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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이 발레 '코펠리아'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다. 지난해 공연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던 전막 해설발레다. 지난해 극장 용에서 공연될 때 이 공연을 딸들 데리고 봤고, 올해 토월극장에서 다시 봤다. 이번엔 김준희 씨가 해설을 맡았다. 토월극장이 발레에 그리 적합한 공연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두번째로 보는 공연도 재미있었다. 지난해 공연 보고 썼던 글을 다시 올려본다. 예전 블로그에 썼던 글을 어떻게 이리 다 옮겨오나 걱정했는데, 이런 식으로 계기가 있을 때마다 하나씩 옮겨오기로, 마음 편하게 먹기로 했다.  


아이들과 함께 공연 보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괜찮은 공연 관람 파트너였던 은우는10대에 들어선 이후 반항기가 생기는지 엄마가 좋아하는 공연이라면 질색부터 한다. 둘째 은형이는, 그나마 어릴 때는 공연장 나들이를 좋아했던 은우와는 달리, 아예 처음부터 별로 공연에 관심이 없다. 이런 와중에도 최근 아이들과 함께 공연을 몇 편 봤으니, 이는 ‘회유’와 ‘협박’을 병행한 결과다.

첫 번째였던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 파크 콘서트'의 성공에 고무돼 다음으로 택한 공연은 국립발레단의 '코펠리아'였다.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5월초에 초연됐으나, 그 때는 포럼 준비로 바빠서 보지 못했다가 용산 국립박물관 극장 용에서 열리는 걸 보기로 했다. 아이들 데려가 공연을 볼 생각에 평일 휴가까지 냈건만, 재미없을 것 같다며 투덜거리던 은우는 공연장에 도착한 뒤에도 계속해서 '아이 뭐야, 엄마만 좋아하는 발레를 왜 보러 오냐고. 보기 싫어, 보기 싫어’ 하며 내 속을 긁었다.

은형이도 '엄마, 난 공연보다 공룡이 좋아. 공연은 시시해' 하며 거든다. 예쁜 삽화로 꾸며진 포스터 그림을 보여주며 관심을 끌어보려 했으나, 이 역시 시시하단다. 남자아이들과 놀아서 그런가, 요즘 공룡의 세계에 푹 빠진 은형이는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예쁜 것들을 보고 ‘시시하다’고 한다. 나는 ‘재미있을 거라니까!’ 하고 빽 소리를 지르며, 억지로 아이들을 공연장에 끌고 들어갔다. 속으로는 ‘재미없으면 어쩌지? 하고 걱정하면서. 

발레 ‘코펠리아’는 19세기 희극발레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호프만의 단편소설 ‘모래 인간’이 원작이며, 레오 들리브 작곡, 생 레옹 안무로 1870년 파리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됐다. 마리우스 프티파와 니진스키 등 전설적 무용가들도 '코펠리아'를 안무했다. 이번 공연은 서울발레시어터의 상임안무가 제임스 전이 새롭게 안무한 버전이다. 

'코펠리아'는 괴짜 발명가 코펠리우스 박사가 만든 자동인형의 이름이다. 세상을 떠난 아내를 잊지 못하는 박사는 아내와 꼭 닮은 인형 코펠리아를 만들고, 이 인형을 사람처럼 대한다. 마을 사람들은 박사의 집 창가에 그림 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는 코펠리아가 인형인 줄도 모르고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 중에는 스와닐다라는 아가씨와 결혼할 예정인 청년 프란츠도 끼어있다. 코펠리아에게 질투와 호기심을 느낀 스와닐다는 박사가 외출한 사이, 박사의 집에 몰래 숨어들어간다. 갖가지 신기한 물건들이 가득한 박사의 실험실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사실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로 각색되기도 한 원작 소설은 ‘공포 문학’이나 ‘환상 문학’으로 분류되곤 하니, 희극과는 거리가 멀다. 소설의 주인공 나타니엘은 코펠리우스가 만든 자동인형 ‘올랭피아’와 사랑에 빠지고, 올랭피아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미쳐버린다. 소설 속 코펠리우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마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발레는 소설의 괴기스런 분위기를 걷어내고 경쾌한 희극으로 다시 태어났다. 

‘코펠리아’는 자신이 조각한 아름다운 여인상과 사랑에 빠졌다는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을 떠올리게 한다. 이 조각상은 피그말리온의 기도에 감동한 여신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살아있는 여인으로 변해 피그말리온과 결혼한다. 자신의 창조물이 사람으로 변하고, 자신의 창조물과 사랑에 빠진다는 모티브는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의 원작)이나 제페트의 ‘피노키오’ 등에서 보듯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돼 왔다.

하지만 해설 발레 ‘코펠리아’를 보는 데 이런 사전지식은 없어도 아무 상관없다. '코펠리아'는 명랑 유쾌 코믹 발레다, 그냥 보면서 즐기면 된다. 제임스 전의 안무는 이 작품 곳곳에 아기자기한 위트와 발랄한 유머를 새로 불어넣었다. 고전 발레에서 전형적인 우아한 동작이 이어지다가도, '막춤'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엉덩이 실룩거리기’ 같은 춤사위가 살짝살짝 등장한다. 아이들이 키득키득 웃기 시작한다.

