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 시상을 맡았던 윤여정 배우의 '수어 시상'이 화제가 되었죠. 윤여정 배우가 수상자인 트로이 코처를 수어로 호명했다, 트로이 코처가 수어로 수상 소감을 말하는 동안 트로피를 들어줬다…… '역시 클래스가 다르다'며 윤여정 배우의 '품격'과 '배려'를 칭송하는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윤여정 배우는 수어로 '호명'하지 않았다
윤여정 배우는 분명 품격 있는 시상을 했고, 보도할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애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아쉬움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 상을 받은 농인 배우 트로이 코처보다 윤여정 배우의 '배려'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겁니다. 모든 기사가 다 그랬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전반적으로 그런 분위기였던 건 사실입니다. 트로이 코처 수상의 의미가 좀 더 부각되었다면 좋았을 겁니다. 윤여정 배우는 수어로 '축하합니다' '사랑합니다'를 표현했는데요, '사랑합니다'를 수어로 하려다 약간 실수한 동작이, 트로이 코처를 수어로 호명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습니다. 그러니까 윤여정 배우가 수어로 트로이 코처를 '호명'했다는 보도는 엄밀히 말하면 오보였던 셈입니다.
트로이 코처가 남우조연상을 받은 영화는 'CODA'입니다. CODA는 'Children of Deaf Adult'의 준말로, 청각장애인의 자녀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영화는 가족 모두가 청각장애인인 소녀 루비의 이야기인데요, 코처는 루비의 아버지 프랭크 역을 맡아 진한 부성애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청각장애인 배우가 아카데미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 수상자는 1987년 '작은 신의 아이들'로 여우 주연상을 받았던 말리 매틀린이었습니다.
참고로, 농인과 청각장애인을 혼용해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똑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농인은 청각장애인 중에서도 한국 수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며 농문화를 향유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농인의 상대어는 '청인'이죠. 청각장애인 중에서도 청각보조장치를 사용하거나 입술을 읽어 상대방의 말을 파악하고, 발성훈련을 해서 음성언어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구화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청각장애인이라고 해서 모두 수어를 하는 건 아닙니다. 또 수어와 구화를 함께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장애인 역은 장애인 배우에게"
미국에서는 이렇게 일찍부터 청각장애인 배우가 활발하게 활동해왔는데, 한국에서는 청각장애인 역할까지도 대부분 비장애인이 하는 게 현실이죠. 이런 현실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전부터 나왔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저도 트로이 코처의 수상을 보면서 얼마 전 한국에서 공연됐던 '가족이라는 이름의 부족'이라는 연극을 떠올렸습니다. 이 연극도 청각장애인 가족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농인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청인 배우들이 수어를 배워서 연기했습니다. 외국어를 못하던 사람이 배워서 그 외국어로 연기한 것과 같습니다. 이 연극이 영국에서 초연될 때는 농인 배우들이 맡아 연기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농인 배우들에게 맡길 수는 없었을까요. 농인 배우들이 다수 활동하고 있는데 말이지요.
이유를 따져보면 장애인 배우가 많지 않다, 장애인을 캐스팅하면 수어통역사 같은 추가 인력이 필요한데 부담이 크다, 등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오랫동안 장애인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굴러온 사회 구조와 인식 부족이 큰 원인입니다. 등록 장애인이 인구의 5퍼센트 이상이고 10명 중 9명 꼴로 후천적 장애라고 합니다. 장애인 역할을 100퍼센트 장애인 배우가 맡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더라도,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연기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더 확산되어야 합니다.
이 공연에는 아쉬운 점이 또 있었습니다. 청각장애인 관객이 이 연극 관람을 위해 공연 제작사에 자막 서비스를 요청했지만, 처음엔 받아 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며 비판 여론이 일자 비로소 자막 서비스가 시작됐습니다. 극장 뒷좌석 일부를 장애인 관객에게 할당하고 태블릿으로 자막을 제공하는 형식이었죠. 청각장애인을 소재로 한 연극을 만들면서도, 청각장애인 관객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걸까요? 연극 자체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여러 모로 아쉬움이 많습니다.
BTS 콘서트 수어통역은 어떻게 성사되었나
최근 저는 '배리어 프리(장애자와 고령자를 위해 물리적.제도적.심리적 장애물을 없애는 것)' 공연을 취재해 보도했는데요, 공연장의 '배리어 프리'는 휠체어 석을 두는 것뿐 아니라,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과 수어통역,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 등이 있습니다. 지난 달에 열렸던 방탄소년단의 서울 공연은 수어통역으로 화제가 되었는데요, 세 차례 공연 중 마지막 날 수어통역사 두 명이 와서 공연 전체를 통역했습니다.
방탄소년단 공연에 수어통역사가 오게 된 것은 한 농인 관객의 끈기 있는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2017년부터 아미(방탄소년단 팬)였다는 안정선 한국농아동교육연구소 대표입니다. 그는 2018년 '러브유어셀프(Love Yourself)' 공연은 수어통역 없이 혼자 봤다고 합니다.
"통역사 없이 혼자 가서 공연을 봤을 때는 지금 무슨 노래를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고, 멤버들이 이야기할 때도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4만 5천명 관객 중에 나 혼자라는 느낌이 들어서 많이 불편했습니다."
2019년 '매직샵 머스터' 때는 빅히트 공지에 따라 장애인 문의로 고객센터에 연락해 수어통역을 요청했습니다. 소속사에 직접 얘기하지 못하고 예매처를 통해 전달해야 했고, 수어중계 서비스를 이용해 소통했는데, 길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서 공연에 수어통역사가 왔습니다. 공연 수어통역은 분량이 많고 어려워 두 명이 나눠서 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때는 한 명만 왔다고 합니다.
