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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1일 SBS뉴스 취재파일로 쓴 글

지난 19일(한국 시각) 미국 포트워스 베이스퍼포먼스홀에서 폐막한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습니다. 바로 18살의 한국인 피아니스트 임윤찬입니다. 임윤찬은 이번 콩쿠르 최연소 참가자였는데, 역대 최연소 우승자라는 기록도 세웠습니다. 그는 각 라운드 연주 때마다 담대하고 탁월한 연주로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유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됐습니다. 특히 최종 결선에서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압도적인 명연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죠.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전 세계 피아니스트들이 꿈꾸는 주요 콩쿠르 가운데 하납니다. 냉전 시기 제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미국인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을 기념해 1962년부터 열려왔죠. 4년 주기로 열리는데, 역대 우승자 명단에는 라두 루푸 같은 거장들이 있습니다. 한국인 피아니스트로는 2009년 손열음이 2위를 차지했고, 2017년 15회 때 선우예권이 한국인 최초로 우승했습니다. 16회 대회는 코로나로 1년 미뤄져 마침 콩쿠르 60주년을 맞은 2022년에 열린 건데, 임윤찬 우승으로 한국인 피아니스트 2회 연속 우승 기록도 나왔습니다.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을 콩쿠르에서?

임윤찬이라는 이름은 국내 음악계 관계자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했습니다. 2019년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에서 15살의 나이에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이후 차세대 유망주로 손꼽혀 왔습니다. 국내에서 독주와 협연, 실내악 무대에 종종 섰는데, 기술적 완성도는 이미 '차원이 다른' 수준이고, 자신의 음악적 주관을 뚜렷하게 드러내면서 관객을 매료시켰습니다. 2004년생인 그는 예원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해 피아니스트 손민수를 사사하고 있습니다.

저도 임윤찬의 공연을 몇 차례 본 적이 있습니다. 잘 치는 사람들은 많지만 임윤찬은 그중에서도 특별했습니다. 그는 지난해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12곡 전곡을 독주회 프로그램으로 내놨습니다. '초절기교(超絶技巧) 연습곡'은 Transcendental Etude, 여기서 'transcendental'은 초월적인, 탁월한, 이런 뜻인데요. '저 세상 텐션'이란 말 요즘 많이 쓰잖아요? 정말 저 세상 것처럼 무지 어려운 기교가 요구되는 연습곡이라고 할까요. 임윤찬의 초절기교 연습곡 연주는 놀라웠어요. 어렵기로 소문난 곡들을 쉬지 않고 한달음에 연주하면서, 아무런 기술적 어려움 없이 자기 방식대로 마음껏 요리했습니다. 격정적인 대목에선 엄청나게 몰아치고 폭발하다가, 느린 대목에선 힘을 쫙 빼고 한껏 멜랑콜리해지다가, 깊은 고독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임윤찬의 연주에 대한 몰입도는 엄청나서, 이를 지켜보는 사람까지 흠뻑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임윤찬은 바로 이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2곡 전곡을 준결선 프로그램으로 들고 나왔습니다. 순위를 가려 계속 탈락시키고, 조금의 실수도 치명적인 콩쿠르 경연에서, 이런 난곡을 들고 나오는 뚝심이라니요. 그런데 임윤찬의 이 선택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사실 콩쿠르 경연을 보는 사람들은 심사위원이 아니더라도 대개 마음속으로 이런저런 점수를 매기게 마련입니다. 다른 사람의 연주와 비교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의 연주는 이게 콩쿠르라는 걸 완전히 잊고, 그냥 숨을 죽이고 음악에 푹 빠지게 했습니다. 현장 관객뿐 아니라 유튜브 중계로 보는 사람들까지도 콩쿠르가 아닌 '임윤찬 리사이틀'의 관객으로 만들어버리는 마력이 있었습니다. 결선에서도 그는 또다시 그런 마력을 발휘했습니다. 클라이번 웹캐스트 진행자인 피아니스트 엘리자베스 로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가 끝나자마자 '임윤찬은 마치 마법사 같았다',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연주'라고 눈물을 글썽였을 정도로요. 지금 유튜브에 올라 있는 이 영상 댓글을 보면 '역사에 남을 명연'이라는 전 세계 음악 팬들의 찬사가 가득합니다.
 
그의 우승 소감 "올해 들어 가장 심란한 마음"

저는 일요일 원래 근무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반 클라이번 콩쿠르 기사를 쓰게 될 것 같아 미리 휴일 근무를 다른 사람과 바꿨습니다. 과연 임윤찬이 우승했고, 직후부터 저는 바빠졌습니다. 먼저 1보 기사 쓰고, 낮 뉴스에 리포트, 메인 뉴스인 8뉴스 리포트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당사자인 임윤찬의 인터뷰가 필요했죠. 화상 인터뷰를 하기로 미리 얘기를 해놓은 상태였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현장에 있는 관계자가 대신 질문하고 찍어 보내온 영상을 받았습니다. 무슨 얘기를 했을까 궁금해하며 도착한 영상을 열었습니다.

"마음이 굉장히 무겁고 심란하고 걱정되는 마음이 큽니다. 이 콩쿠르를 통해서 깊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에 만약에 관객 분들의 마음에 제 음악이 가 닿았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네? 심란하다고요? 걱정된다고요? 이게 방금 금메달을 딴 사람의 소감이라고요? 더 들어볼까요.
 
