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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여름, 서울디지털포럼 기획부서에 있다가 문화부로 다시 옮겨 미술 취재를 처음 담당하게 되었을 때 썼던 글이다. 공연 취재만 하다가 새로운 분야를 경험하게 되어 기뻐했는데, 부서 인력 사정상 미술 취재는 딱 넉 달 하고 후배에게 넘겨야 했다. 그래서 아쉬움이 조금 남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보도국을 떠나 브랜드전략팀에서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매년 운영해온 '올해의 작가상'을 SBS문화재단이 후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올해의 작가상 내년도 운영을 논의하기 위한 워크숍에 다녀와서, 내가 처음 미술 취재를 맡게 되었던 때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봤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몰라도 일단 문화부 기자로서의 직을 내려놓은 상태이지만, 문화와 관련있는 일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문화부에 와서 미술을 새로 담당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공연만큼은 아니지만, 미술 전시회 구경하는 것도 꽤 즐기는 편이다. 그래서 이번에 미술 취재를 맡게 된 것을, 공부를 더 폭넓게 할 수 있고, 새로운 분야의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로 기대하고 있다. (공연 취재는 후배인 남주현 기자와 나눠서 할 예정이다.) 그리고 지난주, 한 전시회의 기자간담회에서, 나는 이 기대가 헛되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9월초 서울시립미술관 등에서 열릴 예정인 미디어아트서울’-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의 기자간담회. 문화부에 복귀하고 나서 처음으로 취재하러 간 자리였다. 전시회 예술감독인 김선정 씨 외에도 출품 작가들 몇 명이 참석해 직접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순서가 있었다. 참석한 작가들 가운데 노순택씨와 임민욱씨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임민욱 씨는 손의 무게라는 비디오 작업을 출품한다. 이포보 현장과 폐쇄된 지 오래된 선착장, 유령 아파트 단지를 순례하며 찍은 비디오는 개발 이데올로기가 자연을 우리라는 이름으로 개발할 때 오는 상실감과 무력감, 소외 현상을 표현해낸다. 임민욱 씨는 비디오와 퍼포먼스, 오브제 설치 등 장르융합적 언어로 한국의 압축 근대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진통과 그 속도가 조장하는 망각에 저항하는 일관된 작업”(웹진 아르코, 김찬동 아르코 미술관장이 임민욱 씨와 한 인터뷰 중에서 인용)을 펼쳐온 작가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노순택 씨는 한국 전쟁이 남긴 흔적의 작동과 현재성에 주목하는 작가(노순택 씨 블로그 약력 중에서 인용)”. 그는 평택 대추리의 너른 황새울 들녘에 우뚝 솟은 흰 공 모양의 대형 구조물이 대체 무엇인가를 추적해 가는 과정을 담은 얄읏한 공이라는 작품을 출품한다. 이 흰 공은 레이돔(,Radar+ Dome=Radome)이라는 이름을 가진 미군의 고성능 레이더이다. ‘얄읏하다는 얄밉고 야릇하게 생겼다는 뜻으로 작가가 만들어낸 형용사다. 레이돔은 노순택 씨의 사진 속에서 때로는 탁구공처럼, 때로는 보름달처럼, 때로는 애드벌룬처럼 보이며 주위 풍경과 묘하게 어울린다. (2006년작인 얄읏한 공은 이미 개인전 등을 통해 공개된 바 있다. ‘얄읏한 공사진들은 http://navercast.naver.com/art/korea/1659를 참고하시라.)

 

두 사람은 기자간담회 공식 순서가 끝난 뒤 식사 때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노순택 씨가 2006년 평택 대추리를 이야기할 때, 임민욱 씨는 반색을 하며 그 때 저도 거기 있었어요!’ 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올해 SBS 기자직 지원자들 중 상당수가 자기소개서에 나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 집회와 진압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꼽았던 것이다. 대학 언론 기자였든, 혹은 그저 사회 현안에 관심 많은 학생이었든, 이들은 자신이 당시 평택 대추리에 있었던 것이 기자직을 지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고 있었다.

