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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국립오페라단 '나부코' 공연을 보기 전에 썼던 SBS취재파일이다. 이 글에서는 공연이 기대된다고 썼는데, 정작 공연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연출가가 한국인의 한을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했는데, 그게 무대 전면에 커다랗게 '한'이라는 글자를 써놓는 거였다니.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나올 때 수많은 '소녀상'을 무대에 등장하는 걸 보고는 정말 놀랐다. 작품을 모방했다는 얘기를 들을까봐 그랬는지 앉아있는 소녀가 아니라 서있는 소녀였지만 그 '소녀상'을 염두에 뒀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왜 갑자기 여기서 소녀상이 튀어나오는 거지? 광복절 즈음에 열린 공연이라 굳이 그런 연출을 했을까. 외국인 연출가가 뭔가 한국적인 것을 쓰고 싶어한 것 같은데, 공감이 되기는커녕 약간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오페라 '나부코'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얘기는 블로그에 남겨두고 싶어서 좀 늦었지만 올려본다. 코로나 초기 에 많은 예술단체들이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연주한 건 이유가 있다. 절망 속에 부르는 희망의 노래니까.
국립오페라단이 '오페라의 거인'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Nabucco)'를 16년 만에 무대에 올린다. '나부코'는 베르디에게 큰 명성을 가져다준 출세작이다. '나부코'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바빌론 왕국 '느부갓네살 왕'을 이탈리아식으로 읽은 것이다. 기원전 6세기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나부코)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히브리인들을 바빌론에 끌고 간 '바빌론 유수' 사건이 역사적 배경이다.
'나부코'를 작곡할 당시 베르디는 사랑하는 아내와 두 자녀를 모두 병으로 먼저 떠나보내고, 두 번째 오페라의 대실패까지 겹쳐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작곡을 그만두려고까지 했다. '나부코'의 대본은 라스칼라극장에서 다른 작곡가에게 의뢰했다가 거절당하고 베르디에게 간 것이었다. 베르디는 라스칼라극장과 체결했던 계약이 아직 남아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대본을 받아들었다. 별 의욕이 없었던 베르디는 그러나 대본을 넘겨보다가 마음을 뜨겁게 흔드는 대목을 만나게 된다.
"날아가라 생각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Va, Pensiero, sull'ali dorate)
고국의 산과 언덕에서 편히 쉬어라. 그 곳에는 달콤한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안동림 저 '이 한장의 명반 오페라' 중에서)
바로 바빌론에 끌려와서 노예가 된 히브리 사람들이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노래하는 대목이었다. 고국을 떠나 바빌론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히브리인들의 상황에, 당시 외세의 지배와 핍박에 시달리던 이탈리아의 상황이 겹쳐졌다(이탈리아는 오랫동안 작은 도시국가로 쪼개져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았고, 1861년에야 통일되었다). 또 가족을 잃고 작곡가로서 실패한 개인적인 아픔도, 히브리 노예들의 안타까운 처지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게 했다.
베르디가 이 대목에 곡을 붙인 노래가 바로 그 유명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다. 베르디는 이 합창곡을 중심으로 곡을 쓰기 시작해 '나부코'를 완성하고, 1942년 밀라노 라스칼라극장에서 초연한다. 대성공이었다. 특히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이탈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고, 베르디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이 노래는 이탈리아 제2의 국가로 불릴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는데,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나부코'를 공연하면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마지막 앙코르로 다시 연주하고, 청중도 같이 부르는 경우가 많다 한다.
덧붙이자면, 1970년대 말 전 세계를 풍미했던 팝송 '바빌론 강가에서(By the Rivers of Babylon)' 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의 팝 버전에 해당하는 곡이다. 원곡은 1972년 자메이카 그룹 '더 멜로디언즈'가 발표했고, 1978년 독일의 그룹 '보니 엠'이 리메이크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우리는 바빌론 강가에 앉아있었네. 시온을 떠올리며 눈물 흘렸네(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ah, we wept, when we remembered Zion)'로 시작해, 바빌론에 끌려온 유대인들이 강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다.
어린 시절 들을 때는 그저 신나는 노래인 줄만 알았는데, 가사를 알고 보니 이런 사연이 있었다. 장중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과는 달리 경쾌한 디스코곡이지만, '소울'이 느껴진다.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고 롯데 자이언츠 강민호 선수 응원가로도 쓰였는데, 보니 엠의 1979년도 공연을 담은 영상 조회수는 1억 뷰를 훌쩍 넘었다.
