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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가 건조한 요즘, 화재 소식이 많습니다. 불조심이야 어디서나 해야 하는 것이지만, 특히 공연장은 한정된 공간 안에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인다는 장소의 속성상 한번 화재가 나면 그 피해가 굉장히 커질 수 있는 곳이라 더욱 화재에 민감합니다.


공연장에서는 무대 조명이나 연출상 불을 사용하다가 화재가 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17세기 18세기 유럽의 오페라극장들은 무대와 객석 조명으로 촛불을 사용했고, 목조 건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화재로 소실됐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주요 오페라극장들은 19세기나 20세기 들어서 다시 지어진 건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역사상 최악의 공연장 화재는 1903년 12월 30일 미국 시카고 Iroquois극장에서 발생했습니다. 뮤지컬 공연 도중 무대 커튼에 불이 붙었고, 곧 불길은 커져서 무대장치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전기도 나갔습니다. 관객들은 놀라 출구를 찾아 뛰쳐나갔지만, 문은 공짜 손님을 막으려던 극장 측이 잠가놓은 까닭에 제대로 열리지 않았고, 아비규환 속에서 관객들은 대부분 압사하거나  질식사했습니다. 불은 15분만에 진화됐지만 인명 피해는 600명이 넘었습니다.  이 대참사 이후 비상구 표시등 의무화 같은 극장 내 소방 안전조치가 마련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는 1972년의 서울 시민회관 화재가 공연장 ‘대화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1972년 12월 2일 10대 가수 청백전 공연이 끝나고 관객이 공연장을 빠져나가고 있던 중 무대 쪽에서 불이 시작됐습니다. 무대조명장치의 전기 과열로 합선이 돼 일어난 불이었습니다. 불길이 점점 커지면서 관객들이 빠져나가기 위해 한꺼번에 출구 쪽으로 몰리면서 희생자가 늘었습니다. 51명이 숨지고 76명이 다친 참사였습니다. 화재로 시민회관이 전소한 그 자리에 세종문화회관이 다시 지어졌습니다. 

국내 대표적인 공연장으로 꼽히는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도 2007년 12월 불이 난 적이 있습니다. 아, 놀라지 마세요. 인명피해는 없었습니다. 국립오페라단이 오페라 ‘라보엠’을 공연하던 도중 발생한 화재였습니다. ‘라보엠’ 1막에서는 불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장작 살 돈조차 없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작업하던 작품을 난로에 넣고 불을 피웁니다. 또 남녀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도 촛불이 중요한 모티브가 되지요. (아래 사진은 지난해 국립오페라단이 공연한 '라보엠' 중의 한 장면입니다. 이 때는 전기조명을 사용했어요.)

당시 화재는 ‘라보엠’ 1막에서 출연자가 성냥불을 켜서 난롯불 피우는 장면에서 비롯됐습니다. 불길은 20여 분만에 진화됐습니다. 방화벽이 내려졌고 관객들이 대피해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재산 피해액은 194억 원에 이르렀습니다. 이 화재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은 1년여 동안 문을 닫고 개 보수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2013년 1월. 이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은 번듯하게 다시 문을 연 지 오래고, 그 동안 국립오페라단은 단장이 두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그런데도 국립오페라단은 아직도 화재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5년 전 화재의 책임을 지고 무려 74억 원을 보험사에 물어줘야 하는 상황이 됐거든요. 게다가 이 돈은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예술의전당은 당시 삼성화재에 화재보험을 들고 있었습니다. 삼성화재는 2008년 예술의전당에 화재보험금 100억 원을 지급하고, 국립오페라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오페라극장을 대관해 공연을 주최했던 오페라단이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해 불이 났으니 예술의전당에 지급한 수리비를 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오페라단은 “대관 계약상 예술의전당과 공연을 ‘공동주최’한 것’이라며 맞섰습니다.

오랜 법정 공방 끝에 대법원은 지난해 ‘오페라단이 삼성화재에 수리비의 70%인 48억 원을 지급하라’는 확정 판결을 내렸습니다. 배상금 원금은 48억 원이지만 법정 공방이 길어지면서 연이율 20%로 이자가 붙어 국립오페라단이 삼성화재에 물어줘야 할 돈은 현재 74억 원이나 됩니다. 이자만 26억 원입니다. 지금도 이자는 하루에 260여 만 원씩 불어나고 있습니다.

