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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동안 블로그를 방치해 놓고 있었다. 에든버러 페스티벌과 서울시향 유럽 투어를 취재하기 위한 출장을 다녀왔고, 독일 루르 페스티벌을 비롯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방문자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 다시 유럽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독일 방문에서 보고 느낀 게 많아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금씩 풀어내 보려 한다. 

에센 시 외곽에 있는 졸페라인 전경

내가 참가한 방문자 프로그램은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 지역 문화 홍보와 대외협력 등의 일을 하는 기관인 'NRW 컬쳐 인터내셔널'이 주관하는 것이었다. 독일 서부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RW) 주는 독일의 주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고, 뒤셀도르프, 쾰른 같은 대도시가 여럿 위치했으며, 교과서에도 나온 '루르 공업지대'를 끼고 있는 지역이다.

NRW는 한 때 석탄채굴. 제철 공업 등이 발달한 독일의 산업혁명 중심지였고, '라인의 기적'에 큰 역할을 한 독일 경제의 심장이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과거의 영광은 빛이 바래고 서서히 쇠퇴기를 맞았다. 더 이상 경제성이 없는 탄광과 공장은 폐쇄되고 실업과 환경문제가 숙제로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NRW는 '문화'를 돌파구로 택했다. 


공업의 중심지에서 문화의 중심지로! NRW의 변신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대표 사례는 바로 졸페라인(Zollverein)이다. 에센 외곽에 위치한 졸페라인은 원래 독일관세동맹의 이름을 딴 탄광이 있던 곳이다. 이 탄광은 전성기에 연간 백만톤의 석탄을 생산하던 세계 최대의 탄광이었다. 그러나 경제성이 없어지면서 1986년 문을 닫았고 거대한 채굴장치와 레일, 석탄 생산공장은 고철더미나 다름없게 돼 버렸다. 

소유주는 졸페라인을 허물고 이 지역을 새로 개발하기 원했지만, NRW 주정부는 졸페라인을 넘겨받아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붉은 벽돌 건물에 높이 솟은 탑과 철제 구조물들이 인상적인 외관은 물론이고, 내부 구조와 장치도 원형을 보존한 채로 개조해 박물관으로, 극장으로, 공원으로, 커뮤니티 센터로 만들어냈다. 졸페라인의 마스터플랜은 네덜란드의 유명 건축가 렘 쿨하스가 맡았다. 




나는 졸페라인에서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루르 박물관, 세계적인 디자인상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로 유명한 레드닷 디자인 미술관, 연극과 무용 등을 상연하는 팩트 극장 등을 방문했다. 채굴한 석탄을 세척하던 방은 루르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영화를 상영하는 360도 상영실, 전시실로 바뀌었고, 광부들의 샤워실 건물이 극장이 됐다. 디자인 미술관은 내부의 녹슨 철구조물을 그대로 놓아둔 채 곳곳에 첨단 디자인을 보여주는 제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너무나도 절묘하게 어울려 감탄을 자아냈다.

주정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졸페라인은 천 개 이상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냈고, 지난해 방문객이 200만명에 이르렀다. 2001년 졸페라인은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근대 공업건축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게 선정 이유였다. 졸페라인은 지난해 루르 지역이 유럽 문화수도로 선정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내년에는 유명 예술대학인 포크방 대학이 졸페라인으로 이사한다고 한다. 석탄가루 날리던 거대한 폐광이 이 지역 창조산업과 예술의 중심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한국이었다면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낡은 건물은 일단 허물어 번쩍번쩍한 새 건물을 짓는 게 능사인 줄 아는 나라에서. 재건축, 재개발에 매달려온 나라에서. 과거의 기억은 지워버리기 좋아하는 나라에서. 탄광지대였던 강원도에 카지노는 있지만, 이 카지노는 과연 지역 주민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과거의 기억과 문화가 창조적으로 결합한 졸페라인은 그래서 내 눈에는 참 신기하고 부러운 곳이었다. 

*이 글은 SBS 뉴스 인터넷 취재파일로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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