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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이 있는 5월. 어린이 공연도 쏟아진다. 오랫동안 공연 담당하면서 어린이 연극을 많이 취재했다. 딸을 키우는 부모라서 더욱 관심이 가기도 한다. 그런데 어린이 공연장의 관객들은 대부분 유치원생들이고, 초등학생들은 별로 많지 않다. 지난 3월 옛 블로그에 썼던 글을 옮겨왔다. 시엘로스 웹진에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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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6학년이 된 큰 딸이 학교에서 특별활동 안내문을 가져왔다. 특별활동 개설 과목이 저학년 때보다 많이 줄어들었다. 큰 딸이 다니는 학교는 특별활동 개설 과목이 다양한 편이고, 덕분에 딸은 1, 2학년 때 리듬체조반, 무용반, 성악반, 미술반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이런 반은 다 저학년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할 뿐이다. 고학년 학생들을 위한 특활반은 예체능 분야는 거의 없고, 컴퓨터나 외국어, 수학영재, 과학영재반처럼, 학업과 관련된 게 대부분이다.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딸은 3학년 이후 계속 교내 합창단에서 활동하면서, 종종 학교 행사에 참여하거나 대외 활동을 한다. 그런데 합창단 활동이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인식 때문인지 합창단원 수가 날로 줄어들고 있다 한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지난 해부터 합창단원들에게 졸업식 때 공로상을 주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나중에 입시 준비할 때 합창단 활동과 수상 경력이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며 합창단 활동에 관심을 갖는 엄마들이 있다 한다. 악기를 배우게 하는 것도 ‘수행평가’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대학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결정된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기껏 1주일에 한두 시간 하는 예체능 특활도 상급학교 진학과 학업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인기가 없다. 계속 전공으로 삼을 생각이 아니면 예술 활동을 취미로 계속하는 아이들이 점점 적어진다. 그러고 보면 요즘 아이들의 문화예술 체험은 유치원 다닐 때가 전성기다. 초등학교 몇 년만 다니면 예술 활동을 취미로 하는 것도, 공연을 관람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된다.

 

 젊은 연출가가 공들여 만든 어린이 연극을 취재한 적이 있다. 이 연극은 너무 어린 아이들보다는, 약간 이른 ‘사춘기’를 겪는 요즘의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들이 보면 적합할 듯한 내용이었다. 괜찮은 작품이었는데 객석은 너무 썰렁해 민망할 지경이었다. 초등학생은 한 명도 없고, 엄마와 함께 온 유치원생들 몇 명만 있었을 뿐이었다. 초등학생만 되어도 바빠서 공연장에 갈 시간이 없다.

 

 디즈니 가족 뮤지컬들이 국내에서는 흥행 성적이 그리 신통치 않았던 데에는 이런 상황도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대학로의 유명 어린이 극장도 관객은 대부분 유치원생들이다. 이제 어린이 연극 전문극단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연극은 잘 제작하지 않는다는 얘기도 들린다. . 


'아침이슬’이나 뮤지컬 ‘지하철 1호선’로 유명한 김민기 씨도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어린이 공연 제작의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학전 어린이 무대’에 열정을 쏟아왔다. '어린이들이 학원과 학교를 오가며 주입식 교육에만 노출돼 있고, 지극히 상업적인 문화만 있지, 어린이를 중심에 놓은 문화현상은 적은 것 같다’는 게 그가 어린이 공연에 뛰어든 이유다.


 


그런데 ‘학전 어린이 무대’는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같은 작품들을 내놓으며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제작비를 건지기도 어렵다. 객석을 채우는 일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주 관객층’으로 여겼던 초등학생들은 학원 다니느라 바빠서 극장에 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방학이나 어린이날 즈음에는 잠깐 반짝 하지만 그것도 그 때뿐이란다. 


 초등학생들도 이렇게 바쁜데, 청소년들은 오죽하겠는가. 공연 감상문을 숙제로 내야 하는 방학 시즌을 노린 청소년 음악회 정도가 떠오를 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는 청소년 공연 시장이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에는 청소년 전문 극단도 있었는데, 요즘은 거의 활동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21세기는 창의성을 가진 인재를 필요로 한다'며 문화예술 교육의 중요성을 여기저기서 강조한다. ‘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라는 정부 기관이 있을 정도이다. 기업들도 문화예술계와 교류하고, 예술가의 창조성을 기업경영에 접목하려 애쓴다. 내가 만난 유명한 예술가들은 현재 가장 시급한 과제로 예외 없이 ‘문화예술 교육’을 꼽았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과연 문화예술을 충분히, 만족스럽게 즐길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걸까. 아이들을 위한 문화예술 교육은 과연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 걸까.


 둘째 딸이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주변 어른들이 다들 ‘축하한다’면서도 ‘이제 고생문이 훤히 열렸구나’ ‘이제 좋은 시절 다 끝났구나’ 하는 말을 잊지 않는다.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는 학업 부담과 치열한 경쟁을 염두에 둔 말이다. 문화예술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아이들이 풍부한 예술적 체험을 하면서 자라게 하려면, ‘학교 들어가면 좋은 시절 끝나는’ 지금의 환경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크고 근본적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지 사실 잘 모르겠다. 그저 내 아이들만이라도 예술을 즐기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을 뿐이다. 요즘 기타를 독학 중인 딸을 격려해 주고, ‘그럴 시간 있으면 공부나 해’라는 말을 하지 않고, 아이의 시험 성적에 너무 집착하지 않고, 아이들이 예술적 체험을 통해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안내해 주고 싶은 것이다. 

 

 학전 소극장 개관 20주년 기념공연을 한 김민기 씨는 이번 공연의 수익금을 어린이 공연에 쏟아 부을 예정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요즘은 학원 빠지고 연극 보러 오는 초등학생들이 조금씩 늘어나(이건 사실 엄마들의 결단에 달려 있다) 힘을 얻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커다란 변화'까지는 몰라도, 이런 변화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작은 변화가 모이면 언젠가 큰 변화로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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