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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금요일(1월 25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서울시향의 그레이트 시리즈-바그너 공연이 갑작스럽게 취소됐습니다. 이유는 지휘자 정명훈 씨의 갑작스러운 허리 통증. 공연 직전인 저녁 6시쯤에 취소된 것이라 상황이 굉장히 급박했지요. 정명훈 씨가 어떻게든 공연을 하는 방향으로 해보겠다며 막판까지 취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도저히 서 있을 수조차 없는 상황이라 눈물을 머금고 취소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멘붕’ 사태였습니다. ‘불금(불타는 금요일)’에 공연 관람 스케줄을 잡아 놨다가 갑자기 취소되니 관객들은 얼마나 허탈했을까요? 공연이 취소된 것을 모르고 예술의전당까지 갔다가 현장에서 알게 된 일부 관객들은 항의도 많이 했다는데, 그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공연 취소 결정을 내려야 했던 정명훈 씨도 그렇고, 서울시향 단원들은 그 동안 열심히 리허설하며 준비해온 공연이 직전에 이렇게 취소되니 얼마나 속상했을까요?

저도 무척 허탈하고 속상했는데요, 단순히 관객으로서 허탈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 공연 리허설을 취재하고 정명훈 씨를 인터뷰해 바로 금요일 당일 8시 뉴스에 관련 기사를 낼 예정이었는데, 공연이 취소되면서 기사까지 방영이 취소돼 버렸거든요. 이런 경우는 정말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한창 리포트 영상 편집에 열을 올리다가 공연 취소 연락을 받으니 어찌나 맥 빠지고 허탈하던지요. 

제 기사는 바그너 탄생 200주년과 관련된 내용이었어요. 바그너는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비해 그 동안 한국에서는 공연장에서 접하기 어려운 작곡가였는데, 바그너 탄생 200주년이라는 계기를 맞아 한국에서도 다양한 공연이 예정돼 있으며, 이는 한국 음악계에 바그너를 연주하고 들을 만한 여건이 조성됐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 더 나아가 한국 음악계에 ‘다양성’이 그만큼 더 확보됐다는 의미가 있다는 내용을 담았었습니다.

텔레비전 기사는 길이는 짧아서 몇 문장 못 들어가지만, 화면이라는 강력한 수단을 갖고 있습니다. 바그너라는 작곡가 얘기를 어떻게 하면 친근하고 어렵지 않게 풀어갈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결혼행진곡’은 바그너 오페라 ‘로엔그린’ 중에 나오는 곡이고,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폭격장면에는 ‘발퀴레’의 음악이 삽입됐다는 내용도 리포트에 포함시켰었지요. 

서울시향의 취소된 공연은 사실 올해의 ‘바그너 공연들’의 시발점이 되는 중요한 무대였지요. 서울시향은 이 날 모든 프로그램을 바그너로 구성했는데요. 오페라 ‘탄호이저’나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은 그래도 가끔 다른 공연에서 들을 수 있는 곡이었지만,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의 관현악 하이라이트는 국내에서는 전혀 공연된 적이 없는 레퍼토리였습니다.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으로 이어지는 방대한 4부작을 관현악으로 한 시간에 압축했는데, 연습하는 걸 보니 과연 쉽지 않은 곡이지만, 정말 좋더라고요. 

공연 예정일 전날이었던 목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결코 쉽지 않았던 리허설 과정을 지켜보고 나서 .정명훈 씨를 인터뷰했습니다. 바그너 탄생 200주년에 관련된 이야기를 주로 했는데요, 정명훈 씨는 그 동안 국내에서는 아무도 연주하지 못했던 ‘니벨룽의 반지’ 관현악 하이라이트를 처음 연주하게 되는 것에 대해 뿌듯해 했습니다. (2005년에 게르기예프가 지휘한 마린스키 극장판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내한공연이 열린 적은 있습니다) 사실 인터뷰 당시에도 정명훈 씨는 ‘환갑이 돼서 그런가 허리가 아파요’ 하면서 허리 통증 얘기를 잠깐 하기는 했었는데, 그 허리 통증이 공연을 못하게 될 정도로 심해지리라고는 당시엔 아무도 생각지 못했었지요. (위 사진은 목요일 인터뷰 후에 찍은 것입니다. 이 때만 해도 분위기 좋았어요.)

사실 바그너 곡들은 과거에 비하면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에서도 연주가 잦아진 게 사실입니다. 지난해에도 굵직한 바그너 공연들이 있었죠. 경기 필하모닉이 ‘합창과 함께 하는 바그너 갈라 콘서트’로 좋은 평가를 받았고요, 서울시향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오페라 콘체르탄테로 선보였습니다. 공연을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대구 오페라 페스티벌에서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공연되었다고 하고요.

