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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 바렌보임이 이끄는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회를 열고 있다. 이미 사흘간 일정이 끝났고 일요일 2.9번을 연주하면 사이클을 완성하게 된다. 그리고 광복절인 월요일, 임진각 평화누리 콘서트에서 교향곡 9번 '합창'을 다시한번 연주한다. 한국인 성악가 조수미 이아경 박지민 함석헌 씨와 국내 연합 합창단이 함께 한다. 

나는 이들이 교향곡 6번(전원), 7번을 연주했던 금요일 공연을 봤다. 바렌보임의 지휘에 집중하며 연주하는 단원들의 표정에는 열정과 진지함이 가득했고, 연주 도중에도 단원들은 서로 눈웃음과 다정한 시선을 교환했다. 이들이 함께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연주 자체를 정말 즐기고 있다는 것을, 객석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자잘한 실수나 매끄럽지 않게 들리는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바렌보임의 노련한 지휘를 따라가는 이들의 연주는 충분히 감동적이고 훌륭했다.    


이 오케스트라가 서로 앙숙 관계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다른 아랍국가의 젊은 연주자들로 구성됐다는 걸 떠올리면 감동은 더욱 배가될 수 밖에 없다. 음악의 힘이 현실정치를 뛰어넘은 것이다. 이 오케스트라는 1999년 유대계이며 이스라엘 국적인 지휘자 바렌보임과 팔레스타인 출신 석학 고 에드워드 사이드가 함께 창단했다. 서로 만나고, 대화하고, 이해하는 것이 '시작'이라는 믿음이 이 오케스트라를 탄생시켰다.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매년 여름 스페인 세비야에 모여 몇주간 음악학교에 참가하고 연주 활동을 벌인다. 그동안 이들은 세계 곳곳에서 연주하며 평화와 화해의 선율을 전해왔다. 특히 여러 차례 무산된 끝에 2005년 분쟁의 한복판인 팔레스타인의 행정수도 라말라에서 팔레스타인 청중을 대상으로 열었던 콘서트는 전세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이 콘서트가 성사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Knowledge is the Beginning'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감동받아 2006년 8시뉴스에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를 소개하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이번 내한공연을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는 바렌보임 뿐 아니라 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부인 마리암 사이드, 그리고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함께 참석했다. 이 오케스트라는 아랍인 악장과 이스라엘인 악장, 이렇게 두 명의 악장을 둔다. 기자회견에는 바렌보임의 아들이며 이스라엘 악장인 마이클 바렌보임과 이스라엘 연주자 기 에시드(플루트), 팔레스타인 단원 타임 클리피(바이올린)가 나란히 참석했다.

단원들은 격동하는 중동 정세의 파고 속에서도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는 일종의 '유토피아' 같은 곳이 됐다고 말했다(기 에시드). 이들이 말한 모토는 "We agree on disagreeing(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였다. 또 "우리가 전하려는 기본적인 메시지는 '대화'"라고도 했다(타임 클리피). 이들은 물론 함께 활동하면서 긴장되는 순간도,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라말라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치른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분쟁은 끊이지 않았고 레바논 전쟁도 일어났다. 2006년 레바논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들은 리허설 중이었다고 한다. 이 전쟁으로 레바논과 시리아 국적의 단원들 여러 명이 오케스트라 활동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연주 활동은 지속됐다. 단원들은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었지만, 생각과 감정과 이야기를 터놓고 함께 나누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됐다며 그동안 쌓인 유대감을 과시했다.  