"장애인 좌석에 제가 앉고, 제 옆에 수어통역사가 앉았는데, 원래는 수어통역사를 마주 봐야 하거든요. BTS 공연하고 수어통역을 같이 봐야 하는데, 제 옆에 수어통역사가 있으니까 옆을 봤다가 앞을 봤다가 하느라고 공연을 제대로 보기 힘들었어요."
안 대표는 이후 2018년 미국 LA 로즈볼 스타디움에서 열린 '러브유어셀프:스피크유어셀프' 콘서트를 관람했습니다. 안 대표는 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미국 수어도 구사합니다. 이 공연은 수어통역사 두 명이 관객 앞에서 교대로 통역했습니다. 안 대표는 똑같이 빅히트가 주최하는 콘서트인데 왜 한국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지 궁금했고, 이전에는 요청한 사람이 없어서 그랬을 거라고 짐작했다 합니다.
여기서 또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수어는 나라마다 다릅니다. '한국 수어'는 '한국어'와 함께 대한민국의 공용어로 지정되었습니다. 한국 수어는 법적으로 한국어와 동등하지만 다른 언어입니다. 예전에는 '수화'라고도 했지만, 요즘은 한국어와 동등한 언어로서 '한국 수어'로 불립니다. 방탄소년단이 '퍼미션 투 댄스'에서 안무에 활용한 것은 '국제수화(International sign language)'로, 각국의 농인들이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안 대표는 2019년 10월 한국에서 열린 '러브유어셀프:스피크유어셀프' 콘서트 때는 고객센터를 통해 빅히트 담당자의 이메일 주소를 받았고, 반드시 수어통역사 두 명을 배치해 관객 앞에서 통역해 달라고 이메일로 요청했습니다. 안 대표가 답장을 기다리다가 사연을 트위터에 올리자 전세계 아미들은 누구나 함께 방탄소년단의 공연을 즐길 권리가 있다며 수많은 '리트윗'과 '좋아요'로 힘을 보탰습니다. 이후 빅히트 측의 답장이 왔고, 이 공연에는 드디어(!) 수어통역사 두 명이 와서 농인 관객 앞에서 통역했습니다.
한국에서 2년 반 만에 열린 이번 공연 역시, 안 대표가 고객센터 통해서 하이브 담당자에게 연락해(역시 어렵고 긴 과정을 거쳤습니다), 수어통역사 2명이 왔습니다. 안 대표 외에 농인 관객이 한 명 더 있었는데, 처음으로 수어통역 있는 공연을 보게 되어 굉장히 감격했고, 안 대표도 함께 즐겁게 공연을 봤다고 합니다.
한국의 배리어 프리, 갈 길이 멀다
이번에 배리어 프리 공연을 취재하면서 하이브 측에 문의했더니, 북미에서는 장애인 관련 법규에 따라 공연장에 장애인 지원 시설이 필수이며, 관객 요청이 있으면 반드시 수어통역을 제공해야 합니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네덜란드 등도 비슷한 관련 규정이 있다고 해요. 수어통역을 요청하는 절차도 간편합니다. 제가 찾아본 유럽의 많은 공연단체들도 정기적으로 '배리어 프리' 공연 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수어통역과 자막, 음성해설을 제공하고, 공연 홍보 단계에서부터 '배리어 프리'로 진행하더라고요.
국내에선 국공립 예술단체 중심으로 배리어 프리 공연을 종종 하고,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서는 무대도 조금씩 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대부분의 공연장에서 장애인 관객 지원 서비스는 대개 지체장애인만을 염두에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 대표도 맨 처음 고객센터에 연락해 농인이라고 밝히니 장애인석에 앉으면 된다고 하더랍니다. 농인들은 장애인석에 앉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수어통역이 필요하고, 지체장애인은 휠체어가 접근하기 쉬운 장애인석이 필요하고, 이런 식으로 필요한 서비스도 달라지는데 말이지요.
또 안 대표는 일반 좌석으로 예매했지만 장애인석으로 좌석이 바뀌었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장애인들은 장애인석을 별도로 예매할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이번 공연 예매에 성공한 농인 관객은 단 두 명밖에 없었는데, 텅텅 비어 있는 장애인석을 보니 안타까웠다고 합니다. 그는 올해 미국 LA 소파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공연도 봤는데, 이 때는 농인 관객 수십 명이 함께 즐겼다고 해요.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함께 누려야 할 권리
안 대표는 많은 사람들이 방탄소년단의 공연에 수어통역사가 온 걸 단순히 장애인에 대한 '배려'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농인 관객이 수어통역을 요구한 것은 공연을 즐길 권리를 행사한 것이고, 관객의 요청에 따라 수어통역 서비스가 제공된 것인데, 수어통역이 마치 비장애인이 장애인에게 베푸는 선행이나 미담 같이 소비되는 현실이 불편하다는 겁니다. '배리어 프리'의 갈 길이 아직 멀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안 대표 역시 수상자보다 시상자에 집중했던 아카데미 시상식 보도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습니다.
저는 '배리어 프리' 공연 관련 기사를 2005년 극단 학전의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국내 처음으로 자막과 수어통역을 제공했을 때부터, 기회만 되면 꾸준히 써왔습니다. 하지만 쓸 때마다 주변에서 '이런 것도 있냐'며 '신문물' 취급을 받았는데, 지난 2일 8뉴스에 보도했던 기사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699209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 '배리어 프리'가 일상 속에 스며들지 못했다는 뜻이죠. 공연의 '배리어 프리'는 누구나 공연 예술의 향유와 창작이라는 당연한 권리를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 겁니다. 더 이상 '배리어 프리'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상이 되는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합니다.
*SBS 뉴스 웹사이트에 취재파일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