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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의 베를린 필 공연 프로그램 일부. EKITAI AHN이라는 일본 이름과 안익태가 작곡한 'Etenraku'가 선명하다>
지난 11월 8일 SBS 8뉴스에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관련 기사를 썼다. 안익태가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유럽에서 ‘에키타이 안(EKITAI AHN. 안익태의 일본 이름 ‘안 에키타이’를 서양식으로 성을 뒤에 표기한 것)’이라는 이름의 일본인 음악가로
활동했고, 유럽의 기록물엔 한국인 안익태가 아니라 일본인 에키타이 안만 남아있지만, 최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한국 음악평론가의 지적에 따라 ‘에키타이
안’으로 표기돼 있던 기록을 ‘익태 안(EAK TAI AHN. 한국이름 안익태의 서양식 표기)’으로 수정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또 기사 중에 안익태가 자신이 쓴 환상곡 ‘에텐라쿠’를 지휘하는 1941년도 헝가리 동영상을 공개했다.
고심해서 쓴 기사였다. 취재 과정과 소회를 정리해 보려 한다. 먼저, 기사에도 나오지만 이 기사의 발단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였다. 베를린 필을 지휘한 한국인 지휘자, 하면 정명훈을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그 이전에 안익태가 있었다. 1943년 8월 18일 베를린 필 여름 콘서트의 지휘자는 안익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베를린 필은 지금까지 이 공연의 지휘자를 ‘에키타이 안’이라는 일본인으로 기록해 오다가, 최근 한국 음악평론가의 건의에 따라
‘익태 안’으로 이름을 바꿨다.
나는 베를린 필이 기록을 수정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흥미를 느꼈다. 물론 아주 사소한
변화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내한공연을 앞둔 시점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를린 필을 최초로 지휘한 한국인이 안익태라는 사실 자체도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뭔가 이야기를 풀어나갈 실마리를 더 찾으면
기사가 될 것 같기도 했다.
안익태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일본과 동맹국이었던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음악계에서 일본 음악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의 대표적인 친일 행적은 1942년 구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자신이 직접 쓴 ‘만주축전음악’을 연주했던
것이다. 애국가와 한국환상곡을 작곡한 민족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던 안익태는 이 시기 ‘친일파’로 변절한 것이다.
지난 2000년에 MBC뉴스에서 처음 동영상을
발굴 공개했던 이 음악회는 오랫동안 안익태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공연으로 잘못 알려졌었다. 하지만 2006년 독일 유학 중이던 송병욱 씨가 이 음악회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이 공연은 베를린 필이 아니라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이 연주했고, 당시
동맹관계였던 일본과 독일 외교관들이 잔뜩 참석한 ‘만주국 설립 10주년
축하 음악회’였다. 일본의 ‘프로파간다’를 위한 정치적 성격의 음악회였던 것이다.
2006년 안익태의 친일 행적이 불거지면서 논란이 달아올랐을 때, 나는 마침 문화부에 있었다. 하지만 당시 관련 기사를 적극적으로 보도하지
못했다. 내 기억으론 월간 객석과 조선일보에서 먼저 기사를 썼고, 나는
관련 스트레이트 기사를 쓰기는 했지만 8뉴스에 보도하진 못했다.
SBS는 문제가 됐던
그 음악회 영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방송뉴스를 하기에는 심대한 결격 사유였다. 돌이켜보니 2006년 당시 보도를 적극적으로 하지 못했던 아쉬움
때문에, 이번 취재를 시작하게 됐던 것 같기도 하다.
안익태가 베를린 필을 지휘한 음악회에선 어떤 음악들이 연주됐을까. 자료를 찾아보니 이 날
공연은 베를린 필의 ‘여름 콘서트’였다. ‘만주국 설립 10주년 축하 음악회’처럼 정치적 성격이 강한 공연은 아니다. 연주곡목은 피아니스트 다그마르 벨라가 협연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중 한 곡, 바그너의 ‘리엔치’ 서곡, 드보르작 ‘신세계’ 교향곡, 그리고 안익태 자신이 쓴,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 ‘에텐라쿠’였다.
