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지난 삼일절 밤, 휴대전화에 찍힌 메시지에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해의만 씨가 돌아가셨습니다’. 해의만 선생은 3년 전 인터뷰를 위해 만난 국악학자였다. 기자로 일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이 중 대부분은 취재가 끝나면 다시 만날 일이 없고 곧 기억에서 희미해진다. 하지만 단순한 취재원이 아니라 특별한 인연으로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해의만 선생도 그런 사람이었다.     

해의만 선생의 본명은 알란 헤이먼, 미국 태생이다. 한국 전쟁에 위생병으로 참전해 강원도 지역 야전병원에서 근무하다가 자신의 운명을 바꿔놓은 국악을 처음 만났다. 빨치산이 밤새 교란 작전으로 불어댄 태평소와 꽹과리 소리에, 남들은 시끄러워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좋아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가 대학원에서 서양음악을 공부했지만, 한국에서 들었던 음악을 잊지 못해 1960년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그는 국악예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소리와 악기 연주를 두루 배웠다. 1963년 미국 아시아학회에서 한국 전통음악을 알렸고, 1964년 한국 전통예술단의 미국 공연을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70년대 국악단 유럽 순회공연에도 동행했으며, 영국 에든버러 대학 민속음악학자 존 리비의 한국 전통음악 녹음을 주선했다. 또 귀중한 국악 자료 수집과 연구, 국악 도서 영역에 큰 공을 세웠다.
 
선생은 한국에서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도 두었다. 1995년에 귀화해, 한국인 해의만이 되었다. 미국에서 바다 건너 한국으로 왔다고 해서 (바다 해)’ 자를 성으로 삼았다. 서울 해씨의 시조다. 선생의 장남 역시 국악을 공부하고 국립국악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나는 2011 4 12, 국립국악원 개원 60주년 기념식에서 선생을 처음 만났다. 나는 그 몇 달 전 국립국악원 관계자를 통해 인터뷰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집에서만 지낸다는 선생이 기념식에 참석해 은관문화훈장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국립국악원으로 달려갔다. 한복 차림의 선생은 거동이 많이 불편해 보였다. 선생은 경사스러운 날 나타난 취재기자를 박대하지 않았고, 후일 전화로 약속을 잡고 자택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한 달 넘게 선생의 전화를 기다린 끝에 인터뷰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2011 5 29일 일요일, 드디어 해의만 선생의 화곡동 자택을 찾아갔다. 전날 팔순 잔치를 했다는 선생은 여전히 한복 차림으로 우리 취재팀을 맞이했다. 집안에는 국악 관련 자료들이 가득했고, 선생은 눈이 나빠져 글자가 잘 안 보인다면서도 국악 도서를 영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선생은 인터뷰 내내 요즘 서양 음악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젊은 사람들이 한국 전통음악을 별로 안 좋아한다며 안타까워했다. 한국 전통음악의 매력을 설명하다 즉석에서 시조 한 대목을 나직이 불러주기도 했다. 외모는 분명히 서양사람인 선생과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인터뷰를 마쳤다면 선생은 나에게 그저 좀 색다른 취재원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선생은 그 날 자택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국립국악원이 경복궁에서 재현하는 세종조 회례연을 보러 갈 계획이었다. 몇 달 전부터 기다려온 공연이라며 선생은 채록을 위한 녹음기까지 챙겨놓았다. 나도 이 공연을 취재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부인이 선생의 외출을 만류했다. 초여름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날 외출하는 건 무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선생은 공부하려면 이 공연을 꼭 봐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부인은 만류하고, 선생은 꼭 가겠다고 하고……. 결국 내가 나섰다. 취재 차량으로 선생을 모시고 같이 공연에 다녀오겠다고. 그래서 나와 선생의 동반 외출이 시작되었다. 경복궁까지는 취재 차량을 타고 금방 도착했다. 하지만 문제는 주차장에서 공연이 열리는 근정전까지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근정전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선생은 허리가 거의 90도로 굽은 데다 기운이 없어 빨리 걷지 못했다.

