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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끝날지 모르는 블로그 이사작업. 하지만 전에 쓴 글을 '재활용'하는 재미도 있다. 지난해 '문화의 경제적 가치' 논의에 대한 생각을 써서 씨엘로스 웹진에 기고했던 글을 다시 올린다. '문화가 밥 먹여주나?'에서 '문화가 밥 먹여준다'로 시류가 바뀌는 것 같지만, '돈 되는 문화산업', '문화의 경제적 가치'만 강조하는 것은 우려스럽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주라기공원’이 한 해 동안 거둔 수익이 한국의 자동차 150만 대 수출액과 맞먹는다는 얘기,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1994년 이런 내용의 보고서가 국내에서 나왔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이를 공식석상에서 언급했다. 국내에서 ‘문화산업’의 중요성을 본격적으로 논하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였다. 

그 이후였던 것 같다. 흥행이 잘 되는 영화만 나오면 이렇게 경제적 분석을 내놓아 ‘문화’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기 시작한 것이. 사실은 나도 2006년에 이런 류의 기사를 쓴 적이 있다. 한 연구기관에서 영화 ‘왕의 남자’의 경제적 효과를 분석한 자료를 냈을 때였다.

자료에 따르면 2006년 3월 5일 현재 관객 1,175만 명을 동원하고 흥행 수입 822억 5천만 원을 벌어들인 이 영화는 8,217명의 취업 유발 효과를 냈으며, 이는 당시 인기 휴대폰 기종을 126만 대 팔았을 때와 맞먹는다고 했다. 이 자료는 많은 매체에서 인용했고, 마침 휴일 근무 중이었던 나에게도 이 기사를 쓰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자료를 작성한 연구원과 접촉해 취재해 봤더니, 이 수치가 나온 과정은 이러했다. 한국 은행은 각 산업별로 매출액에 따른 취업유발 계수를 산출해 공표한다. 이는 통계적으로 조사해 나온 수치인데, 이에 따르면 영화산업의 취업 유발계수는 30 정도라고 했다. 영화 산업은 10억 원의 매출이 일어날 때 약 30명 정도가 취업돼 있더라, 하는 뜻이다. 이 취업유발계수와 매출액을 알면 해당 상품의 취업유발효과를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왕의 남자’로 일어난 매출은 영화 상영으로 인한 것, 그리고 관련 음식료 서비스의 매출(‘왕의 남자’를 보러 온 사람들이 음식료에 지출한 돈)으로 구성된다. 이 매출액을 10억 원 매출시 취업 유발효과를 표시하는 산업별 취업유발계수와 대비해 산출한 숫자가 8,217명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설명하면 ‘왕의 남자’로 발생한 매출액은 한국의 산업 구조상 영화산업과 관련산업에서 8,217명이 취업돼야 나올 수 있는 것이더라, 하는 뜻이다.

이런 과정을 알고 나서 나는 좀 허탈했다. 그냥 ‘숫자 놀음’이었다. 실제로 세어봤더니 ‘왕의 남자’ 때문에 8,217명이 새로 취업했더라, 하는 얘기는 전혀 아니었다. 인기 휴대폰을 126만 대 팔았을 때와 맞먹는 효과라는 것도, 이 휴대폰이 속한 산업 분야의 취업유발계수를 알면 계산해서 나올 수 있는 수치였다.

이렇게 나온 숫자라면 굳이 8시 뉴스에 리포트까지 해가며 크게 부각시킬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별 사건사고도 없는 주말이라 기사가 부족했고, 당시 한국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갱신 중이었던 ‘왕의 남자’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게 높았다는 점 때문에, 기사를 쓰기는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 기사에 배정된 시간은 고작 1분 10초. 이 수치가 나오게 된 과정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자료를 낸 연구원은 뉴스에서 이 계산 과정을 다 얘기할 필요는 없고 이런 ‘효과’가 있는 것으로 분석됐더라, 또 이 효과는 다른 산업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 되더라, 이걸 보여주면 될 것 같다고 했다. 결국 내 기사는 ‘영화 산업이 첨단산업이라는 무선통신기기에 비해 취업유발효과가 세 배 가까이 된다’는 연구원의 인터뷰까지 넣어, 전파를 탔다.

객관적으로 건조하게 기사를 쓰려고 노력했지만, 기사가 나가고 나서도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았다. 그런 참인데, 내 블로그 방명록에 한 네티즌이 이런 글을 올렸다. ‘왕의 남자’ 덕분에 8천 명의 일자리가 창출된 것으로 알고 기사를 열심히 봤는데, 어떻게 해서 이런 수치가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기사에서 ‘일자리가 창출됐다’는 표현을 전혀 쓰지 않고 “취업유발 ’효과’를 낸 것으로 분석됐다”라고만 했지만, 그래도 시청자들은 이렇게 받아들였던 것이었다. 바로 내가 걱정하던 바였다. 나는 답글을 통해 이 수치가 나온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이런 내용까지 다 담기에는 기사가 짧았다고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문화산업에 히트 상품이 나올 때마다 이런 ‘숫자’들이 문화의 경제적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함께 등장했다. 일자리 문제가 심각한 요즘은, 문화산업이 다른 산업 분야에 비해 매출액 대비 취업유발효과가 높기 때문에 특별히 육성해야 한다는 얘기도 자주 나온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 ‘노동집약적’ 산업을 육성해야 하며, 문화산업이 바로 대표적인 노동집약적 산업이라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문화산업의 전반적인 ‘저임금’ 현상이라는 씁쓸한 현실도 반영돼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문화의 경제적 가치’를 구체적인 숫자로 보여주면, 문화산업의 중요성을 많은 사람들이 실감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문화의 가치를 숫자로 환산하려는 추세가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 불편하다. 일단 무형의 문화를 유형의 숫자로 환산하는 방식에 그리 신뢰가 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문화의 경제적 가치를 강조하는 논리들이 범람하는 사이, 돈을 벌지 못하는 문화는 가치가 없다는 식의 사고가 자리잡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문화의 경제적 가치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경제적 가치는 문화의 여러 가치 가운데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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