(사실은 나도 2006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 소식을 듣고 이 오케스트라가 어떤 영향을 받지 않을까 걱정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2005년 8뉴스에 이 오케스트라를 소개하면서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나시브'라는 이름의 레바논 첼로 연주자 인터뷰를 인용해 썼었다. 투박하면서도 선량해 보였던 나시브가 레바논 전쟁 속에 무사한지, 계속 연주 활동은 하고 있는지, 마치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이번 예술의전당 공연에서 그가 아직도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고 있는 걸 확인했다. 나시브 외에도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연주자들을 직접 보게 되니 반가웠다. ) 

바렌보임과 단원들은 공통적으로 임진각 평화 콘서트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했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이라는 이 나라, 남북 접경 지역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야외음악회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가질 터이다. 한 외신 기자는 'DMZ 공연은 삼엄한 경비 속에서 치러질 텐데 긴장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했고, 바렌보임은 '전혀 긴장되지 않는다. DMZ 음악회에 끌렸던 것이 내가 여기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다'라고 했다. 그는 또 'DMZ 음악회에 남북의 모든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남북, 동서를 가리지 않고 모든 한국인들을 위해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했다. 

바렌보임은 이 음악회에 남북 청중이 다 참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굉장히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혹시 그가 처음에는 이 음악회에 북한 청중들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는 기자회견이 끝나고 방송 뉴스를 위해 따로 했던 인터뷰에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가 이렇게 말했으니까. 

"DMZ 음악회에 모든 사람들이 다 오지 못해서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나는 이 음악회를 남북의 청중이 함께 볼 수 있다고 이해하고 공연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이것이 이 공연의 메시지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공연은 단지 바깥에 보이려는 제스처에 불과할 것입니다......어떤 분쟁도 서로 대화를 거부해서는 해결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해결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외국인들은 한국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할지라도 남북한 간에 서로 왕래가 가능한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다. 통일 이전 동독과 서독도 다른 체제로 갈라져 있기는 했지만 남북한처럼 민간인의 왕래가 꽉 막혀있지는 않았다. 물론 같은 체제 내에서만큼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겠지만, 서신도 주고받고, 친지 방문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바렌보임도 비무장지대 음악회에 남북 청중이 다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법 하다.

국내 공연주최사가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주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여러 상황상 한동안 '오해'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커 보인다. 공연주최사 역시 기획 단계에서는 실제로 더 원대한 '평화 콘서트' 계획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형식으로든 남북 화해의 상징적 의미를 더 극대화할 수 있는 형태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북 관계 악화라는 현실의 제약에 부딪혔을 것이고, 이에 따라 '평화 콘서트'는 지금의 '임진각 음악회'라는 형태로 열리게 된 것이리라. 

(기사를 쓰기 위해 다시 확인한 것인데, 임진각은 엄밀히 말해 DMZ에 속하지는 않는다. DMZ를 탐방할 때 가장 먼저 거쳐가는 관문 같은 곳이며 DMZ에서 무척 가깝긴 하지만, 행정구역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DMZ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렌보임은 임진각 음악회를 DMZ 음악회라고 불렀고,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할 때 이를 꼭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새삼 우리의 분단이 얼마나 지독하고 철저하게 서로를 '분리'시켜 놓은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남북 관계가 얼마나 냉각돼 있는지도. 한 때 평양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서울 공연에서 남북한 음악가들이 함께 공연하는 모습에 가슴 뭉클했던 시절이 있었건만, 평양에서 열린 조용필 콘서트를 취재하며 가슴 뛰었던 시절이 있었건만, 모두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남북한 청중이 함께 볼 수 있고,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환희의 송가'를 남북한 성악가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날은 언제 오려나. 

바렌보임은 음악 자체가 평화를 가져오지는 않지만, 대화의 물꼬를 트는 힘이 있다고 했다. 바렌보임과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의 음악회가 한국에서 열린다고 해서 당장 무엇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현실의 분쟁과 갈등을 넘어 음악 안에서 하나 된 이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직접 본 사람들이, 혹은 이 오케스트라의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든 접한 사람들이, 이들이 온 몸으로 전하는 화합과 인류애의 메시지를 마음에 담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시작'이 될 것이다. 

*SBS 뉴스 인터넷 취재파일로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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