바그너의 오페라는 오케스트라가 중심에 있습니다. 이탈리아 오페라는 많은 경우 성악이 주가 되고 오케스트라는 반주 역할을 하지만, 바그너의 오페라에서는 화려하고 웅대한 관현악이 돋보입니다. 자연 오케스트라 편성도 방대하고 구성이 복잡합니다. 게다가 공연 시간도 굉장히 길고, 상대적으로 생소한 독일 오페라인데다, 웅장한 관현악을 뚫고 소리를 내야 하는 성악가 입장에서도 어려운 작품입니다. 바그너는 섣불리 연주할 수 없는 작품이었던 거죠.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국내 오케스트라들이 규모가 큰 후기 낭만주의 교향곡을 많이 연주하면서 바그너의 작품도 연주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거죠. 음악 칼럼니스트 유정우 씨는 특히 요즘 말러의 인기가 높아져 말러 교향곡들이 많이 연주되는데, 말러 교향곡의 관현악법 근간이 되는 것이 바그너의 오케스트레이션이기 때문에 바그너의 곡도 예전보다 부담 없이 연주할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말러의 교향곡 같은 복잡한 곡을 친숙하게 느끼게 되면서 바그너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초 체력이 갖춰진 셈이고요. 또 연광철, 사무엘 윤 등 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국인 바그너 전문 가수들이 많아진 것도 한국 관객들이 바그너를 좀 더 친숙하게 느끼게 한 요인이 됐습니다.

올해의 주요 바그너 공연으로는 취소된 서울시향의 연주회 외에도 한국 바그너 협회가 주최하는 바그너 생일 축하 콘서트가 있습니다. 5월 22일 바그너의 생일 날 KBS 교향악단과 해외 바그너 전문가수들이 ‘니벨룽의 반지’ 중 ‘발퀴레’ 1막을 콘체르탄테로 연주할 예정입니다. 또 가을에는 국립오페라단이 바그너의 마지막 오페라 ‘파르지팔’을 국내 초연하게 되지요. ‘파르지팔’의 구르네만츠 역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연광철 씨가 출연할 예정입니다. 국립오페라단은 앞으로도 바그너 작품을 꾸준히 무대에 올릴 것이라고 합니다. 서울시향도 장기적으로 ‘니벨룽의 반지’ 오페라 콘체르탄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바그너 바람은 올해만 반짝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국내 음악계가 ‘바그너 탄생 200주년’을 이렇게 전세계와 함께 기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그만큼 우리 음악계도 다양성이 존중 받는 시대가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게 유정우 씨의 얘깁니다. 그 동안 바그너는 소수의 열혈 ‘바그네리안’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경향도 없지 않았습니다. 국내에서 자주 연주되지 않았으니까 바그너는 더욱 ‘특별한’ 레퍼토리가 돼 버렸고 일부 폐쇄적인 동아리 사람들이 자기들끼리만 듣는 음악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습니다. 바그너 음악만 연주하는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선택된’ 극소수만이 갈 수 있는 축제로 알려졌던 것도 그런 이미지에 한 몫 했죠. 그래서 클래식 음악 좀 듣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바그너를 생소하게 느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해외의 바그너 작품 공연 실황을 DVD나 극장 상영 등으로 예전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데다, 국내 단체의 바그너 연주들도 늘어나고 있어서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자체도 예전의 폐쇄적인 예약 시스템을 바꿨다고 합니다. 이런 가운데 바그너 탄생 200주년은 바그너의 음악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몇몇 한정된 작곡가의 레퍼토리에 머무르지 않고 바그너의 작품 같은 다양한 곡들을 연주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분위기가 더욱 무르익은 겁니다. 

이번 기사 쓰는 과정에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가 대하 드라마 같은 오페라다, ‘절대 반지’가 나오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도 여기서 영향을 받은 거다, 이런 얘기들을 한참 했더니, 기사 데스크를 본 부장도 바그너 오페라 한 번 보고 싶어진다 하더라고요. 제가 ‘낚시’에 성공한 셈인가요? 그런데 정작 그러면서 쓴 기사는 나가지 못했으니 이것 참…… 서울시향이 조만간 똑 같은 프로그램으로 다시 공연을 마련한다면야 이 기사가 살아날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공연장 대관이나 정명훈 씨 연주 일정 맞추는 게 아마 만만치는 않을 겁니다. (서울시향 관계자 여러분! 그래도 꼭 해주세요~)

공연이 킬(kill) 되고, 덩달아 기사도 킬 된 아쉬움이 커서 이 얘기 저 얘기 해봤습니다. ('킬'은  '취소' '없어짐'을 뜻하는, 기자들이 많이 쓰는 말입니다.) 다음 번 글에서는 정명훈 씨와 했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하기로 하지요. 혹시 이 인터뷰가 영영 못 나가게 되면 너무 아깝잖아요. 그럼 또 뵙겠습니다.

*SBS 뉴스웹사이트에 취재파일로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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