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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진행됐던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의 거리 악사 실험이 요즘 다시 화제가 되고 있는 듯하다. 이 실험은 워싱턴 포스트가 '기획'해서 진행했던 것이었는데, 2007년 당시 워싱턴 포스트 기사를 읽고 나서 썼던 글, 옛 블로그에서 옮겨와 올려본다. 이 실험 자체는 재미있고 신선한 아이디어였는데, 기사를 읽으면서는 손발이 오글거렸던 게 생각난다. 독자를 가르치려 든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랬을까. 음악의 본질이나 가치를 이야기하려는 듯한데, 정작 기사에서는 조슈아 벨의 악기가 얼마라는 둥 그의 연주를 들으려면 얼마를 내야 한다는 둥 이런 걸 내세우는 게 뭔가 어색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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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 공연기획사 관계자와 얘기를 나누다가 '조슈아 벨의 워싱턴 굴욕' 얘기가 나왔다.

이는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의 협조를 받아 워싱턴 포스트가 행한 '실험' 얘기다.

조슈아 벨은 2007년 1월 12일 오전 7시 51분. 복잡한 출근 시간대에

워싱턴 랑팡 플라자 역에서 45분 동안 연주하며 '지하철 역의 악사'가 됐다.

조슈아 벨이 청바지와 긴소매 티셔츠, 야구 모자 차림으로 벌인 이 공연은 

워싱턴 포스트가 '기획'한 것이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당시 몰래카메라로 시민들의 반응을 촬영했는데,

벨이 6곡을 연주한 45분 동안 이 곳을 지나간 사람은 천 97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잠시 멈춰서서 연주를 들은 사람은 7명에 불과했단다.

이 날 거리 연주로 벨이 번 돈은 고작 32달러였고.


워싱턴 포스트는 이 길거리 공연 사연을 2007년 4월 8일 일요판 커버 스토리로 다뤘고,

이 기사는 국내에도 '조슈아 벨의 워싱턴 굴욕'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소개됐다.

당시 나는 아주 짧게 축약 번역된 기사를 접하고, 워싱턴 포스트의 기사 원문을 찾아 읽었다. 

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07/04/04/AR2007040401721.html


 워싱턴 포스트의 기사는 '무지무지무지무지' 길었다.

아마도 신문이라면 전면 기사 정도가 아니라, 여러 면을 털어야 그 정도 분량이 될 것이다.

(내 컴퓨터 모니터 화면으로는, 페이지 다운 버튼을 23번 눌러야 한다.)

기자는 조슈아 벨의 '실험' 결과를 전하면서

'세계 최고의 음악가가 연주하는 최고의 선율에 관심을 기울일 '귀'도 없고, '여유'도 없는

현대인들의 무지에 대해 아쉬움과 한탄을 표시한다.


 이런 실험을 기획한 워싱턴 포스트의 '아이디어'는 참 재미있고,

이 기사가 얘기하고자 하는 주제 또한 공감 가는 얘기이긴 하다.

그러나 이 실험은 처음부터 의도된 주제를 갖고 이를 위해 세팅된 것이 아니었을까 의심도 들었다.


실험에서는 일부러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대중적인 멜로디를 연주하지 않는 대신,

천상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장엄한 곡들을 골랐다고 한다.

안 그래도 클래식 음악은 팝음악에 비하자면 팬이 적은 편인데, 

그 중에서도 '덜 대중적인' 곡들을 고른 셈이다.


 바쁜 출근시간대 지하철 역에서라면

조슈아 벨 아니라 파가니니, 

아니, 그 어느 위대한 예술가가 왔더라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비록 조슈아 벨의 음악을 평소에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바쁜 출근 시간대에 지나치면서 알아채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음악회장에는 '음악을 들으러' 가지만, 지하철역에는 '음악을 들으러' 가지 않으니까.


 이 기사의 상당 부분은 조슈아 벨과 그가 연주하는 음악에 대한, '찬사'들로 채워진다.

조슈아 벨이 얼마나 뛰어난 음악가이며,

그의 외모는 얼마나 수려한지,

그의 공연에 얼마나 많은 팬들이 몰리는지,

그의 평소 공연 입장료는 얼마나 비싼지,

그리고 그의 바이올린은 얼마나 대단한 악기인지,

그가 지하철 공연에서 연주한 곡들이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 곡들인지.......


 기자는 조슈아 벨을 칭찬하는 데 온갖 구구절절한 사연들과 미사여구를 다 동원한다.

물론 조슈아 벨이 대단한 명성을 누리는 바이올리니스트이긴 하지만,

이렇게 길고 장황한 찬사를 읽고 있자니 온 몸이 간지러워지는 느낌이었다.


 이는 조슈아 벨이 비록 바쁜 출근시간대에도

충분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가치가 있는 '굉장한' 연주자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주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채지 못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그만큼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터이다.

많은 사람들이 콘서트홀에 비싼 돈 내고 음악을 감상하러 가지만, 

음악 자체가 아니라 연주자의 명성과 멋진 공연장 같은 화려한 '세팅'을 즐기고, 

이를 남들에게 과시하려 하는 게 아닐까, 뭐 이런 뜻도 품고 있을 터이다. 


 조슈아 벨의 음악을 귀담아 들었던 몇몇을 '영웅'으로 추켜세우며

출근길에 음악을 알아들을 귀도, 여유도 없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을 은근히 '질타'하는 듯한

이 기자의 글솜씨는 무척 현란하고 매끄러운데, 

때로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린이들은 예외 없이 연주에 관심을 보였지만 

어른들은 이들을 채근해 길을 재촉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럴 줄 알았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내가 너무 시니컬한 걸까.

(어쩌면 나는 영문으로 이 긴 기사를 읽는 데 살짝 짜증이 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실험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히 재미있는 아이디어로 받아들여졌던지,

이를 본딴 실험들이 다른 나라에서도 이뤄졌고, 이 중에는 한국도 끼어있었다.

그리고 이 실험의 결과는 대개 비슷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나와 얘기를 나눈 공연 기획사 관계자는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달에 조슈아 벨의 내한공연을 주관하는 당사자다.

그는 워싱턴 포스트의 원문 기사를 읽어보고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면서,

한국어 기사는 그나마도 너무 짧아 조슈아 벨의 '굴욕'만 강조됐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사실 '워싱턴 굴욕'이라는 말은 워싱턴 포스트 원 기사의 제목은 아니다. 

원 기사의 제목은 '아침 식사 전의 진주'였다. 

한국 언론이 '굴욕'이라는 단어를 유난히 좋아하긴 하나 보다. )

그는 내한공연 때도 사람들이 '굴욕'에만 관심을 쏟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어찌 됐든 나는 조슈아 벨이 이 기사로 꽤 큰 홍보 효과를 누렸을 것 같다.

아마 내한공연에도 득이 되면 됐지 실이 되는 않을 것 같다.

공연 기획사에서는 싫어하더라도, 

혹시 공연을 앞두고 조슈아 벨 인터뷰를 하게 되면 물어보게 될 것 같다.

왜 이 실험에 응했는지, 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론 그가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든, 지극히 '외교적인' 답변이 나올 것 같긴 하지만.  

                                                                                                    <2007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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