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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손열음을 지난 4일 만나 인터뷰했다. 기사를 쓰기 위한 것이었지만, 수다 떠는 기분으로, 편하게 대화를 나눴다. 손열음은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여러 차례 봐온 연주자다. 예술가의 성장을 보면서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걸 실감한다. 손열음의 ‘첫 리사이틀’이라고 적힌 보도자료를 받아봤을 때, 정말 처음인가, 갸우뚱했었다. 손열음이 예술의전당에서 얼마나 여러 번 연주했는데, 처음이 맞나?

“진짜 여러 분들이 정말 처음이냐고 많이 물어보세요. 리사이틀로는 처음이에요. 지금까지는 다 협연이었죠. 조인트 리사이틀에서 10분 정도 독주곡을 연주한 적이 있긴 한데, 이렇게 리사이틀은 처음이에요.”

사실 손열음은 예술의전당이 아닌 다른 공연장에서는 독주회를 한 적이 있다. 왜 ‘예술의전당 리사이틀’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물론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 국내에서는 손꼽히는 클래식 음악 전용 공연장이라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직접 답을 듣고 싶었다.

“저한테 예술의 전당은 가장 각별한 무대에요. 거기서부터 제가 자라왔고, 저의 성장을 거기서 많이 지켜보셨고 해서, 저한테는 항상 조금 떨리는 무대인데 독주회를 하게 돼서 정말 설레고요. 좋습니다.”

‘예술의전당에서부터 자라왔다’는 표현이 귀에 들어왔다. 손열음이 처음 예술의전당에서 연주한 것은 언제였을까.

“2000년 11월이었던 거 같아요. 제가 중학교 2학년이었고 서울시립교향악단하고 협연을 했어요. (지휘는?) 강석희 선생님. 그때 베버의 ‘콘체르토 피스’라는 곡하고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1번, 두 곡을 같이 했어요.”

13년 전의 손열음을 상상해 본다. 나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레퍼토리를 듣기만 해도 흥미롭다. 대담한 프로그램이라는 느낌이 든다. 당시의 손열음은 현재의 손열음과 많이 달랐을까.

“벌써 십 년도 더 됐으니까,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갔어요. 정말 그 동안 솔직히 저는 다 바뀐 것 같아요. 저 자신도 바뀌었고 제 음악도 변했고 저를 둘러싼 환경도 많이 변했기 때문에 그 때를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면 조금 더 특별한 무대가 될 거 같아요.
어렸을 때는 그냥 제가 잘하는 거니까, 재밌으니까, 이렇게 별 생각 없이 그냥 생기는 대로 했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욕심도 생기고 더 잘 해보자는 생각도 들고 그랬죠. 그래서 열심히 공부도 많이 했고요, 연구도 나름대로 많이 해서 제 음악이 성숙하도록 많이 노력을 했기 때문에 좋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번 리사이틀의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역시 흥미롭다. 프랑스 작곡가인 알캉, 러시아의 작곡가 카푸스틴은 평소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재즈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카푸스틴은 초절기교를 요구하는 고난이도 곡으로 유명하다.

쇼팽(1810-1849) 발라드 2번 F장조 op. 38 / Ballade no. 2 in F major, op. 38
마주르카 a단조 op. 68-2 / Mazurka in A minor, op. 68 no. 2
마주르카 F단조 op. 68-4 / Mazurka in F minor, op. 68 no. 4
왈츠 F장조 op. 34-1 / Waltz in F major, op. 34 no. 1
왈츠 G flat 장조 op. 70-1 / Waltz in G flat major, op. 70 no. 1
스케르초 2번 B flat 단조 op. 31 / Scherzo no. 2 in B flat minor, op. 31

샤를-발랑탱 알캉(1813-1888) 이솝 우화 op. 39 no.12
Charles-Valentin Alkan Le festin d'Esope, variations for piano in E minor
(Études dans tous les tons mineurs No. 12), Op. 39/12

프로코피에프(1891-1953) 피아노 소나타 8번 B flat장조 op. 84
S. Prokofiev Sonata no. 8 in B flat major, op. 84
I. Andante dolce
II. Andante sognando
III. Vivace

니콜라이 카푸스틴(b.1937) 8개의 연주회용 연습곡
N. Kapustin Eight Concert Etudes op. 40
VI. Pastral
VII. Intermezzo
VIII. Final

