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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 붕괴사고 20주년을 맞아, 성수대교 사고 10주년 당시 블로그에 썼던 글을 다시 올려봅니다. 기자 초년병 시절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취재하면서 고 이승영 씨와 그 어머니의 사연을 취재했고, 사고 후 10년이 지났을 때, 그 후일담을 접하고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마침 저는 둘째를 임신하고 있던 중이었죠. 그로부터 10년이 또 흘렀습니다. 승영 씨의 소원은 그동안 또 엉떤 열매를 맺었을까요. 보도국 후배기자에게 후일담을 한 번 취재해 보라고 얘기해 줬는데, 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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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10년 전 그 이름 떠올리며 눈물 쏟다<2004년 10월 25일> 

                
며칠 전
, 저는 한 조간신문의 1면에 난 기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기사는 10년 전 성수대교 참사로 딸을 잃은 어머니가, 사회에 빛이 되고 싶어한 딸의 생전 소원을 차례차례 이뤄가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딸은 당시 서울교대 3학년이었던 21살 이승영 씨. 저는 오래 전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한 이 이름을 건져 올렸습니다



성수대교--이럴 수가, 이럴 수가

1994
10 21일 아침. 성수대교 참사가 일어났던 날. 당시 저는 사회부에서 사건사고 취재 담당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출근해 담당 구역에 큰 사건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시경 캡'으로 불리는 선배에게 '아침 보고'를 마친 뒤였습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침식사를 하려는 참인데, 선배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딱 한마디였습니다.

"
성수대교가 무너졌으니, 빨리 현장으로 가!!"

함께 아침식사를 하려던 다른 회사 기자들도 차례차례 비슷한 내용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데? 무슨 얘기야?"

웅성거리다 TV에 비치는 화면을 보고는 경악하고 말았습니다. 교통방송 폐쇄회로 카메라가 잡은 화면이었는데, 정말로 성수대교가 거짓말처럼 '두 동강'이 나 버린 것이었습니다. 제가 새벽에 출근할 때도 멀쩡하게 건넜던 바로 그 다리, 성수대교였습니다.

다른 기자들과 함께 현장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당시 제가 있었던 동부 경찰서에서 성수대교는 그리 먼 곳이 아니었지만, 교통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강북 강변대로가 엄청나게 막혀, 저희 일행은 결국 타고 가던 차를 근처에 세워두고 내려서 성수대교를 향해 뛰기 시작했습니다. 숨이 차 오르는 것도 잊었습니다.

얼마를 뛰었을까. 저는 어느 새 성수대교가 무너져버린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몇 발자국 앞으로 퍼런 한강물과 추락한 차들의 잔해가 내려다 보였습니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 눈 앞이 갑자기 하얗게 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숨이 턱 막혔습니다.

'
어떻게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제 머릿속에서는 똑같은 말이 한동안 맴돌았습니다. 경악과 분노, 슬픔과 처참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막막함이 목구멍을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보다 조금 먼저 도착한 회사 선배가 무전기를 들고 다급한 목소리로 회사 안에 보고를 하고 있었습니다. 곧 현장을 연결하는 모양이었습니다. 선배는 그 때만 해도 연조 높은 기자들에게만 지급됐던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긴장한 목소리로 현장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휴대전화라 방송 도중 끊기기도 했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그런 데 연연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 이후 며칠간은 정말 정신 없이 '전쟁처럼' 지나버렸습니다. 성수대교 참사 같은 큰 사건사고가 터지면 취재 경쟁도 치열하게 마련입니다. 회사 숙직실이나, 이후 수사본부가 설치됐던 경찰서 기자실에서 새우잠을 자고, 현장으로 달려가는 나날이 반복됐습니다. 집에는 옷 갈아입으러 잠깐 들르는 정도였습니다.


딸의 시신을 기증한 어머니

사고 며칠 후, 저는 교생 실습을 가다가 사고를 당한 한 여대생의 이야기를 취재해, 뉴스 리포트로 제작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 여대생이 바로 이승영 씨였습니다. 당시 이씨는 당시 시내버스를 타고 장안동의 한 초등학교로 출근하다,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리면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교생 실습을 시작한 지 닷새만의 일이었습니다.

