간 곳곳에 모래를 쌓고 세트를 배치했다. 오케스트라 피트도 관객석도 따로 없었다. 오케스트라는 한쪽에 자리잡았고, 오페라 장면 장면은 이 공간 곳곳을 옮겨 다니며 진행되었다.
관객들도 출연자들과 함께 이동하며 공연을 봤는데, 말 그대로 ‘코앞에서’ 노래와 연기를 즐기면서 극 속으로 빠져들었다. 주역 가수들을 제외한 코러스 170명은 버밍엄 지역 주민들로 구성되었다. 공연은 이탈리아어 대사를 번역해 영어로 진행되었다. 대사를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몰입감은 최고였다. 나 역시 극중 인물이 된 것을 깨닫고 전율을 느낀 순간도 있었다.
오페라 초반, 전쟁 포로로 잡혀온 트로이의 일리아 공주에게 이다만테 왕자가 사랑을 고백한다. 일리아 공주는 가슴에 노란색 포로의 표지를 달고 있다. 왕자는 공주에게 ‘당신은 이제 자유의 몸’이라며, 이 표지를 떼어 자신의 가슴에 달고는 ‘이제 내가 사랑의 포로’라고 노래한다. 하지만 적국의 왕자와 사랑에 빠지는 게 죄스러운 공주는 이를 거부하며 표지를 되돌려 받는다.
그런데 관객들도 똑같은 표지를 달고 있었다. 공장에 들어올 때 컴퍼니 직원이 관객들의 웃옷에 하나씩 붙여준 노란색 접착식 메모지였다. 나는 처음에는 이 메모지가 티켓을 냈다는 확인 표시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관객을 극중 인물로 만들어주는 중요한 소품이라는 걸 깨닫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조금 뒤 이어진 트로이 포로의 석방 장면에서 코러스가 관객들 사이를 이리저리 누비면서 옷에 달린 노란색 메모지를 하나하나 떼어줬다. 내 옷에서 메모지를 떼어준 코러스는 활짝 웃으며 ‘당신은 이제 자유예요’ 하고 속삭이더니,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레이엄 빅의 ‘탈 공연장’ 오페라는 ‘관객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오페라’에서 ‘지역민과 관객을 공연에 참여시키는 오페라’로 진화했다. 공연 장소만 바뀐 게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무대와 객석을 분리하던 ‘제 4의 벽’이 무너졌다. ‘탈 공연장’이 무대와 관객의 관계, 관객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그의 ‘참여형’ 오페라는 주차장, 노숙자 보호소, 창고, 청소년 센터 등으로 최근까지 이어져왔다. 나는 당시 특별히 정해진 무대가 없고, 관객이 극에 참여하는 몰입형 공연을 가리키는 ‘이머시브 시어터(immersive theater)’ 개념을 몰랐지만, 돌이켜 보니 그 때 일종의 ‘이머시브’를 체험한 셈이다.
올해 초 영국 국립극단과 캐나다 국립영화원이 공동 제작한 ‘DRAW ME CLOSE’는 ‘이머시브’의 첨단을 보여주는 1대 1 공연이다. 관객은 VR 헤드셋을 쓰고 무대로 들어가는데, 등장인물은 암에 걸린 엄마와 다섯 살 아들, 단 두 명이다. 엄마의 65년 삶을 풀어내는 내용인데, 관객은 엄마 역할 배우와 함께 대화하고 움직이고 ‘터치’하면서 자연스럽게 아들 역할을 하게 된다. 촉각까지 활용해 관객의 관여를 극대화하면서 공연의 개념을 확장시켰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위대한 개츠비’ 라이선스 공연을 계기로 ‘이머시브 시어터’가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위대한 개츠비’는 관객이 개츠비 파티에 초대받은 손님이 되어 배우들을 따라 이동하면서 관람하도록 구성되었다. 공연장을 벗어나 개츠비 맨션처럼 꾸며진 전시관 건물에서 열린 이 공연은, 기존의 공연 관객층 뿐만 아니라 색다른 체험을 즐기는 젊은이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사실 ‘이머시브’까지는 아니더라도 ‘탈 공연장’은 한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진행되었다. 많은 공연단체들이 관객 개발과 문화향유 기회 확대 차원에서 교회나 학교, 마을회관 등으로 ‘관객을 찾아가는’ 공연을 하거나, 미술관 고궁 한옥 공원 등 색다른 장소에서 공연을 해왔다. 장소가 바뀌어도 무대와 객석의 구분은 공연장과 별 차이 없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공연장 세팅을 벗어나 무대와 객석 모습이 바뀌고 거리가 가까워지면 공연 성격에도, 관객 구성에도 변화가 생겼다.
‘탈 공연장’으로 원래 공연의 본질에 더 가까워지는 장르도 있다. 현재 한국의 공연장은 대부분 서양의 근대 극장 시스템에 기초를 두고 있어서, 한국 전통 공연들에 잘 맞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공연들은 공연장 밖에서 더욱 생동하는 매력을 드러낼 때가 많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위대한 유산 오늘과 만나다’ 시리즈로 국립중앙박물관 열린마당에서 종묘제례악과 농악, 판소리를 공연한 것이 좋은 사례다. 정가와 판소리를 한옥에서 들었을 때, 공연장에서보다 훨씬 더 큰 감흥을 느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코로나19 이후 두드러지는 ‘탈 공연장’ 추세는 감염 우려가 적은 야외 공연이다. 뉴욕 필하모닉은 ‘뉴욕필 밴드왜건’이라는 이름으로 픽업 트럭에 탄 단원들이 도심 곳곳을 찾아 게릴라 콘서트를 벌였다. 한국의 그룹 ‘고래야’는 ‘드라이브 인’ 극장에서 공연한 경험을 들려줬는데, 차에 탄 관객들이 라이트를 켜거나 경적을 울리는 방법으로 호응을 보내줬다고 한다. 예술의전당은 최근 새로 야외 공연이 가능한 무대를 하나 더 만들었다.
아예 물리적인 ‘장소’를 벗어나 가상 공간으로 가기도 한다. 미국의 래퍼 트래비스 스콧은 지난 4월 이용자 3억 5천만명의 배틀 게임 ‘포트나이트’ 속 가상현실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스콧의 아바타가 노래한 이 공연은 무려 1천2백만명 이상이 관람했다. 이용자의 아바타들이 공연을 보면서 들썩들썩 춤을 췄다. 성공에 고무된 ‘포트나이트’는 라이브 콘서트를 위한 스튜디오를 새로 만들었고, 앤더슨 팩 등 유명 가수들의 게임 속 라이브 공연이 펼쳐졌다.
‘탈 공연장’ 공연 중에 배우와 관객간 접촉이 많은 이머시브 공연들은 대부분 중단되었다. 한국에서도 ‘그레이트 코멧’ 공연이 내년으로 미뤄졌다, 하지만 이머시브 공연의 선구자격인 영국 펀치드렁크 극단은 최근 ‘포켓몬 고’를 제작한 게임 회사 니안틱과 공동으로 이머시브와 AR(증강현실)을 결합한 새로운 작품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코로나19로 공연장이 가동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고 있는 상황이니, 공연계가 ‘탈 공연장’으로 돌파구를 찾으려는 움직임은 더욱 다양해질 것이다. 어떤 새로운 장소를 찾을지, 어떤 새로운 기술과 결합할지, 앞으로 ‘탈 공연장’이 어디까지 더 나아갈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다만 어떤 형태이든 관객과 무대, 관객과 공연하는 사람 사이의 상호 작용이 관건이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웹진 '공진단'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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