74억 원이면 국립오페라단의 지난해 1년 예산 69억 원보다도 많은 돈입니다. 국립오페라단은 매년 국고 보조를 받아 꾸려나가는 단체입니다. 매년 예산의 75% 정도가 공연 사업비로 쓰이고 나머지가 인건비 등의 경상비로 지출됩니다. 배상금을 지급할 ‘능력’이 없습니다. 배상금을 한꺼번에 내고 나면 국립오페라단은 말 그대로 문 닫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지난해 배상금 지급 판결을 받고도 국립오페라단은 당장 갚을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삼성화재는 돈을 받기 위해 국립오페라단의 재산상황에 대해 ‘실사’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국립오페라단은 자체 부동산 같은 소유자산이 없고, 하다못해 건물 임대 보증금조차 없습니다. ‘국립오페라단인데 어떻게 이렇게 가난할 수가 있느냐’는 말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국립오페라단은 지난해 올렸던 공연들이 좋은 평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이전보다 유료 관객 점유율도 크게 높아져, 베르디와 바그너 탄생 200주년인 올해는 공연 라인업을 좀 더 공격적으로 짰습니다. 베르디의 ‘팔스타프’, 바그너의 ‘파르지팔’ 등 국내에서 보기 힘들었던 공연들이 포함돼 있어 오페라 팬들의 관심이 높습니다.

그런데, 배상금을 지급하면 국립오페라단이 올해 예정된 공연들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국립오페라단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 예술단체이니만큼, 핵심 사업인 공연 사업에는 지장이 없는 선에서 배상금을 장기 분할 납부할 수 있는 방안을 협상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공연사업을 통해 얻은 티켓 판매금을 배상금을 내는 데 사용해, 몇 년에 걸쳐 갚겠다는 것입니다.

국립오페라단과 삼성화재는 현재 계속 ‘비공식협상’ 중입니다. 삼성화재 측에서도 무리하게 배상금을 받아내려 하다가는 국립오페라단 공연 사업이 ‘올 스톱’ 되면서 부작용이 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자신들도 역시 재보험사에 낼 보험료가 있어서 빨리 배상금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문화계에서는 삼성화재가 대승적으로 사태 해결 방안을 찾아 국내 문화예술 발전에 이바지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배상금 전부나 일부를  국립오페라단에 협찬 형식으로 탕감해주면 좋겠다는 것이지요. 삼성이 해외에서 볼쇼이 극장 같은 유명 오페라극장에 거액을 지원한 사례도 있다면서, 그룹 차원에서 결단을 내려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적어도 현재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삼성화재도, 국립오페라단도, 더 이상 이 문제를 오래 끌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라보엠’에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는 국립오페라단은 지난해에야 화재 이후 처음으로 ‘라보엠’을 다시 공연했습니다. 그리고 ‘라보엠’에서 난롯불 피우는 장면은 전기조명을 사용했습니다. 연출가는 실제 성냥불을 사용하고 싶어했지만, 한 번 불에 덴 국립오페라단은 현실감이 떨어지더라도 불을 사용하지 않는 편을 택했습니다. (지난해 프랑스 오랑주 페스티벌의 ‘라보엠’ 내한 프로덕션에서는 성냥불이 등장했습니다. 아래 사진)

예술의전당에도 오페라극장 화재는 아픈 기억입니다. 예술의전당은 이후 화재예방 시스템을 강화했습니다. 물론 방화벽이나 소화설비 등 기본적인 것은 화재 이전에도 다 갖췄던 시스템이지만, 더욱 철저하게 했다는 겁니다. 안전 관리사를 새로 채용했고, 무대 곳곳에 비치된 소화기 숫자를 18개로 늘렸습니다. 소화전 위치도 무대 양쪽으로 더 가깝게 옮겼습니다. 또 수화기만 들면 곧바로 가까운 서초소방서와 연결되는 직통전화를 새로 설치했습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는 이번 주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가 막을 올렸습니다. 이 뮤지컬에는 하이드가 등장하며 불꽃이 타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지킬 앤 하이드’는 이전에도 여러 극장에서 수없이 공연됐지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는 화재 이후 처음 공연되는 겁니다. 이 때문에 예술의전당은 한층 더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평소에도 그렇게 하지만, 모든 무대 반입 세트에는 방염 처리를 하도록 했고, 불을 사용하는 장면이 공연될 때는 안전관리사를 무대 바로 옆에 대기시킬 예정입니다.

제가 국립오페라단이 거액의 화재 손해배상금을 물게 된 사연을 8시뉴스에서 보도했더니, 뉴욕 특파원 이현식 기자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는 공연에서 불을 정말 많이 쓰는데…보험을 많이 들어놓은 모양’이라고 하더라고요. 공연의 연출상 불이 필요한 장면이 있으면 불을 쓰는 게 맞습니다. 다만 ‘만약의 경우’에 철저히 대비해야겠지요. 아마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는 보험도 당연히 들었겠지만, 화재 예방 시스템을 철저히 갖추고 있을 겁니다. 

장황하게 긴 글을 썼지만, 결론은 간단합니다. 한 번 불 나면 그 여파는 크고 오래 갑니다. 그러니까 자나깨나 불조심. 특히나 공연장에선 더더욱!

*SBS 뉴스 웹사이트에 취재파일로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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