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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스 얀손스와 인터뷰하고 쓴 글 2편. 지난해 쓴 글이지만 아직도 그를 만난 기억이 생생하다.

사진제공 금호문화재단


마리스 얀손스는 인터뷰 내내 예술의 '가치'를 강조했다. 그가 왜 '물질만능의 시대'에 음악의 영적인 가치를 믿고 전파하는 지휘자로 일컬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보자.

 "아쉬운 건 모든 사람들이 문화를 그저 '엔터테인먼트'로만 바라보는 겁니다. 좋으면 그냥 소비하고, 안 좋으면 아예 생각조차 안 한다? 비극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문화를 전혀 접하지 못한다고 해서 죽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건 잘못됐어요. 그 사람은 문화의 가치를 전혀 알지도 못하고, 문화가 내면세계에 얼마나 중요한지 판단조차 못하게 되니까요."

 마리스 얀손스는 전형적인 '문화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Culture)' 주의자다. 가치 있는 문화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 '문화의 민주화'다. 가치 있는 '고급 문화'와 가치가 떨어지는 문화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문화의 '서열'을 따지는 엘리트주의로 비판 받기도 한다. 그러니 마리스 얀손스 역시 엘리트주의자라고 비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마리스 얀손스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연륜과 경험의 깊이가 우러나는 사람이, 예술의 '영적인 가치'를 체화한 사람이, 그가 평생 지녀온 ‘신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화제를 바꿨다. 많은 사람들이 지휘자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싶어한다. 첫 번째 유형은 굉장히 카리스마 있고 강력한 리더, 두 번째 유형은 민주적이고 친근한 리더. 마리스 얀손스는 자신이 어느 유형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저는 카리스마(Charisma)와 친근함(Friendliness)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지휘자는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동시에 친근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지휘자는 독재자 같다고 하지요. 하지만 저는 독재자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음악에 어울리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어떤 지휘자도 독재자는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다만 강력한 리더였을 뿐이죠."

 그는 지휘자는 본질적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을 단합시켜야 하니까. 하지만 각자의 성격에 따라 이 리더십이 발현되는 방식은 다르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건 자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연스러워야 해요. 지휘자는 친근하게 굴어야 한다거나, 친근하지 않게 굴어야 한다거나, 이런 걸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자신에게 충실하면 됩니다. 그러면 됩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충실하라. 자연스럽게 하라. 나는 지휘자가 아니지만, 나한테도 유용한 충고로 들렸다. 그에게 '훌륭한 지휘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 뭔지 물었다.

 "훌륭한 지휘자? 이거 참 어려운 질문인데요……. 가장 중요한 건 재능이예요. 이게 어렵습니다. 재능을 가졌는지 안 가졌는지, 판단하기가 쉽지는 않죠. 정말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가가 되기를 원하지만 재능이 없는 경우도 있거든요. 적절한 교육을 받는 것도 중요하죠. 지휘의 기술을 익혀야 하고, 진지해야 하고, 스타일도 좋아야 하고…… 리허설 테크닉을 익히는 건 참 어려워요. 지휘자한테는 악기가 오케스트라거든요.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악기를 갖기가 힘들죠. 그래서 저는 젊었을 때 많은 지휘자들의 리허설에 참가해서, 그걸 보면서 배웠어요. 많은 지식을 얻었죠."

 젊은 시절, 마리스 얀손스는 또 무엇을 공부했을까. 선배 지휘자들로부터 음악적인 지식이나 경험 외에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었다.

 "저는 음악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지휘자, 어머니는 성악가였죠. 제 인생은 음악과 함께 시작됐어요. 하지만 제가 받은 교육은 음악에 관한 것만은 아니었어요. 훌륭한 스승은 구체적으로 가르침이나 교훈을 일러주지 않아요. 스승이 가르치지 않아도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원칙과 도덕 같은 것을 배우게 돼요. 이건 사실 뭘 가르치고 배우려 해서가 아니라 스승과 함께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죠. 스승으로부터 흡수하는 거예요.

 카라얀과 함께 일할 때 그랬어요. 저는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그와 함께 지냈어요. 카라얀은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 할 때도 많았어요. 하지만 저는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웠어요. 그 때 저는 젊었어요. 당시엔 뭘 배우고 있는지조차 모를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알지요."

