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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저녁 해인사 경내 풍경

1,200년 역사의 고찰, 경남 합천 해인사를 다녀왔다. 아주 오래 전 수학여행 때 주마간산 식으로 잠깐 들러 구경한 이후로 처음이다. 해인사에서는 고려대장경 1000년을 맞아 각종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나는 이 중에 해인사 선원 개방을 취재하기 위해 지난 주말 출장을 다녀온 것이다. 처음엔 예기치 않았던 주말 출장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가족들과 함께 하기로 했던 주말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아이들의 원망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해인사에 도착하고 보니 좋긴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인사 선원은 지난 24일 토요일 단 하루 일반인에게 문을 열었다. 대부분의 언론이 ‘1,200년만에 개방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는 해인사 창건이 신라 애장왕 때인 802, 그러니까 1,200여 년 전이고, 그 동안 선원이 일반인에게 열린 적이 없다는 점 때문에 나온 얘기다. 이번 선원 개방은 대장경 1,000년을 기념한 대장경문화축전 가운데 하루, ‘해인아트데이의 체험 행사로 성사됐다.

님들의 수행 공간인 선원은 절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상징적인 장소로 속세와 격리돼 왔다. 해인사 선원은 본당 위쪽에 위치해 경내에서도 다른 공간과는 약간 격리된 느낌이다. 선원 방향으로 올라가는 계단 초입에서부터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이니 일반인의 출입을 삼가 달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이 선원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한다는 것은, 일부 스님들은 끝까지 반대할 정도로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해인사 선원 입구. 선원 건물을 제대로 찍지 못해서 아쉽다.


해인사는 용성효봉고암자운성철일타청담혜암 스님 등 건출한 선승들이 수행했고현 조계종 종정인 법전 스님이 방장으로 있는 절이다그러니 해인사 선원이 한국 불교의 심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해인사 선원의 현판에는 심사굴(深蛇屈)’이라고 적혀 있다깊은 뱀굴이라는 뜻이다깊은 땅굴 속의 뱀이 깨달음을 얻어 용으로 승천하길 바라는 소망이 담긴 이름이다

사실 해인사 선원 건물 자체는 2002년에 지은 것이라 역사적인 의미는 없다선원 내부를 봐도 그냥 정갈한 한옥의 방 한 칸이다하지만 이 방 한 칸이 스님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스님들은 우기를 피해 정사에 머무르며 수행했던 부처님의 전통을 이어받아 여름과 겨울에 각 석달씩 안거에 들어간다선원은 이 동안거하안거가 이뤄지는 곳이다.  

보통 안거에는 하루 10시간 이상 정진하는데이 중에서도 1주일간 실시하는 용맹정진이 수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용맹정진이는 주야로 한숨도 자지 않고눕지도 않고좌선하는 것을 말한다안거에는 면벽 좌선하지만용맹정진 기간에는 마주 보며 정진한다공양시간과 청소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앉아서 참선해야 한다누울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벽에 기대어 앉아도지정된 공간을 벗어나도 안 된다.규칙에는 어떠한 예외도 적용되지 않는다용맹정진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퇴방으로 해인사 산중을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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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간 잠 한 숨 자지 않고 앉아서 수행한다니용맹정진은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수행이다.참을 수 없이 몰려오는 졸음은 물론이고온갖 망상이 수행자를 괴롭힌다절대 고요와 적막 속에 용맹정진을 하다 보면 핀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 소리처럼 들리고조는 사람을 깨우는 죽비 소리에 옆 사람이 놀라 기절을 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용맹정진의 전통은 한국 사찰 중에서도 해인사가 가장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오랜 전통과 규율 없이는 계속 해나가기 어려워다른 곳에서는 용맹정진의 전통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다해인사 승가대학 학생들도 희망자에 한해 용맹정진에 참가한다고 한다해인사가 한국 불교 최고의 수행 도량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다 싶었다

이 날 선원 개방에는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한 시간마다 40명씩모두 440명이 참여했다참가자들은 저마다 나름의 화두를 붙잡고 면벽수행으로 정진했다참선을 지도하는 스님은 때로 매서운 죽비 소리로 흩어지려는 마음을 다잡게 했다참가자들은 참선은 물론 다른 곳에서도 할 수 있지만내로라 하는 선승들이 수행했던 바로 그 공간을 짧은 시간이나마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감개무량하다고 했다.

24일 새벽, 해인사 범종루의 타고 의식

취재기를 쓰다 보니법고 경연대회 얘기를 안 할 수가 없겠다. 23일 저녁 내가 해인사에 도착했을 무렵마침 해인사 범종루에서는 저녁 예불의식으로 스님들이 법고를 치고 있었다법고와 범종목어와 운판을 차례로 치는 불교의 사물 의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는데굉장히 인상적이었다이 날 법고를 친 스님들은 24일 오후에 열린 법고 경연대회 출전 선수들이었다.

해인사 범종. 새벽이라 좀 어둡긴 하지만.....


목어와 운판. 법고부터 시작해 범종과 목어, 운판까지 모두 쳐야 불교의 사물 의식이 끝난다

(법고와 범종목어와 운판은 사중사물(寺中四物)로 불린다범종은 지옥 중생들을법고는 축생을 제도한다목어는 밤낮으로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처럼 수행자가 항상 깨어 정진하라는 의미와 함께 물 속 중생들의 제도를 기원하는 것이며운판은 날짐승들의 제도를 기원하는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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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열린 법고 경연대회에는 해인사와 법주사 등 전국 주요사찰의 스님들이 출전해 타고 솜씨를 겨뤘다.알고 보니 승가대 학생들은 빠짐없이 타고를 배우고 연습해서매일 새벽 돌아가면서 법고를 친다고 한다.합판이나 시멘트 바닥을 두드리며 연습하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웃음이 나왔다절마다 타고법은 조금씩 다른데대회에 출전할 정도면 웬만한 록 밴드 드러머 부럽지 않을 정도로 다이나믹한 타고 솜씨를 자랑했다

나는 23일 오후에 해인사로 내려가 24일 새벽 세 시새벽예불부터 일반인들의 선원 체험그리고 법고 경연대회까지 취재하고 귀경했다아직 깜깜한 새벽해인사 앞마당 탑 위에 걸려 있던 눈썹 같은 달밤하늘을 수놓은 별세상을 깨우던 법고와 범종 소리깨달음을 구하는 스님들의 독경 소리, 1,200년만에 문을 연 선원을 휘감았던 침묵…… 오랫동안 차를 타야 했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한 출장이긴 했지만나는 얼떨결에 하게 된 이 템플 스테이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이 글은 SBS 뉴스 인터넷 사이트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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