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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연수 기회를 얻어 영국에서 공부하던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어릴 때 그만뒀던 피아노 레슨을 다시 받기 시작했는데, 집에 피아노가 없어서 내가 다니던 워릭대학교의 뮤직센터 연습실을 자주 드나들곤 했다. 어느 날 오후 연습하러 뮤직센터에 갔더니 그 날 따라 모든 연습실이 다 꽉 차 있고 나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별수없이 나도 계단에 걸터앉아 기다리다가 먼저 와서 기다리던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마침 모두 피아노를 배우는 아시아권 학생이었다. 나 말고 한 명은 중국, 한 명은 홍콩에서 왔다고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중국 피아니스트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중국 피아니스트들 잘하잖아. 랑랑도 있고 윤디도 있고.”
“랑랑?” (두 사람이 동시에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왜? 랑랑은 안 좋아해?”
“응. 랑랑은 진지하지 않은 것 같아서 난 좀 별로..….. 윤디 쪽이 낫지”(중국 학생)
“나도 윤디가 좋던데. 랑랑 연주할 때 보면 서커스 하는 것 같더라…..”(홍콩 학생)
“그렇구나. 너네 딴 친구들도 다 그렇게 생각해?”
“글쎄. 랑랑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기는 한데…..”(중국 학생)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연습실 두 개가 한꺼번에 비는 바람에 우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고 헤어져야 했다. 이 날의 짧은 대화는 랑랑과 윤디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을 잘 보여준다. 쇼팽 콩쿠르 우승자 출신인 윤디는 뭔가 진지하고 학구적인 연주자이며(게다가 섬세한 외모까지 갖췄다), 요란한 무대매너와 이것저것 다 치는
잡식성 레퍼토리의 소유자인 랑랑은 예술보다 쇼에 치중한다는 시각 말이다(게다가 외모도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다). 나 역시 당시 랑랑보다는 윤디를 선호하는 견해에 막연하게나마 동의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이 대화가 재개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랑랑 쪽에 한 표 던지겠다. 연수
다녀온 후 윤디의 리사이틀을 몇 차례 봤지만 그다지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고, 기복이 심한 것으로 느껴졌다. 랑랑은 내가 보기엔 다소 야단스러운 몸짓이 집중해서 듣는 걸 종종 방해하거나,
해석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기는 했어도, 기본적으로 자신의 음악에 확신을 갖고 폭넓은
레퍼토리를 안정적으로 소화하는 연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취재 때문에 랑랑을 몇 차례 만나면서
그를 더욱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최근 한국을 다녀간 랑랑은 공연 외에도 다양한 화젯거리를 남겼다. 그 중에 으뜸은 가수
인순이와 함께 청룡영화상 시상식에 특별 출연해 ‘거위의 꿈’을
연주한 것이었다. 랑랑은 먼저 쇼팽 에튀드 ‘혁명’을
연주하고, 이어 인순이가 노래하는 ‘거위의
꿈’에 피아노 반주를 했다. 시상식이 생중계되는 동안, ‘어쩌다
랑랑이 한국의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인순이 노래에 반주를 해주게 됐나?’ ‘청룡영화상 시상식에 웬 ‘혁명’?’ 하는 얘기들이 SNS에서
회자되었다.
랑랑이 이런 대형이벤트에서 연주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한국 가수로만 따져봐도 지난 2011년 MAMA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 시상식에서 아이돌 그룹 ‘비스트’와 함께 연주한
적이 있다. 랑랑은 콘서트홀을 벗어나 다양한 이벤트에서 연주하는 걸 즐긴다. 이번 청룡영화상 시상식 출연도 영화상 주최측에서 먼저 제안해서 이뤄진 게 아니었다. 랑랑은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연주가 끝나자마자 전세기를 타고 대만으로 갔다.
대만 ‘금마장 영화제’에서 축하 연주를 하기 위해서였다. Blue Dragon Movie Award에
이어 Golden Horse Movie Award로 옮겨탄 셈이다.
랑랑은 그럼 왜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쇼팽 에튀드 ‘혁명’을
연주했을까. 이 곡은 엄정화가 주연했던 한국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에 나왔다. ‘호로비츠를 위하여’가 최근 영화도 아니고, 한참
지난 영화에 나왔던 게 무슨 상관이냐 싶기도 하지만, 청룡영화상 시상식이니까 한국 영화와 약간의 인연이라도
있는 곡을 연주하는 게 좋겠다고 한국측 공연 기획사가 제안했고, 이를 랑랑이 받아들인 것이다.