환상곡 ‘에텐라쿠’는 일본의 전통음악 ‘에텐라쿠’의 선율을 차용해 서양 오케스트라 어법으로 쓴 곡이다. ‘에텐라쿠(월천악越天樂)은 일본의 궁중음악 ‘가가쿠(아악雅樂)’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이다. ‘에텐라쿠’를
바탕으로 쓴 일본인 작곡가들의 작품들은 서양에서도 종종 연주됐다. 일본인 음악가로 활동하던 안익태 역시
‘에텐라쿠’를 주제 삼아 쓴 이 환상곡을 자신의 주요 레퍼토리로
삼았다. 안익태가 이 곡을 유럽 곳곳에서 연주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당시
유럽 청중에게 ‘에텐라쿠’는 동양의 신비를 보여주는 독특한
곡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 ‘만주 축전음악’만큼 노골적인
정치성을 담지는 않았지만, 안익태의 친일 행적과 관련된 대표적인 곡이다.
그런데 안익태의 ‘에텐라쿠’는 악보도 없고 녹음도
남아있는 게 없다. ‘만주 축전음악’의 악보가 남아있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안익태 자신이 악보를 없애버린 것 아닐까. 아마
그는 이 시기의 행적을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학계에서는 안익태가 ‘에텐라쿠'를 광복 이후 한국에서 ‘강천성악’이라는
곡으로 개작 발표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이는 ‘강천성악’의 주제선율이 ‘에텐라쿠(일본 가가쿠
원곡)’의 주제선율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익태
자신은 ‘강천성악’을 조선의 아악을 바탕으로 썼다고 밝힌
바 있다.
나는 안익태가 지휘했던 1943년도의 베를린 필 음악회에 대해 알아보다가 이렇게 ‘에텐라쿠’까지 갔다. 그러나
이 내용들은 이미 학계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조각조각의 사실들이었다. 결국 내가 갖고 있는 새로운 사실은 베를린 필이 ‘에키타이 안’이라는 이름을 ‘익태 안’으로
바꿨다는 것뿐이었다.
베를린 필에 ‘에키타이 안’을 ‘익태 안’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한 음악평론가 박제성 씨에게 얘기를 들어봤다. 그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 역시 ‘기테이 손’이라는 일본 이름의 일본 선수로 기록돼 있던 것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수정했다는 뉴스를 보고, 안익태 선생 역시 뒤늦게나마 한국인 음악가라는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동기를 설명했다.
박제성 씨의 지적에 대해, 베를린 필은 “조사해
보니 에키타이 안이 한국인 익태 안이라는 것이 맞다. 그래서 수정했다.
하지만 다른 문헌들에 ‘에키타이 안’으로 기록돼
있는 것을 고려해 일본 이름은 괄호 안에 병기하겠다”는 요지의 답변을 보내왔다. 여기까지 취재하고 생각해봤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만으로 기사를
쓸 수 있을까. 아무래도 뭔가 빠져 있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세계적인
음악가 안익태의 숨겨진 삶을 찾아서(휴머니스트 출판사)’라는
저서에서 안익태의 유럽에서의 행적을 추적한 음악학자 이경분 교수(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에게 연락을 취했다. (송병욱 씨에게도 연락을 하고 싶어 그가 2006년 원고를 실었던
월간 객석의 관계자 등에게 문의했으나, 한국에 돌아오지 않은 것 같다는 답변만 받았다.) 먼저 통화를 하고 이교수의 연구실로 찾아갔다. 과연 안익태가 베를린
필을 지휘했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에키타이 안’을
‘익태 안’으로 바꾸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물어보고 싶었다.
이교수는 ‘안익태가 독일에서 확고하게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활동했으며, ‘에키타이 안’이라는 이름 속에 일본인의 정체성이 들어있다고 했다. 유럽에서 안익태의 연구를 시작했을 때, ‘안익태’로는 남아있는 자료가 없었고, 모든 자료들이 유명한 일본인 지휘자
혹은 작곡가로 ‘에키타이 안’만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인 에키타이 안’으로
기록된 인물이 ‘한국인 안익태’라는 것을 알리는 노력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한 일본인 지휘자들을 음악사에 기록할 때 ‘에키타이 안’을 제외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줬다.
*너무 길어져서 다음 글로 넘깁니다. SBS 뉴스웹사이트 취재파일로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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