 

당시 서로 알지는 못했지만 평택 대추리에 함께 있었다는 예술가들. 그리고 대추리 때문에 기자를 지망하게 됐다는 학생들. 갑자기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대추리가 참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셈이네요. SBS 기자직 지원자들 가운데에도 대추리에서 기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는 사람들이 꽤 있더라고요. 이유가 뭘까요?  

노순택 씨의 대답.

답답함을 느꼈을 거예요.”

 

현장에 있었던 자가 느끼는 답답함. ‘현장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온전히 이 현장이 전해지지 않는 것 같아 느끼는 답답함. 노순택 씨는 그런 답답함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답답함은 곧 발언하고 싶은 욕망으로 전이되는 게 아닐까. 내가 경험한 현실을, 내가 해석한 현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 그래서 기자 지망생은 기사로 이야기하는기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작가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작품을 창조한다. 각자 다른 방식이지만, ‘이야기하고 싶다는 욕망만은 비슷한 것 아닐까.

 

노순택 씨는 평택 대추리에서의 일화를 또 하나 들려줬다. 자신이 작품을 위해 아주 낮은 자세로 촬영하고 있는 걸 보고 한 전경이 경멸하는 어조로 이렇게 내뱉었단다.

저 새끼, ‘예술 하고있네!”

노순택 씨는 예술 하는것이 무엇이기에 저런 식으로 경멸조의 말을 듣게 되는지 궁금해졌다고 했다. 그리고 그 전경에게 어떻게 아셨어요? 예술 하는사람인데요.” 했더니, 무척 당황해 하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술 하는것은 국외자의 시선으로는 상황에 걸맞지 않게 한가하거나 엉뚱한, 정신머리 없거나 쓸데없는 일로 여겨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예술가 자신에게는 그 상황에 가장 걸맞는 일이며, 중요한 일이고, 치열하게 몰두해서 해야 하는 일일 터이다.

 

이렇게 작가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까 좋네요. 사실 미술관에 가보면 작품 설명이 부실해서 잘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았거든요.”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자 임민욱 씨가 웃으며 답했다.   

그런데 사실 작가들은 작품에 대해이야기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말로 할 수 없어서 작품으로 하는 건데, 그걸 다시 말로 설명하라는 거잖아요.”

 

역시나, 작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작품으로 발언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작가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게다가 예술 작품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인데, 너무 친절하게 작가의 가이드라인이 주어지면, 이런 해석의 여지를 없애는 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2003년이었던가, 러시아의 연극 연출가 유리 부드소프가 예술의 전당에서 보이체크를 올렸을 때 했던 얘기가 생각난다. 그는 한 기자가 연출 의도가 무엇이냐고 묻자, ‘직접 보고 판단하라고 일갈했다! 그러니 작가들이 요즘 너무 떠먹여주는친절함을 강조하는 게 문제인 것 같다고 한 말도,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큐레이터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한 말도 모두 맞는 얘기일 것이다

작가들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작품이라는 음식에 대해, 어떤 스푼을 사용해서 먹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미술이든, 공연이든, 다른 예술장르도 마찬가지다. 음식을 앞에 놓고, 너무 낯설어 맛도 보지 않고 치워버린다든지, 그게 아니더라도 떠먹는 과정이 생소하고 힘들어 제 맛을 느끼지 못하는 일이 많지 않은가.

그러니 '떠먹는' 것은 관람객들의 몫이라 하더라도, 이 음식을 먹으려면 큰 스푼을 사용해야 하는지, 티스푼을 사용해야 하는지, 혹은 포크를 사용해야 하는지, 등등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 주어진다면 좀 더 제대로 작품의 맛을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술 취재가 사실상 처음인 나만 해도, 이 날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앞으로 맛보게 될 음식이 낯설다는 생각보다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으니 말이다. <201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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