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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중국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이른바 ‘문화 예능 프로그램 열풍’을 선도했던 CCTV의 프로그램 ‘낭독자(朗读者)’가 시즌 2로 다시 돌아왔다. 매회 다른 주제 아래 ‘낭독자’로 초청된 인사들이 진행자인 유명 방송인 동칭(董卿)과 인터뷰를 한 뒤, 자신이 고른 책의 한 대목을 낭독하는 프로그램이다.
독서와 낭독의 즐거움을 새롭게 알려준 이 프로그램 덕분에 중국 곳곳에 ‘낭독정’이 생겼다. 낭독정은 일반인들이 자신이
고른 책이나 문장을 낭독하게 한 미니 스튜디오다.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낭독정 풍경을 보면, 때로는 수줍게, 때로는 열정적으로 낭독하는 일반인들의 모습이 유명
출연자 못지 않게 인상적이다. 자신을 유학생이라고 소개한 한국인 남성이 아내를 위해 낭독하는 모습이
전파를 타기도 했는데, 그만큼 이 프로그램의 팬이 다양하다는 방증일 것이다.
낭독자 시즌 2는 CCTV 채널1에서 토요일 밤 8시라는
황금시간 대에 편성되었다. 5월 5일 첫 회를 방영한 시즌 2는 현재 중국의 평점 사이트 ‘더우반’에서 10점 만점에 9.3이라는, 이례적으로 높은 평점을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생명’을 주제로 한 5월 19일 방영분은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는데, 이는 이 날의 첫 출연자, 배우 후거(胡歌) 덕분이었다.
동칭은 후거를 소개하면서 따뜻한 일화 하나를 전했다. 지난해 마지막 날, 한 백혈병 환자가 웨이보에 글을 올렸다. ‘랑야방에서 깨달음을 얻어 새로 태어난 매장소를 보면서, 나도 병마를
웃으며 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는 내용이었다. 다음날
이 글에 후거의 댓글이 달렸다. “저의 연극 ‘여몽지몽(如夢之梦) 보러 오시겠어요? 제가
표를 맡겨둘게요.”
동칭은 후거의 이 일화가, 비록
우리의 몸은 곤경에 빠져 있더라도 생명에는 여전히 선의와 희망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고 말했다. 후거는
한국에서도 인기를 끈 드라마 ‘랑야방’의 주인공 ‘매장소’ 역으로 잘 알려진 배우다.
매장소는 누명을 쓰고 몰살당한 가족과 동료의 원수를 갚기 위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인물이다. 희귀한 독에 중독되어 병약해진 몸에 외모까지 바뀐 채로, 자신을
몰라보는 절친한 친구의 책사가 되어 차근차근 복수를 진행한다.
드라마 캐릭터 매장소와 배우 후거는 실제로도 닮은 꼴이다. 2006년 8월 29일, 20대 초반에 ‘사극 우상’으로
불리며 성공가도에 올라탔던 후거에게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치명적인 대형 사고였다. 같은 차에 탔던 매니저는 사망했다. 후거는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얼굴만 백 바늘 이상 꿰매야 하는 중상이었다. 후거의 인터뷰는 12년 전의 이 사고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왕 살아남았으니 헛되이 살 수는 없다.”
동칭이 언급한 매장소의 이 대사는 후거 자신의 독백이기도 했다. 그는 사고 이후 줄곧 ‘살아남았으니 뭔가 해야 한다, 특수한 사명이 있다면 이를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12년 동안 생각날 때마다 자책했다. 아직도 자신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제가 12년
동안 아주 잘 지내왔다고 생각합니다. 일이 아주 잘 되었으니까요. 큰
돈을 벌었고 명성도 높아졌죠. 하지만 저 스스로는 이게 제가 살아남은 의미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말과 말 사이에 자주 긴 쉼표를 찍었다. 복잡다단한 감정이 느껴졌다. 여러 차례의 대수술 끝에 처음 붕대를 풀었을 때, 그는 자신의 얼굴을 차마 거울로 대면할
용기가 없었다고 했다. 퉁퉁 붓고 흉터가 선명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시는 드라마를 안 찍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팬들이 기다렸다. 후거의 사고 때문에 촬영이 중단된 드라마 ‘사조영웅전’을 완성해야만 했다. 촬영장으로
복귀했다.