인순이가 랑랑과 함께 출연하게 된 것은 여러 조건이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축하 공연의
다른 출연자들이 이적, 미스 A 등이었던
점도 생각했을 것이고, 다채로운 편성이 아니라 피아노만으로 하는 연주에 맞춰 풍부한 감성을
전해줄 수 있는 가창력의 소유자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 일정도 맞아야 한다, 이런 조건들에 맞는 출연자가
인순이였던 것이다. 랑랑도 인순이가 ‘한국의 디바’로 불리는 유명한 가수라는 것을 알고 흔쾌히 응했다.
인순이는 ‘거위의 꿈’을 통해 꿈과 희망을 노래하고
싶다고 했다. 랑랑은 리허설 때 인순이가 ‘거위의
꿈’이 희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해주자, 독주곡 ‘혁명’ 역시 희망을 이야기하는 곡이라고 응답했다. 쇼팽이 조국 폴란드의
독립을 염원하면서 썼던 곡이라면서. 나는 격정적이고 비장한 에너지로 가득 찬 ‘혁명’이 희망에 관한 곡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랑랑의
설명을 들으니 그럴 듯했다. 랑랑이 ‘거위의 꿈’과 ‘혁명’ 두 곡을 다 ‘희망’이라는 키워드로 묶어낸 셈이다.
랑랑은 인순이와 함께 ‘레드카펫’을 밟으며 시상식에
입장했는데 이는 랑랑이 먼저 요청한 사항이었다. 랑랑은 클래식 연주자에 머무르지 않고 대중적 스타를
지향하는 것 같다. 실제로 랑랑의 의도는 적중했다. 랑랑은
클래식 음악계 ‘슈퍼스타’였지만 한국 내 인지도는 일부 클래식
팬들에 한정돼 있었다. 그러나 청룡영화상 축하 공연이 생방송으로 나간 직후, 비록 잠시이긴 했지만 랑랑은 국내 대형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올랐다. 랑랑을 몰랐던 많은 사람들이 랑랑이라는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있다는 것, 그리고
쇼팽 에튀드 ‘혁명’이란 멋진 곡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
것이다.
SBS는 랑랑의 이번 내한공연 실황을 모두 녹화했다. 보통 이런 유명 아티스트의 공연을
녹화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액수의 중계권료를 내야 하기 때문에 녹화를 하고 싶어도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랑랑은 이례적으로 중계권료를 받지 않았다. 랑랑이 다른 공연에서도 그렇게 하는지, 이번에만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랑랑이 다른 클래식
연주자들과는 차별되는 면모를 보여준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글 앞에서 소개한 대화에서 언급했듯이 튀는 연주 동작, 화려한 무대 매너, 대중매체 노출을 즐기는 성향 때문에 랑랑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음악 애호가들도 많다. 랑랑이 이렇게 잘 나가는 이유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든든한 배경으로 갖고 있다는 점을 들기도 한다. 하지만 랑랑을 내용 없이 배경 좋고 홍보 잘해서 성공한 스타라고만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돌이켜보니 SBS 보도국 문화부에서 클래식 음악 취재를 담당했던 10년간,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클래식 음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인다’는 게 어느새 나의 목표가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도 많이 느꼈다. 이런
어려움을 토로하다가 무용계에서 일하는 지인으로부터 ‘워낙 대중의 관심이 미미하다 보니, 미스코리아가 무용과 출신이라는 얘기만 들어도 반가웠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초창기에는 ‘고독하게 내 길만을 가련다’는 은둔형 예술가가 더 예술가답다고 생각했던 적도, 홍보에 신경 쓰는
예술가는 진짜 예술가답지 않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달라졌다. 모든 연주자가 다 랑랑처럼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클래식
음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 랑랑의 방식만이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방송사 클래식 음악 담당기자로서
내가 해왔던 고민과 관련해, ‘클래식 음악가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통념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대중에 손을 내미는 연주자가 소중하다는 생각을 예전보다 더 많이 하게 되었다.
어디 랑랑 뿐인가. 소프라노 조수미는 아이돌 스타와 함께 노래하고 ‘라디오 스타’ 같은 예능 프로그램 출연도 꺼리지 않는다. 해외에선 ‘오페라 가수’지만
국내에서는 ‘그냥 가수’로 활동하겠다고 선언한 보컬 그룹
‘로티니’ 같은 사례도 있다. 돌이켜보면 존 덴버와 플라시도 도밍고의 듀엣이니, ‘파바로티와 친구들’이니, 이런 시도가 옛날부터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정도면 내가 랑랑을 지지하게 된 이유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려나.
*클럽발코니 매거진 이번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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