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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최근 공연을 위해 한국을 다녀갔다. 요즘처럼 ‘공연한다’는 게 각별하게 다가오는 시기가 언제 있었나 싶다.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한 코로나19 시국이니까. 리처드 용재 오닐은 한국에서 공연하기 위해 입국 후 홀로 2주 격리 기간까지 거쳤다.
리처드 용재 오닐이 2주간의 격리가 끝나고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병원이었다. 코로나19 진료 거점병원인 고양시 명지병원을 찾아 의료진을 위한 감사 연주를 했다. 5월 19일, 명지 병원 로비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의 관객은 의료진과 환자, 환자 가족들이었다. 나도 취재를 위해 찾아갔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중 한 곡을 비올라로 연주한 리처드 용재 오닐은 피아니스트 이소영과 함께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 슈베르트의 가곡 ‘보리수’, ‘아베마리아’를 잇따라 연주했다. 그의 비올라 선율이 울려퍼지면서 병원의 공기는 확 달라졌다. 차가운 느낌의 병원 로비에 따뜻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오가던 사람들도 멈춰서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분주한 일상 속에 잠시 찾아온 소중한 순간. 더구나 그 일상이 ‘코로나와 싸우는’ 힘겨운 일상이라면.
“사람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헌신하시는 이 병원 의료진 분들께 감사 인사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세상의 진정한 영웅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가족을 집에 남겨두고 일터에 와서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 병원의 간호사 중에 코로나19에 감염되신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진료를 계속 하고 계시고, 그래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연주 도중 마이크를 잡은 그의 눈시울이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투병 중인 어머니를 보살피느라 그는 미국에서도 병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다. 병원에서 흰 가운을 입은 의료진들을 보니 더욱 어머니가 생각 나는 것 같았다. 리처드 용재 오닐의 어머니 콜린 오닐(한국 이름 이복순)의 사연은 오래 전 TV 다큐멘터리로 소개된 적도 있다.
리처드 용재 오닐의 어머니는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입양된 전쟁 고아였다. 네 살 때인 1957년 미국으로 입양되어 ‘콜린 오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어머니 콜린 오닐은 미혼모로 리처드 오닐을 낳았고, 리처드 오닐은 어머니를 입양한 미국인 외조부모 손에 자랐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헌신적인 보살핌과 사랑, 격려에 힘입어 리처드 오닐은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했다. 그는 스승인 줄리아드 음대 강효 교수를 만나 ‘용재’라는 한국 이름을 얻고, 어머니의 고향 한국과 맺은 깊은 인연을 ‘리처드 용재 오닐’이라는 이름에 새겼다.
리처드 용재 오닐의 병원 음악회는 본 윌리암스의 ‘푸른 옷소매’와 앙코르 ‘섬집 아기’로 끝났다. 그는 공연 후 인터뷰에서 의료진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서, ‘어머니가 편찮으신데 아들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했다. 감정이 복받쳐서 죄송하지만 여러분도 이해하실 것이라면서,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리처드 용재 오닐이 그의 어머니를 이야기할 때, 나는 내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가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를 연주할 때 난 이미 눈물샘이 한차례 터졌다. 7년 전 봄, 아버지가 암 투병 중일 때 나 역시 ‘아버지가 편찮으신데 딸로서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병상 옆에서 아버지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드리곤 했다.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두고 나눈 이야기가 생전의 아버지와 마지막 나눈 대화였다.
장례식을 마치고 두어 달 후, 리처드 용재 오닐의 공연을 별 생각 없이 찾았다가, 그가 앙코르로 연주한 ‘아베 마리아’에 소리없이 오열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를 떠나 보냈다는 사실을 애써 잊고 일상을 영위해왔지만, ‘아베 마리아’가 아버지의 기억을 다시 불러왔던 것이다. 그리고 7년만에, 다시 리처드 용재 오닐이 연주하는 ‘아베 마리아’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아버지를 마주하게 되었다.
병원에서 듣는 ‘아베 마리아’는 더 울림이 컸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슬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베 마리아’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내가 다시 만나는 통로 같은 것이었다.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추억 속 그리운 사람을 순식간에 현재로 불러오고, 이게 바로 음악의 힘일 것이다. 리처드 용재 오닐은 이런 시기일수록 음악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마치 육체의 병을 병원에서 치료 받는 것처럼, 예술은 사람들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위로할 수 있다면서.
“제가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관객 앞에서 연주를 하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서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게 얼마나 영광인지, 전세계 모든 음악가들을 대변해서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리처드 용재 오닐은 오랜만에 서는 무대가 감사하다고, 영광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병원 음악회 며칠 후, ‘당신을 위한 기도’라는 타이틀로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할 때도 눈물을 쏟았다. 리처드 용재 오닐은 공연하며 감정이 북받친다고 했지만, 나 역시 그랬다. 몇 달 만에 서는 무대라고 했는데, 나 역시 몇 달 만에 보는 음악회였다. 전세계 모든 음악가들을 대변해서 얘기할 수 있다고 했는데, 나 역시 전세계 관객을 대변해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음악가의 연주를 라이브로 듣는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깨달았다고. 이렇게 다시 음악을 들려줘서 고마웠다고.
*2020년 발코니 매거진 7월호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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