“정말 많이 신경 쓴 프로그램이고요. 왜냐하면 제가 다른 기획 음악회에서 많이 연주하긴 했지만,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공연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만든 건 너무 오랜만이라서요.
프로그램에 대해서 제일 고민 많이 했는데, 다양한 것들을 많이 보여드리고자 했고, 대비되는 색깔을 많이 집어넣은 의도가 있었죠. 프로코피에프하고 쇼팽처럼, 완전히 색다른 작곡가들을 안배했고, 알캉이나 카푸스틴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도 훌륭한 작품들이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손열음, 하면 아무래도 콩쿠르 수상 경력이 따라다니는 연주자다. 수많은 콩쿠르에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지만, 2009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준우승, 그리고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준우승 경력이 대표적이다. 손열음에게 콩쿠르 출전은 어떤 의미일까. 

“특히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같은 경우는 저한테 너무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큰 사건이기도 했지만, 저한테는 개인적으로 너무 좋은 추억이었고요. 그 때 무대에 서는 게 너무 행복해서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였기 때문에 지금도 기억에 많이 남아요. 제가 콩쿠르를 많이 나갔는데, 당시엔 힘들고 스트레스도 받고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저한테 그런 기회가 주어진 것만도 감사했던 거 같아요.

콩쿠르는 치열한 경쟁의 현장이기도 한데, 즐기면서 행복하게 연주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손열음은 어려서부터 혼자 배낭 메고 해외 콩쿠르에 출전하면서 '쫄지 않는 아이'로 유명했다고 한다.

“저도 모든 콩쿠르에서 그랬던 건 아닌데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는 유달리 그랬어요. 저 말고도 다른 피아니스트들도 많이 그랬을 텐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하면, 뭔가 환상이 있잖아요. 저도 어렸을 때부터 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이렇게 생각하고, 그 무대도 항상 꿈같이 생각하고 그랬는데 그게 현실이 됐고, 좋은 관중들 앞에서 연주하니까 경쟁하는 게 아니라 정말 연주회 같았고 너무나 재미있었어요.”

한동안 손열음을 따라다녔던 또 하나의 꼬리표는 바로 ‘국내파’라는 말이다. 손열음은 한국예술종합학교까지 졸업하고 지금은 독일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국내파’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제가 국내파였던 건 확실하고요. 왜냐면 스무 살 때까지 한국에 있었으니까요. 저는 다른 교육도 한국에서 너무 잘 받아서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무엇보다 감사하는 건 예술가로서 저의 뿌리가 확실하게 있다는 거예요. 정체성에 혼란이 있을 때 유학을 가면 아무래도 혼동이 오잖아요. 그런데 저한테는 확실히 이게 내 나라고 내가 이런 사람이고 하는 정체성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아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나는 클래식 음악은 서양 문화이니만큼, 빨리 본토에서 서양 문화를 접하는 게 좋다는 얘기를 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단순히 곡을 기교적으로 소화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문화를 빨리 ‘체득’해야 제대로 된 곡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 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하고요.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기 때문에,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이 있고 그런 거죠. 그런데 사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국경도 거의 없고, 지구촌화 됐기 때문에 소통도 가능하고 충분히 원한다면 단기간에 경험을 쌓고 올 수 있고, 그런 게 가능하잖아요. 아주 어린 나이에 자신의 의지가 아니고 타인의 의지 때문에 유학을 가려고 하는 건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요즘은 정말 인터넷으로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시대다. 안방에 앉아서 외국에 있는 연주자의 공연 실황도 유튜브로 볼 수 있다. 실제로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유튜브를 통해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경우가 종종 등장하고 있다. 손열음에게 유튜브 같은 매체를 활용해 더 많은 관객과 접하고 싶은 계획은 없는지 물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크게 생각하는 건 없어요. 왜냐면 유튜브는 정말 인스턴트한 매체잖아요.  사람들이 3분 보고 좋네, 안 좋네 생각하는 거고. 그런데 클래식 음악은 그거하고는 조금 다른 거 같아요. 좀더 깊게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듣고, 다시 들었을 때 느낌이 다르고 그런 음악이잖아요. 유튜브는 너무 빠른 속도에 맞춰진 매체가 아닌가 생각해요. 물론 장점도 있겠지만,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면 클래식 음악은 ‘빠른 매체’에 어울리지 않는 ‘느린 예술’인지도 모른다. 아, 이건 특정 곡의 물리적인 ‘연주 속도’와는 관련 없는 얘기다. 손열음은 느리고 아날로그 적인 예술이 자신의 취향에 맞는다고 했다.

