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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생겨 부산에 다녀왔다. 휴가나 출장이 아니라, 그저 개인적인 일 때문이었다. 전날밤 휴가를 신청하고, 다음날 아침 6시 10분에 출발하는 KTX를 예약했다. 비행기를 타려 했더니 시내에서 너무 떨어져 있어 새벽에 출발하더라도 KTX가 낫겠다 싶었다. 그런데 아차, 전화기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5시에 알람을 맞춰놨는데 눈을 떠보니 6시. 알고 보니 휴대전화가 새벽 2시 7분에 멈춰져 있었다. 랙이 걸린 것이다. 부랴부랴 표를 취소하고 약간의 수수료를 물었다. 사실 6시 10분 예약했던 것은 7시 이후부터 아침 표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다시 보니 잔여좌석이 나왔다. 결국 7시에 KTX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특실은 좀 비싸지만 좌석간 간격이 넓어 편안했다. 내내 자면서 갔다. 

부산역에 도착하니 날이 따뜻하다. 확실히 남쪽이라 다르다. 11시 조금 전이었는데 일을 보기 전에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해야 했다. 마치 여행 온 사람처럼 '부산역 맛집'을 검색했다.'초량밀면'이라는 집을 여럿이 올려놓았다. 밀면과 만두를 메뉴로 정하고 음식점을 찾았다. 맛을 다 보려고 혼자 왕만두와 밀면을 시켰다. 두 메뉴 다 절반 좀 넘게 먹고는 남겼다. 배가 불렀다. 사실 그리 인상적인 맛은 아니었다. 물 밀면을 시켜놓고는 희한한 육수 맛에 약간 후회했다. 비빔 밀면 시킬 걸 하고. 어쨌든 부산의 음식 명물이라는 '밀면'을 찾아먹었으니 여행객 코스프레 잘 했다.  

일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약속은 오후 1시였다. 중간에 던킨 도너츠에 들어가 음료수를 마시며 시간을 약간 보냈다. 그리고 약속 장소에 갔다. 그러나.... 그 일은 잘 안 되었다. 내려간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고 실망만 안고 약속 장소를 나섰다. 사실은 일이 잘 되면 일을 끝내고 해운대 가서 바다를 잠깐 보고 갈 생각이었다. 2000년대 초반에 출장으로 왔던 이후 처음 부산을 방문하는 것이었으니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편도 저녁 때로 예약해 놓았다. 그런데 일이 잘 안 되고 나니 기운이 나지 않았다. 

실망스런 목소리로 동생에게 전화했더니 '그래도 거기까지 갔는데 해운대나 보고 와.' 하던 끝에 '아참, 완당집에 갈 수 있으면 가서 좀 사오든지' 한다. 엄마 아빠가 며칠 전에 완당 먹고 싶다고 하셨단다. 두 분 다 어린 시절 부산에서 사셨기에 완당이란 음식에 대한 추억이 있겠다 싶었다. 나는 완당을 10년 전 출장 왔을 때 먹은 적이 있다. 얇은 종잇장 같은 만두를 쉴새없이 옆에서 빚는 모습이 재미있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 일단 완당이나 사야겠다!

완당집은 부산국제영화제 거리가 있는 남포동에 있다고 인터넷이 가르쳐줬다. 18번 완당집. 내가 예전에도 갔던 집인 듯하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찾아갔다. 남포동은 명동처럼 번화가였고 외국인들이 굉장히 많았다. 부산도 국제 도시구나 생각했다. 약간 헤메다가 완당집을 찾았다. 포장해 간다고 하니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온다. 부모님이 어린 시절 부산에 사셔서 완당 드시고 싶어 하신다고 했더니 웃으면서 '그런 분들 많아요' 한다. 서울에서 퀵으로 배달시켜 먹는 집도 있단다. 30인분 정도 주문하면 서울까지 부쳐준다 한다. 배달비가 만만치 않게 들지만 추억의 맛을 그리워하는 부모님을 위해 이렇게 주문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나는 6인분을 주문했다. 우리 식구들도 먹고, 친정 부모님께도 드리려니 그 정도는 주문해야 할 듯했다.

3인분씩 나눠 육수를 페트병에 담아주고 완당과 야채는 따로 포장해 줬다. 양 손에 들고 음식점을 나서는데 꽤 묵직하다. 내려갈 때 가져간 배낭 메고, 양쪽에 완당 포장한 것 들고 지하철역까지 다시 걸어가는데 꽤 힘들었다. 해운대에 갈지 말지는 완당을 사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려 했는데 가고 싶은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 짐을 들고 어떻게 해운대에 간단 말인가. 어딘가 코인 라커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잠깐 들기는 했지만 찾는 것도 귀찮은 일일 것 같아 금방 포기해 버렸다. 

결국 나는 그냥 부산역으로 향했다. 오후 3시에 내려가는 기차편으로 바꿨다. 올라가는 길에도 내내 졸다 깨다 했다. 부산에서 많이 한 일도 없는데 피곤이 몰려왔다. 5시 40분 좀 넘어 서울역에 도착했다. 내려서 집에 가는 지하철을 탈까 하다가 역시 양손에 든 완당이 너무 무겁게 느껴져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 타고 집에 가는 와중에 아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어디냐는 말에 '부산 갔다오는 길'이라고 했다. '부산을 무슨 일로?' 하기에 '완당 사려고 갔다왔다'고 대답해 버렸다. 맞다. 난 완당 사러 부산 다녀왔다. KTX 타고. 

저녁 때 친정에 가서 완당을 저녁으로 차렸다. 아빠는 속이 안 좋아서 그 완당도 거의 드시지 못했다. 그리고는 옛날에는 완당이 정말 종잇장처럼 얇았는데 왜 이렇게 두꺼워졌냐고 투덜거리시면서도 국물은 시원하다며 좀 드셨다. 그리고 갑자기 완당집에 전화해 보라고 하셨다. 왜요? 했더니 완당집 사장이 초등학교 동창일 거라며, 한 번 통화해 보고 싶으시단다. 초등학교 동창이라도 그동안 연락했던 것도 아니고, 갑자기 지금 전화해서 뭐 하시려고, 했더니, 그래도 해 보라고 야단이셨다. 성함은 아세요? 했더니 기억하고 계셨다. 18번 완당집이 확실하단다. 

완당집에서 혹시나 나도 나중에 30인분을 서울까지 배달시켜 먹을 일이 있을까 싶어 가져온 명함이 있어 전화를 했다. 바쁘신데 죄송하다고, 혹시 사장님 성함이 ***냐고 물었더니 아니란다. 혹시 중간에 주인이 바뀌었나 물었더니 2대째 하고 있단다. 아버지 초등학교 동창이 완당집을 하신다고, 알아보라고 해서 전화드린 거라 했더니 '그럼 여기가 아니라 다른 집인가 봐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18번 완당집이 또 있어요? ' 했더니 또 있단다. 알고 보니 또 있다는 그 집은 그냥 18번 완당집이 아니라 '원조 18번 완당집'이었다. 

이 집이 아니라는데요, 했더니 아빠는 흥미가 없어졌다는 표정으로 알았다, 하셨다. 그리고는 또 '완당이 옛날 같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아이들은 처음 먹어보는 완당이 맛있다며 잘 먹었다. 완당 사러 부산 다녀온 하루가 이렇게 지나갔다. 피곤하고 허망한 하루였지만, 그나마 완당이라도 사왔으니 다행이다 싶다.  (20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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