나는 선생을 부축하고 같이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조심하세요, 턱이 있어요. 많이 덥지 않으세요? 이제 조금만 더 가시면 돼요. , 이제 다 왔어요. 보이시죠? 공연 벌써 시작했네요. 공연 보러 온 사람들도 많네요……

그 날 세종조 회례연이 어땠는지는 솔직히 잘 기억 나지 않는다. 다만 나와 선생 머리 위에 따갑게 내리쬐던 햇볕이, 국립국악원 공연 스탭으로 현장에서 일하던 선생의 아들이 우리를 보고 달려오던 모습이, 땡볕 아래 단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고 무대를 응시하던 선생의 형형한 눈빛이, 한복 차림의 서양 할아버지가 신기해 힐끔힐끔 쳐다보던 옆자리 어린이의 표정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폭염 때문에 야외에서 열린 공연은 예정보다 앞당겨 끝났다. 선생의 아들은 아버지가 이 공연을 정말 보고 싶어하셨어요. 제가 공연 다 녹화해서 나중에 드린다고 했는데도 결국 이렇게 나오셨네요했다. 녹음기를 끈 선생은 한숨을 쉬며 한국음악과 무용의 깊은 사상, 아직도 공부할 게 많아요라고 했다.

공연이 끝나자 선생은 눈에 띄게 피로한 기색이었다. 근정전에서 경복궁 주차장까지 다시 걸어 나오는 길은 아까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폭염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선생의 걸음은 더 느려졌다.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닌가 걱정스러워 선생을 부축한 내 팔이 아까부터 뻐근한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계속 이야기를 했고, 선생은 아무 대답 없이 나에게 점점 더 많이 의지해 왔다. 선생님, 조금만 더 가시면 돼요. 저기 차 보이시죠? 많이 더우시죠? 차만 타시면 시원해질 거예요......  

다행히 선생은 자택에 도착할 즈음 기력을 회복한 모습이었다. 집에서 저녁 먹고 가라는 선생의 권유를 사양하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 나는 어쩐지 가슴 한 구석이 아련해져서 인연에 대해 생각했다. 젊은 미국인 음악도 알란 헤이먼을 한국으로 이끌었던 인연. 국악과 사랑에 빠져 남은 생을 한국인으로 살게 한 인연……. 그러고 보니 내가 선생을 만나고 이렇게 함께 공연을 보게 된 것도 특별한 인연이 아닐지.   

선생을 취재하고 쓴 기사는 SBS 8시 뉴스에 나갔다. 나는 가끔 선생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선생과 만났던 그 인연이 작용했는지, 나는 지난해부터 해금을 배우기 시작했고 국악을 새롭게 만나게 되었다. 내가 그 동안 얼마나 서양 음악에만 길들여져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고, ‘젊은 사람들이 서양 음악만 좋아해서 걱정이라던 해의만 선생을 떠올리곤 했다.   

향년 83. 해의만 선생의 장례는 조촐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조문 기간이 짧아 문상도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를 추모하는 기사를 꼭 쓰고 싶었지만 지금은 문화부를 떠난 상태라 그러지도 못했다. 선생의 별세 소식은 몇몇 언론에 보도되기는 했지만, 금세 다른 기사들에 묻혀 버렸다.  

그러니 고인과 생전에 맺은 인연을 추억하며 뒤늦게 쓰는 이 글이 내 식의 추모 기사인지도 모르겠다. 해의만 선생과 함께 했던 일요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바라건대,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국악에 관심을 가져서 선생의 안타까움을 덜 수 있기를. 아니, 그저, 해의만 선생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기를


*전에도 해의만 선생 취재기를 이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다. 위 글은 해의만 선생 부고를 접하고 나서, 국립국악원에서 발간하는 격월간지 국악누리(2014. 5/6월호)에 기고한 글이다. 사진은 해의만 선생 자택에서 인터뷰할 때의 모습.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