손열음은 일간지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쓰는, ‘글 쓰는 음악가’이기도 하다. 손열음의 글을 보면 다양한 관심 분야와 지식의 폭에 놀랄 때가 있다. 글 쓰기 또한 창작의 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면, 피아노를 치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손열음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사실 제가 하는 음악은 이미 쓰인 곡을 제가 재해석하는 거잖아요, 순수 창작 기반의 예술이라고 하긴 어렵죠. 그런데 글은 새로 창작해야 하는 거니까 힘든 게 많아요. 저도 처음에는 술술 썼었는데, 요즘은 소재 찾느라 고민도 많이 하죠. 그런데, 음악은 정말 추상적인 예술이잖아요. 글은 그걸 풀어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차이점이 재미있어요. 보통은 음악에 관한 글을 많이 쓰는데, 음악을 객관화해서 풀어나간다는 게 나름 의미도 있고 재미있어요.”

요즘 ‘클래식 음악의 위기’라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손열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저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왜냐면 제 생각에 클래식 음악이 없어질 거 같지는 않거든요, 클래식 음악이 가진 가능성이 정말 크기 때문에요.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언제까지고 좋아할 거 같아요. 그리고 사실 클래식 음악 팬들도 점점 늘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진정으로 이걸 좋아하고, 완전히 매료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가 중요하죠. 저는 관객들의 수보다는 얼마나 진정으로 좋아하는 관객들이 많은가가 중요한 거 같아요. 그리고 또 흐름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지금 조금 인기가 떨어진다고 해도 다시 언젠가는 회복될 것도 같고."

손열음은 클래식 음악 말고 다른 음악 장르도 좋아할까.

“저는 음악은 다 좋아해요. 재즈도 듣고, 록음악 같은 것도 좋아하고, 가끔 국악도 듣고요. 다 좋아해요.

그럼 다른 장르와 크로스오버 작업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을까.
“아직은 없어요. 왜냐면 제가 '진짜 멋있다, 해보고 싶다' 했던 모델은 없었던 거 같아요. 그런 모델이 생기면 따라서 해 보고 싶어요.”

음악가로서 더 성취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물었다.

“저는 진짜 그냥 잘 치고 싶어요. 아직은 시작하는 단계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준비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하고요. 이제부터 제 음악성을 쌓아나가는 단계인 거 같아요. 정말 끝까지 잘하고 싶은 게 목표고요. 또 가능하다면 제 후배들이나 다음 세대들한테도 도움이 되는 음악가가 됐으면 좋겠어요.”

‘잘 친다’는 게 뭘까.

“하하. 저도 모르겠어요. 그걸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어요. 정말 좋은 음악을 하고 싶어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손열음에게, 그렇게 잘 치고, 닮고 싶은 음악가는 누구일까.

“아, 너무 많아요. 대표적으로 여기 오다가 차 안에서 베노 모이세비치라고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연주를 들었거든요. 20세기 초 중반 사람인데, 정말 좋더라고요. 저는 옛날 사람들을 좋아해요. 한 마디로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판타지라고 해야 되나, 그런 게 더 깊은 거 같아요.
요즘은 어떻게 하느냐에 중점을 둔다고 한다면, 그 당시에는 무엇을 하느냐에 중점을 둔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런 환상성을 정말 동경해요. 어떻게 해석하느냐, 이 부분을 어떻게 연주하나, 이런 건 포장에 불과하죠. 저는 내용물에 더 관심이 많은데, 요즘 흐름과는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해요.”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다르다는 걸까.

“아무래도 시대상이 있잖아요, 시대정신이라는 것도 있고. 시대가 획일화되다 보니까 문화도 획일화되고, 다원화되는 것 같으면서 동시에 하나처럼 되니까. 아주 개인적인, 고유한 건 나오기 힘든 시대가 아닌가 싶어요. (손열음 고유의 것을 찾아가는 과정?) 네, 그게 뭔지 여기서 콕 집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손열음만의 색깔을 찾아가고 싶어요.” 

인터뷰에 배당된 시간이 짧아서 더 이상 질문을 던질 형편은 안 되었다. 하지만 이 인터뷰가 손열음이라는 피아니스트가 어떤 음악가인지 약간의 힌트라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손열음의 첫 리사이틀은 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이 글은 SBS 뉴스 웹사이트에 취재파일로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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