국립오페라단은 '나부코'를 2005년에 공연한 적이 있다. 당시 연출가 다니엘 브누앙은 '나부코'의 시대 배경을 기원전 6세기 바빌론에서 2차대전 당시 유대인 강제수용소로 옮겨왔다. 공연은 독일군의 감시 아래 유대인 포로들이 오페라 '나부코'를 공연하는 '극중극'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 철조망이 놓였고, 관객은 철조망 너머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부르는 유대인 포로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당시 이 '나부코'를 인상 깊게 관람했던 기억이 있는데, '국립오페라단'이 무려 16년 만에 이 작품을 다시 공연한다니 관심이 간다. 특히 새로 리모델링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광복절 즈음에 공연되는 것도 의미를 더한다.
코로나 상황 속에 진행되는 공연이라 모든 것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모두 마스크를 쓴 채로 연습하고, 공연 전에는 출연진 모두 코로나 테스트를 받아 음성인 걸 확인하고 무대에 오를 예정이라 한다. 8월 14일 오후 3시 공연은 국립오페라단의 온라인 공연 플랫폼인 크노마이오페라 LIVE. ( https://c11.kr/qbji)를 통해 온라인 유료 중계도 진행한다.
이번에 연출을 맡은 스테파노 포다는 이미 국립오페라단과 '안드레아 셰니에', '보리스 고두노프'로 두 차례 협업한 적이 있다. 그는 연출과 무대, 조명, 의상 디자인을 다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한국 특유의 '한'의 정서가 '나부코'에 담긴 베르디와 그 민족의 정서와 통한다고 봤다. 그래서 억압에 시달리고 고통받으면서도 우애와 결속을 지켜내는 사람들의 치유와 그 원천이 되는 '한'을 작품 속에 그려내고 싶다고 했다.
또 '나부코'는 성경의 이야기가 바탕이지만, 절대 종교적인 오페라가 아니라고 했다. 특정 종교나 특정 시대에 한정되지 않은 인간 본연의 이야기, 보편적 가치와 정신적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했다. 그는 '나부코'를 단순히 한 집단과 다른 집단의 대립으로 풀지 않고, 집단 속 개개인의 갈등과 욕망, 좌절, 그리고 이를 통한 성장을 보여주는 데 중심을 두겠다고 했다. 국립오페라단은 그가 특히 웅장한 군중 신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해왔다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며칠 전 '나부코' 연습을 참관할 기회가 있었는데, 장면 장면을 굉장히 세세하게 다듬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역 가수와 코러스와 무용수 각자 모두 다른 연기를 보여주면서도, 거대한 장면 속에 조화롭게 융화되는 군중 신을 연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나부코' 지휘는 광주시립교향악단 홍석원 예술감독이 맡고, 나부코 역은 바리톤 고성현과 정승기, 나부코의 딸 아비가일레 역은 소프라노 문수진과 박현주, 나부코의 또 다른 딸 페네나 역은 메조 소프라노 양송미와 최승현이 번갈아 출연한다. 주역 가수들의 유명한 아리아들에도 관심이 가지만, '나부코'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어떻게 연출될지 기대가 된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코로나 대유행 이후 더 많이 불리는 노래가 되었다. 메트로폴리탄오페라는 지난해 5월, 야닉 네제 세갱의 지휘 영상, 오케스트라와 코러스 단원들이 각자의 집에서 찍은 영상을 합쳐 '앳 홈 갈라' 영상을 공개했다. 수많은 화면이 합쳐진 이 영상에선 코로나 초기, 모두가 답답하고 불안한 상황에서도 음악을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의지가 느껴진다. https://www.youtube.com/watch?v=l7D9BZ-sAVs
로열오페라하우스는 지난 4월, 코로나 이후 문을 닫고 있던 극장의 재개관을 준비하면서, 평소 보기 힘든 극장의 곳곳에서 촬영한 공연 영상을 온라인에 공개했는데, 여기서도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하이라이트였다. 런던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로열오페라하우스 옥상. 바람에 머리카락 나부끼며 노래하는 코러스의 모습에서는 비장함과 함께 희망도 느껴져 가슴이 뭉클했다. 이 밖에도 여러 공연단체들이 이 노래를 불러 온라인에 공개했다. ▶'Va, Pensiero' from Nabucco, performed high above London (Verdi; Royal Opera Chorus)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고난과 절망 속에 부르는 희망의 노래다. 고난의 밤이 깊을수록 희망의 새벽도 가까운 법. 노래에는 힘이 있다. 절망에 빠졌던 베르디가 다시 작곡에 매진하게 한 노래. 외세 핍박 아래 이탈리아 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연결하고, 코로나 시대 예술가들의 마음을 담아왔던 노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다시 들으며, 더위에 지치고 코로나에 지친 마음을 달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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