 나는 마리스 얀손스와 같은 구 소련 라트비아 출신인 지휘자 안드리스 넬슨스를 떠올렸다. 지난 2008년, 만 서른이 안 된 나이에 영국의 명문 버밍엄 시립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지휘자. 안드리스 넬슨스는 마리스 얀손스를 자신의 ‘멘토’로 꼽는다. 안드리스 넬슨스의 취임 연주회에 갔었다는 얘기를 했더니, 얀손스는 빙그레 웃었다. 안드리스는 나에게 많은 것을 배워갔지 하면서.

 마리스 얀손스에게 사라 장과 함께 했던 레코딩 얘기를 꺼내며 인연 있는 한국인 연주자들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는 사라 장, 장한나가 아주 재능 있는 연주자라고 칭찬했고,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팍' 뭐라고 하는 남자 피아니스트와 러시아에서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함께 연주한 적이 있는데 그도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평했다.

 

 "팍? 혹시 건우 팩(백건우) 아닌가요?"

 "그 이름은 아닌 거 같은데요...... 파리 산다고 했어요."

 "그러면 건우 팩 맞을 거예요. 파리에 살거든요."
 "글쎄요...... 아, 생각났다. 그 사람 부인이 배우라고 했어요!
 "그럼 확실해요. 건우 팩 부인이 배우거든요(^^)."

 마리스 얀손스에게 마침 백건우도 이번 주말에 이스라엘 필하모닉 내한공연에서 협연할 예정이라고 했더니, 부쩍 관심을 보였다.

 "그래요? 이스라엘 필하모닉? 그럼 주빈 메타랑?"

 맞다고 했더니, 한국에서 해외 오케스트라 공연이 많이 열리는지 물어왔다. 거꾸로 내가 질문을 받은 셈이다.

 "많아요. 베를린 필도 최근 4,5년 사이에 두 번 왔고, 뉴욕 필은 꽤 자주 왔어요.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는 한국 팬들이 기대하는 만큼 자주 오지 않았지만요."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는 일본에는 2년에 한 번 꼴로 간다고 한다. 마리스 얀손스는 일본은 자주 가기 때문에 프로그램을 짤 때 과거의 공연과 겹칠 위험이 많은데, 한국 공연은 워낙 오랜만이라서 괜찮다고 농담을 했는데, 이 말을 들으며 일본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은 우리보다 관객층이 훨씬 넓고 두텁다.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다른 모든 예술 분야도 마찬가지다. 정확한 통계를 갖고 하는 얘긴 아니지만, 공연 종사자들은 일본 공연 관객이 한국의 10배는 되는 것 같다고들 한다.

 '로열 콘세르트허바우'는 예전에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로 알려졌던 단체다. 네덜란드 왕실이 '로열'이라는 명칭을 하사해서 '로열'이 새로 붙었고, '콘서트헤보'의 현지 네덜란드어 발음이 '콘세르트허바우'라고 해서, 근래에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로 불리게 됐다. 하지만 이 명칭은 아직 생소한 게 사실이다. 네덜란드 현지 발음이라는데, 마리스 얀손스 자신은 '로열 콘서트게보우'라고 부르고 있었다.

 얀손스는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는 듣자마자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는 훌륭한 음색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어떤 스타일, 어떤 작곡가의 작품에도 금세 적응하는 것이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그리고 비엔나 필, 베를린 필은 세계 음악계를 선도하는 오케스트라라고 평가하면서, 이들은 '서로 달라서 좋다'고 했다. 다른 훌륭한 오케스트라들도 많지만 연주가 똑같이 들리는 경우가 많아서 아쉽다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이틀이 지났다.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공연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마리스 얀손스와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게 됐다. (조금 전 2012년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이 추진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리스 얀손스가 다시 같이 올 것 같지는 않지만.)

 즐거웠던 인터뷰, 황홀했던 공연에서 나는 충만한 영감을 느꼈다. 인터뷰 끝나고 마리스 얀손스와 함께 찍은 사진을 흐뭇한 표정으로 꺼내보곤 한다. 나는 아마 마리스 얀손스한테 반했나 보다. (2010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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