군인이었던 이씨의 아버지는 그 1년 전쯤 과로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불과 1년 사이에 사랑하는 가족 둘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어머니 김영순 씨는 '내가 죽으면 장기를 기증하겠다'던 딸의 소망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딸의 시신이 수습된 것은 장기 기증 시한인 사후 6시간을 넘겨버린 뒤였습니다. 봉사 활동에 관심이 많았던 딸의 소원을 절반이라도 들어주고 싶었던 어머니는, 시신을 고려대 병원에 해부학 실습용으로 기증했습니다.

빈소 앞에서 기다리며

 
당시 이승영 씨의 빈소는 건대 부속 민중병원 영안실에 차려졌습니다. 부랴부랴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저희 회사 카메라 기자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인터뷰도 하지 못했는데, 벌써 다른 회사 기자들이 여럿 다녀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이런 경우, 늦게 도착하는 기자들은 취재를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가족이 어떻게 생판 남일 뿐인 기자들의 질문에 일일이 응대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경황없는 와중에 어떻게 응대를 해줬다 해도, 기자들의 질문이라는 게 대부분 비슷하게 마련인데, 계속해서 다른 기자들을 만나 똑같은 얘기를 되풀이하고 싶은 생각이 들겠습니까. 신문 같으면 먼저 인터뷰한 다른 회사 기자한테 어떤 내용이었는지 간접적으로 듣는 방법이 있지만, 방송은 얼굴과 목소리가 나오는 인터뷰가 있어야 하니 더욱 어렵습니다.  

아니나다를까, 한참을 기다려 카메라 기자가 도착했지만 유가족들은 아예 빈소에 기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딸을 잃은 어머니가 '시신을 기증한 것이 그렇게 떠들썩하게 자랑할 일이냐'며 더 이상 인터뷰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답니다. 다른 유가족들은 '안되겠다'며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유가족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갔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인터뷰는 안 하셔도 되니, 잠깐 촬영만 하게 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회사에 상황을 보고하니 '그래도 리포트가 오늘 뉴스에 잡혀 있으니 계속 시도를 해보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저처럼 취재를 거절당한 다른 언론사 기자들은 모두 철수한 뒤였습니다. 저는 카메라 기자와 함께 계속 빈소 밖을 서성대며 기다렸습니다. 억지로 밀고 들어갈 상황도 아니었고, 이렇게 계속 기다리고 있으면 잠깐이라도 들여보내 주지 않을까, 실낱 같은 희망을 걸었습니다.

어머니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막막한 심정으로 계속 기다렸습니다. 고려대 병원,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 관계자와는 취재 약속을 잡아놓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제일 중요한 장례식장을 촬영한 화면조차 없다면 다른 화면은 아무 소용없다는 생각에 점점 초조해졌습니다.


그 날, 그 어머니의 표정


한 시간 이상을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병원이 떠들썩해졌습니다. 교육부 장관이 방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승영 씨가 교대생이었기 때문에 관련 부처인 교육부가 아마 정부측 조문객 대표로 온 모양이었습니다. 교육부 장관과 수행 공무원들이 빈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유가족들은 장관의 조문까지 막지는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저희 팀도 함께 들어갔습니다.

교육부 장관이 조문을 하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겨우겨우 실내를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이승영 씨의 영정, 그리고 고인을 추모하는 흰 국화꽃 다발들...... 그러나 어쩌면 이 기회에 이씨의 어머니를 인터뷰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는 헛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카메라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정부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며 장관을 책망했습니다. 교육부 장관은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기자랍시고 서 있던 저도 부끄러워졌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저는 장관이 빈소를 나설 때 함께 나왔습니다. 제 등 뒤에서는 흐느낌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촬영을 조금 더 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제 마음은 이미 '이제 됐다, 나가자'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상 하면 죄인이 될 것 같았습니다. 카메라 기자도 저와 똑같이 생각한 모양이었습니다. 여기서 시간을 더 끌 수도 없었습니다. 뉴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착잡한 심정으로 고려대 병원으로, 그리고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로 달려갔습니다. 취재를 끝내고 회사에 돌아오니, 8시 뉴스까지 한 시간 반 정도밖에 안 남았습니다. 숨이 차도록 기사를 쓰고 편집을 해서 넘겼습니다. 리포트에는 딸의 시신을 기증한 어머니의 인터뷰가 없었고, 얼굴도 정면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움이 많은 리포트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자 초년병 시절 가장 힘들었던 날 중 하루였던, 그 길고 길었던 날을 한동안 잊지 못했습니다. 딸의 시신을 '해부학 실습용'으로라도 기증해서, 세상에 보탬이 되도록 하려던 어머니. 그토록 딸을 사랑했던 어머니. 그 얼굴에 서려있던 한없는 슬픔과 결연한 각오 같은 것들이 선명한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 인상도 조금씩 흐려졌고, '이승영'이란 이름은 어느새 기억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딸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이제 성수대교 참사가 일어난 지 10. 저는 신문 기사를 통해 이승영 씨와 그 어머니를 다시 만났습니다. 이 기사는 어머니가 딸을 먼저 떠나보낸 뒤, 딸의 일기장에 적힌 소원을 이루기 위해 지금까지 헌신해왔다고 적고 있었습니다. 딸의 일기장에는 '내가 일생 동안 하고 싶은 일'이라는 제목 아래 이런 소원들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장학금을 만든다 / 이동도서관을 강원도에 만든다 / 복지마을을 만든다 / 한 명 이상을 입양한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