공연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말풍선 팻말도 기발하고 재미있다. 이 말풍선에는 '좋다' '박수' 같은 상황 설명이 쓰여 있는데, 마치 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은우는 말풍선이 등장할 때마다 크게 웃어댔는데, 이제 겨우 한글 까막눈을 깨친 수준의 은형이는 말풍선에 쓰인 글을 빨리 읽지 못해 '뭐야?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하고 나를 채근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임스 전은 ‘카툰 발레’라는 컨셉을 갖고 이 작품을 안무했다 한다.  

해설은 ‘비보이 출신 발레리노’로 유명한 국립발레단의 이동훈 씨가 맡았다. 해설자로는 첫 ‘데뷔’라는데, 이동훈 씨 아닌 다른 사람이 했어도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재기 발랄한 모습을 보여줬다. 약간 발음이 어눌한 게 아쉽지만, 끼 넘치는 해설자의 연기는 이 공연이 선사한 큰 재미 가운데 하나였다. 해설자와 객석과 소통하는 대목이 많았는데, 어린이 관객들의 엉뚱한 대답을 척척 받아 넘기는 순발력이 발군이었다. 

국립발레단이 지금까지 해온 해설 발레는 갈라 공연 형식에 가까웠다. 전막 발레 작품들의 주요 장면을 발췌 공연하며 이 장면들에 대한 해설을 제공하는 것이다. 전막 발레에 해설을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극의 흐름을 끊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펠리아’의 해설은 큰 무리 없이 극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었다. 코펠리우스 박사가 해설자 자신의 미래 모습이라는 설정도 그럴 듯했다. 해설이 지나치게 친절하고 분량이 많지 않나 싶을 때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어린이 관객들을 주 대상으로 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 같다.

사실 발레를 처음 접하는 어린이들은 '발레는 왜 대사가 없느냐'고 답답해 하며, 극의 진행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은우도 처음 발레를 봤을 때 공연 내내 나를 쿡쿡 찌르며 '엄마, 왜 말을 안 해? 말을 왜 안 하냐고!' 하고 물었던 기억이 있다. ‘코펠리아’의 해설은 이렇게 전막 발레의 진행에 익숙하지 않은 어린이 관객들이 쉽게 내용을 파악하고 극에 더욱 몰입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2막, 박사의 집 실험실 장면은 해설자가 '실험실에 몰래 들어간 스와닐다와 프란츠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자’며 앞으로 펼쳐질 상황을 예고한 뒤 시작되는데, 은형이는 캄캄한 실험실에서 주인공이 조심조심 걸음을 내딛자 정말로 많이 긴장한 듯, '어떻게 해!' 하며 손으로 눈을 가리고 손가락 사이로 무대를 훔쳐봤다. 자기도 조마조마한 모양이다. 이렇게 작품에 푹 빠져든 모습을 보니 내가 다 흐뭇했다.

이 실험실 장면은 아기자기한 재미가 넘친다. 아이들은 실험실에 등장하는 갖가지 인형들--특히 목 없는 인형-을 신기해 했다. 나는 한복 차림의 인형이 구석에 서 있는 모습에 킥킥 웃음이 나왔다. 또 인형으로 잠깐 출연한 이동훈 씨가 익살스런 춤사위를 선보이며 무대를 가로질러 사라지는 모습은 어떻고. 코펠리우스 박사가 누군가 집에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실험실 곳곳을 뒤지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때로는 손에 땀을 쥐고, 때로는 까르르 웃으며 스와닐다의 ‘실험실 탈출 대작전’을 열심히 지켜봤다.

박사의 집을 무사히 빠져 나온 스와닐다와 프란츠. 잠시 위태로웠던 두 사람의 사랑은 회복되고 모든 사람의 축복 속에서 행복한 결혼식이 열린다. 흔히 고전 발레의 결혼식 장면에 등장하곤 하는 다채로운 춤의 향연이 펼쳐진다. 인형을 사람으로 만들려는 욕망에 사로잡혔던 코펠리우스 박사도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깨닫고 축제 분위기에 동참한다.

친절한 동훈 씨의 해설, 들뜬 분위기의 커튼 콜까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은형이는 ‘왜 벌써 끝나? 더 보고 싶은데’ 했다. 국립발레단은 ‘코펠리아’로 괜찮은 가족 발레 레퍼토리 한 편을 더 보유하게 됐다. 아쉽게도 이번 공연은 끝났지만, 국립발레단의 레퍼토리로 정착돼 앞으로도 무대에 올려질 기회가 많을 것 같다. 자녀들과 함께 보는 가족 공연으로 안성맞춤이다. 나 역시 상당한 효과를 봤으니까.

공연장을 나서면서 나는 은우와 은형이에게 의기양양하게 큰소리 쳤다. “거 봐라. 엄마 말이 맞지? 보기 싫다고 하더니, 잘만 보더라! 재미있었잖아!” 은우는 인정하기 싫은 듯 ‘치!’ 하고 입술을 내밀었고, 은형이는 ‘그래도 나는 공룡이 더 좋아!’ 하고 맞받았다. 아이고, 못 말리는 우리 딸들 같으니라고. <1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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