"우승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비행기에 탔기 때문에 지금 좀 당황스럽고 마음이 무거워요. 저랑 선생님(피아니스트 손민수)이랑 계속 얘기했지만, 이 콩쿠르를 통해서 제가 피아노를 우승하게 잘 치는 게 아니라, 얼마나 깊은 음악을 들려줄 것인지가 제 콩쿠르의 목표였기 때문에…… 그리고 제가 아직 너무 준비가 안 된, 너무 부족한 음악가인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을 받아서 너무, 올해 들어서 가장 심란한 마음이에요. 굉장히 심란했고 마음도 무겁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좀 고민이 많습니다."

'올해 들어서 가장 기쁜 마음'이 아니라 '올해 들어서 가장 심란한 마음'이라고요? 나중에 임윤찬과 짧게나마 직접 통화하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미 인터뷰 영상을 보기는 했지만, 직접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콩쿠르 나간 이유? 음악이 깊어지도록, 음악을 공유하고 싶어서

Q. 우승을 기대한 적이 없었나요?
A. 콩쿠르 전 과정 동안 우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어요.

Q. 우승자로 호명됐을 때 기분은?
A. 마음이 무겁고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가야 되나 고민이 많이 됐어요.

Q 그래도 우승해서 기쁘지 않으세요?
A 단 한순간도 기쁜 적이 없어요.

Q. 그렇다면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나요? 어떤 마음으로 임했나요?
A. 그냥 제 음악이 더 깊어지길 바라면서, 전 세계에서 많은 분들이 콩쿠르를 보시니까 제 음악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으로 나왔어요. 우승을 원해서 나온 것이 아니고, 제 음악을 더 공유하고 싶어서. 그래서 출전하게 된 것 같아요.

Q 가장 기억에 남는 라운드는?
A. 아무래도 파이널 라흐마니노프 연주한 거요. 연주 끝나고 나서, 더 이상 할 레퍼토리가 남아있지 않으니까 안도하는 마음이 가장 기억에 남고……
 
"스스로 만족하는 순간 위험해진다"

Q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을 준결선에 선곡한 이유는? 콩쿠르에서 잘 연주 안 하는 곡인데?
A 사실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아서 했던 거고요. 그리고,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은 리스트가 중학생 나이 때부터 b마이너 소나타를 쓰던 말년까지 수정과 수정을 거쳐서 만들어낸, 리스트의 인생이 담긴 대작이기 때문에 이 곡을 60분 프로그램으로 세미 파이널에서 연주하고 싶었습니다.

Q. 그렇게 연주하고 나서 만족하셨나요?
A. 무대 마치고 만족은 못하죠.

Q. 그래도 이 정도면 내가 잘했다 싶은 라운드는?
A. 그런 순간이 되면 위험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항상 만족하면 안 되죠. 음악은.

Q. 앞으로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A. 저도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서 계획을 말씀드리기가 좀……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끝난 뒤에도 관련 행사와 프로그램들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소속사 대표 말을 들으니 아직 정확한 내용을 다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귀국 날짜도 확정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냥 계속 학교 다니고, 다른 인터뷰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 할 거라고 얘기했는데, 기회가 된다면 다른 곡도 도전할 마음이 있어요.

Q 음악이 깊어져야 한다는 얘기도 했는데,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연주자상은?
A. 피아니스트라는 사람은 바로크부터 현대 음악까지, 가리지 않고 다 연주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어릴 때부터 강하게 갖고 있었어요. 모든 장르를 다 잘 연주하는 게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연주자의 모습이에요.

Q 수상자 발표될 때 옆자리 분들이 굉장히 기뻐하던데, 호스트 패밀리 분들인가요? (네) 그 집에서 어떻게 지내면서 콩쿠르 준비하셨는지?

A. 제가 사실 매일 밤, 새벽까지 연습해서 눈치가 많이 보였는데, 그분들도 잠을 자야 하는데 저 때문에 못 주무실까 봐서요. 그런데 호스트 패밀리 분들이 전혀 상관없다고 너무 편하게 해 주시고, 음식도 중간중간 만들어주시고, 다 해주셔서, 정말 이 세상 최고 호스트 패밀리인 것 같아요. 제가 정말 잘 만난 것 같아요. (*클라이번 콩쿠르 주최 측에서, 모든 호스트 패밀리 집에 같은 사양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참가자 연습용으로 보내준다고 합니다. 임윤찬은 다른 인터뷰에서 새벽 4시까지 연습했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산에 들어가서 피아노만 치고 살고 싶다"

사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나머지는 한국에 돌아온 뒤에 천천히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다른 인터뷰에서 '산에 들어가서 피아노만 치고 살고 싶다'고 했더라고요. 이 세상의 모든 레퍼토리를 다 치고 싶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그가 우승하자 세상은 '새로운 스타 탄생'이라고 흥분하고 있지만, 정작 그는 흥분에 휩싸이지 않고 자신의 음악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시상식 중계를 보면서 그가 활짝 웃는 표정을 보이지 않는다고, 그저 멋쩍은 미소만 짓는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콩쿠르에 나가면서 수상을 한 순간도 생각한 적이 없다니. 예상하지 않았던 상을 받아서 심란하다니. 어쩌면 바로 그런 연주자이기에, 콩쿠르 경연 내내 그렇게 음악에 푹 빠져들어 특별한 연주를 보여줄 수 있었던 거 아닐까요. 제가 이번 콩쿠르에서 본 임윤찬의 멋진 미소들은 모두 그가 연주하며 음악에 푹 빠져 있을 때 나왔습니다. 그의 멋진 미소를 앞으로 더욱 자주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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