이미 시신 기증으로 '장기 기증'이라는 소원 하나를 이뤄줬던 어머니는 차례차례 나머지 소원들을 이뤄나가기 시작합니다. 사고 직후 받은 보상금 2 5천만원은 전액 교회에 기부해 '승영 장학회'를 만듭니다. 어머니 스스로도 전도사가 돼서 호스피스 봉사 활동에 나섰습니다. 그 동안 형편이 어려운 신학대학원생 50여명이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승영 장학금으로 학업을 마친 장학생 한 사람은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공동체를 꾸리고 있다고 합니다. '복지 마을을 만든다'는 승영 씨의 소원은 이렇게 이뤄진 셈입니다.

이동도서관을 강원도에 만든다는 소원. 지난해 8월 승영 장학회는 강원도 오지의 한 포병연대에 전천후 이동도서관 차량을 기증했습니다. 이 차량은 7개 부대 500여 장병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고 합니다. 기사는 승영 씨의 소망이 담긴 '이동 도서관'이 휴전선 바로 아래까지 식료품을 나눠주러 가는 '무료 PX' 역할, 그리고 군생활을 힘겨워하는 사병들의 이동 상담소 역할까지 했다고 적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또 사고 직후인 95, 딸이 초등학교 때 쓴 시를 묶어 책을 발간했습니다. '신앙 소설을 쓴다'는 소원도 이렇게 이뤄진 것입니다. 이 때 받은 인세 400만원은 장애인 재활 시설의 김장 김치 비용으로 쓰였습니다. '맹인을 위해 무언가 한다'는 소원 역시 장학회가 조만간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책 보급을 시작하면 이뤄질 것이라고 합니다.

‘한 명 이상의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는 소원은 올해 초 결혼한 동생이 이루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동생 상엽 씨는 사고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그는 '누나는 인생을 길게 볼 수 있는 눈을 주고 갔다'고 회고했다고 합니다.

"세상에 사랑이 이어지고 있으니......"

어머니 김영순 씨는 딸이 세상을 떠난 이후,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 바치고, 교회 근처 연립 8평 원룸에 혼자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수대교 10주년 추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승영 씨의 외삼촌이 대신 유가족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자신이 한 일이 알려지면서 떠들썩한 취재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제가 읽은 기사는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어머니는 찾아간 기자에게 '나는 한 일이 없기 때문에 해 줄 말이 없다'고 했다. '세상에 대한 미움 따위도 없다. 세상에 사랑이 이어지고 있으니 우리 딸, 아직 살아 있는 것 아니냐'는 말만 남기고 현관을 닫았다. 더 이상의 질문도, 사진 촬영도 응하지 않았다." (출처: 조선일보 2004년 10 19일자 1)

저는 기사를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습니다. 10년 전 그 날의 풍경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마치 제가 지금 그 어머니를 마주 대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부끄러워졌습니다. 번듯한 새 다리가 놓여졌다고 해서 옛 성수대교의 붕괴가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 저는 그 동안 까맣게 잊고만 살았습니다. 그저 제가 사는 데만 바빠 딴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돌아볼 생각도 못했습니다.

저는 부끄러움 속에서도 한편으로는 가슴 벅차게 기뻤습니다. 제가 영정으로만 만난, 꿈 많던 여대생 승영 씨의 삶을, 그 어머니와 가족들이 지금도 이렇게 아름다운 방식으로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요. 동강난 성수대교처럼 막막한 절망과 슬픔 속에 건져 올린 희망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것임을 뼈저리게 느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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