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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의  '왕자 호동' 프레스 리허설을 보고 왔다. 김용걸 씨가 호동 왕자로, 김리회 씨가 낙랑 공주로 출연했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출신으로 파리 오페라발레단에 동양인 최초 남자무용수로 입단해 솔리스트까지 승급하며 활약하던 그 김용걸이다.

이제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가 오랜만에 친정인 국립발레단 무대에 선 것이다. 비록 프레스 리허설이긴 했지만, 무대에 선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감개무량했다.

(사실 김용걸 씨가 이 공연에 출연하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국립발레단의 수석무용수 김현웅 씨가 술자리에서 후배 이동훈 씨를 때려 이씨가 부상을 당했다. 두 사람은 당초 '왕자 호동'에 주역으로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김씨는 사건 이후 사표를 냈고, 이씨는 부상으로 출연이 불가능해졌다. 유감스럽다.

안 그래도 남성 무용수 기근에 시달려온 발레계로서는 유감스러운 사건이고, 큰 손실임에 틀림없다. 국립발레단은 이 두 사람 대신 김용걸 씨와 신예 송정빈 씨를 주역으로 캐스팅했다. 또 한 명의 남성 주역은 정영재 씨다.)

나는 김용걸 씨를 1998년부터 취재기자로서, 혹은 발레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지켜봐 왔다.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서 활동할 때, 파리에서 공연하는 그의 모습을 직접 가서 보지는 못했지만(그가 출연했던 피나 바우쉬 안무작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체'를 DVD로 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가 가끔 한국에 와서 서는 무대는 빼놓지 않고 보려 했었다.

그렇지만 그의 전막 발레를 보는 것은 2004년 '해적', 2005년 '지젤' 이후로 처음이었다. 김용걸 씨 역시  '초심으로 돌아간다'고 이번 공연에 임하는 각오를 밝혔다. 그리고, 김용걸이 '구원투수'로 선 오랜만의 무대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어느 공연이나 다 마찬가지지만, '왕자 호동'은 주역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 두 사람이 등장했을 때 집중도가 확 높아졌다. 확실히 연륜 있는 대선배 김용걸 씨와 같이 춤추다 보니, 낙랑 공주 역의 김리회 씨도 감정을 극대치까지 끌어올려 표현하는 것 같았다. 과거 김리회 씨의 공연을 보면서, 기량이 출중한 무용수지만 느낌이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섬세한 감정 연기도 좋아졌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 낙랑 공주가 호동 왕자의 편지와 칼을 전해 받고 고뇌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명고를 찢고, 이 사실을 안 아버지의 칼에 맞아 쓰러지고, 호동 왕자가 죽어가는 낙랑 공주를 부둥켜안고 절규하다 자결하는 장면까지.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키는 비극적 결말인데, 두 사람의 감정이 너무나 절절하게 표현돼 마음이 움직였다. 호동 왕자가 이미 시신이 된 낙랑 공주 옆에 쓰러지는 걸 보며 가슴이 울컥했다. 아. 이래서 좋은 무용수인 거다.

한국적 소재로 만든 발레 <왕자 호동>은 이질적인 것을 한데 모아 뭔가를 만든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한다. 스토리가 매끄럽게 연결된다기보다는 장면 장면이 그냥 툭툭 나열된 듯한 느낌이 들고, 공연의 요소들이 조화롭게 어울리지 않고 확 튀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의 사랑이 표현되는 장면들의 감정적 파장이 커서 이 아쉬움을 상쇄할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는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1회에 그치지 않고 꾸준히 공연되며 계속 업그레이드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고, 희망적이라고 본다.

왕자 호동은 올가을 이탈리아 초청 공연도 예정돼 있다. 이번 공연을 계기로 좀 더 보완해 어디에나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한국적 발레'의 모범 사례로 자리잡기를 바란다.

(22-24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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