후거는 촬영하면서 겪었던 고통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연출팀은 후거 얼굴의 흉터가 두드러지지 않게 하느라 특수한 분장과 조명을 준비했다. 매일 광고 찍는 것처럼 공을 들였다. 얼굴에 그림자가 지지 않게
했고 크게 다친 쪽을 피해 얼굴 좌측만 촬영했다. 후거는 자기 때문에 촬영 진도가 늦어진다고 생각해
더욱 괴로웠다.
“감독님이 ‘후거가
촬영을 완료했다’고 정식 발표했을 때, 저는 그냥 도망갔어요. 모든 스탭들이 저를 뒤쫓아왔죠. 해안을 따라 계속 뛰어갔어요. 처음엔 참 즐거운 장면이었을 텐데, 저는 뛰고 또 뛰다가, 울고 말았어요. 억울함, 혼란스러움, 어쩔 도리 없는 막막함, 외로움,
이런 것들이 그 순간 한꺼번에 터져 나왔던 거예요.”
후거는 사고 이후 몇 년 동안 흉터를 의식해 계속 같은 스타일을
고수했다. 앞머리를 기르고, 흉터가 있는 오른쪽 얼굴을 가린
것이다. 한동안 친구들과 대화할 때도 마치 촬영할 때처럼, 왼쪽
얼굴을 친구 쪽으로 향하게 하던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후거는 ‘일종의
병적인 상태’였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제약했고, 심지어 자신을 욕되게 했다며 후회스러워했다.
후거는 12년 전
사고로 죽은 매니저를 추억하며 눈시울을 붉혔고, 매니저의 이름을 딴 학교를 세웠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자신이 연기했던 ‘사조영웅전’의
곽정처럼, 바보스러울 만큼 우직하면서도 의기 넘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까지, 후거의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허심탄회’했다. 카메라 렌즈에 포착된 청중들은 후거의 명성에 가려졌던 아픔과
고통, 후회에 깊이 공감하는 모습이었다.
드디어 낭독 순서가 되었다. 후거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중에 그 유명한 독백을 골랐다.‘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중국어로는 生存还是毁灭, 这是一个值得思考的问题)’로 시작되는 대목이다. 후거는 이 첫 문장이 이미 자신의 의도를 드러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짙은 안개 속에 자신을 갈고 닦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낭독을 바친다고 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잔인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묵묵히 참고 견딜 것인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인 줄 알면서 밀려오는 고해의 파도에 맞서
결연히 싸우다 쓰러질 것인가.
어느 쪽이 더 고귀한가……”
4분 가까이 이어진 후거의 낭독은 햄릿의 독백을 무대에서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연기로 단련된 묵직한 목소리가 마음을 파고들었다. 햄릿의 독백은 끝없는 고뇌 속에 나아가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주는 것 같다. 자신이 살아남은 의미를 찾고 있다는 후거. 그 의미를 찾는 지난한 과정 자체가 생명의 의미인 건 아닐까.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했던 경험과 살아남은 후의 고통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후였기에, 후거의 낭독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중국의 언론들은 낭독자의 성공 비결 중 하나로 ‘프라이버시와 개방성의 조화’를 꼽은 바 있다. 먼저 진행되는 인터뷰가 사실상 이 프로그램의 핵심이다. 동칭과 출연자 두 사람이 오붓한 분위기에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 이어서 문이 열리고 출연자가 무대 전면으로 나서 청중을 향해 낭독한다.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고, 그 의미를 담아 책을 고르고, 혼신을 다해 자신의 목소리로 전달하는 것이다. 후거는 이런 포맷에 극적으로 어울리는 출연자였다.
낭독자 후거 편을 보고 나서 ‘햄릿’을 제대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후거의 매력 때문이었을까. 아니, 내가 몰랐던 후거의 매력을 드러내고 독서 욕구를 자극한 이 프로그램의 힘도 컸던 것 같다.
*네이버 중국 '엔터 트렌드' 코너에 기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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