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임현정. HJ Lim. 가족들을 위해 유튜브에 올린 연주 영상으로 이름을 알려 EMI 클래식스에서 음반까지 내게 된 한국인 연주자. 음반사 관계자들로부터 지난해부터 임현정이라는 ‘천재’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왔는데, '인터내셔널 피아노' 2월호 커버스토리에 임현정 씨가 등장한 걸 보고, 기사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 그의 첫 음반이 발매되기 직전이었다.
처음에는 임현정 인터뷰를 추진했으나, 스위스에 머무르고 있어서 당장은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EMI측에서 촬영한 화질 좋은 연주와 인터뷰 동영상이 있어서 방송뉴스 리포트를 만들 수 있었다. 유튜브라는 미디어가 클래식 음악가들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얘기가 포함됐다. 이 리포트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왕벌의 여행'이라는 제목이 붙은 임현정 씨의 유튜브 동영상 (위의 동영상)으로 시작했다. 다음이 기사 내용이다.
(왕벌의 비행 연주영상과 함께) 연주속도가 엄청나게 빨라 마치 영상을 2배속으로 돌린 것 같습니다. 유튜브에서 23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한 이 현란한 속주의 주인공은임현정씨. 12살 때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줄곧 유럽에서 활동해온 그는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연주회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 임현정 가족들은 너무 먼 곳에 있으니까 유튜브나 인터넷 없이는 제 연주활동을 알 수 없었을 거예요. 놀라운 기교와 카리스마,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는 연주 영상들은 인터넷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8월, 임씨는 드디어 메이저 음반사인 EMI 클래식 영국 본사와 음반 발매 계약을 맺기에 이릅니다. 첫 녹음작업은 CD 8장 분량에 이르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집, 음반업계 불황 속에 신인으로서는 이례적인 대형 프로젝틉니다. 인터뷰: 장일범/음악평론가 "보통 국제 콩쿠르나 대가의 추천, 기획사를 통해 신인을 발굴하는데, 이와는 달리 유튜브에서 입소문으로 유명해지고 메이저 음반사에서 음반까지 내게 된 최초의 클래식 아티스트입니다" 유튜브 스타임현정씨의 베토벤 소나타 전곡집 첫번째 음반은 오는 12일 전세계에서 발매되고, 한국에서는 오는 6월 전곡이 한꺼번에 발매됩니다.
이 기사가 SBS 8시 뉴스에 나간 뒤에 스위스에 거주하고 있는 임현정 씨와 전화 인터뷰가 성사되었다. 밝고 경쾌한 목소리에 시원시원한 말투가 인상적이었다.
"왕벌의 비행은 2009년 벨기에 겐트에서 했던 연주회 앙코르였어요. 쇼팽 에튀드 24곡과 라흐마니노프 에튜드-타블로 전곡을 연주했고(이걸 하루에 다 쳤다니!), 왕벌의 비행은 앙코르로 재미 삼아 쳤던 거였어요. 청중이 기립하고 좋아했는데, 부모님한테 말로는 다 전할 수가 없었죠. 부모님이 와서 보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다가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어요. 그 때부터 연주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죠."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임현정 씨의 연주 동영상은 ‘왕벌의 비행’ 뿐만이 아니다. 여러 곡들이 올라와 있는데, 임현정 씨의 연주는 난곡도 손쉽게 요리해내는 탁월한 기교, 그리고 독특한 개성과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연주자 자신이 그 연주를 정말로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주었다.
연주 동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임현정 씨는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 등이 속해 있는 유명 매니지먼트사 해리슨 패롯 소속 아티스트가 되었다. 그리고 EMI 클래식스와 음반 계약을 맺었다. 첫 음반부터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 앨범이라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EMI는 이례적이면서도 전폭적인 지원으로 임현정 씨에 대한 기대를 보여줬다.
임현정 씨는 몇 년 전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회를 하면서 이미 베토벤 소나타에 대한 나름의 분석을 마쳤다고 했다. 프로그램 해설까지 직접 다 써놓은 상태였다. 베토벤에 너무나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첫 앨범으로 다른 작업은 생각지도 않았다. 임현정 씨는 EMI 측에 그 동안 자신이 축적해 놓은 베토벤 소나타 연구의 결과를 보여주고, 앨범 제작의 전권을 얻어냈다. (아래 동영상은 베토벤 '월광' 소나타 1악장)
임현정 씨는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8개의 주제로 나눴다. 그녀는 베토벤의 소나타에는 그의 일생이 담겼다며, 베토벤의 삶을 영웅적 사상, 영원한 여성성, 극단적 충돌, 단념과 성취 등의 주제로 나눠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베토벤 소나타를 연주하기 위해 그녀는 베토벤의 삶을 ‘공부’했다고 한다. 공부는 어떻게 했을까.
"베토벤에 관한 책을, 제가 구할 수 있는 건 다 구해서 읽었어요. 베토벤의 편지 3천 페이지를 읽었고, 베토벤의 일기, 남들이 베토벤은 피아노를 어떻게 연주했다 등등 그에 대해 묘사한 글들을 다 읽었어요. 내 친구에 대해서도, 심지어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이렇게 자세히 알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친구의 일기나 편지를 다 읽을 수는 없잖아요. 이제 베토벤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래서 베토벤의 일생을 피아노로 다시 살아보는 작업을 한 셈이죠. 무슨 '프로젝트'가 아니라, '모험'이었고 ‘일생’이었어요. 몇 년 동안 푹 빠져 있었고,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지금도 베토벤 말고 딴 걸 치면 베토벤을 배신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베토벤 소나타 전곡이라면 32곡이다. 그러나 임현정 씨는 특이하게도 베토벤 소나타 19번과 20번은 제외하고 나머지 30곡만 녹음했다. 이유? 그녀의 대답은 명쾌했다.
"그 두 곡은 베토벤 자신이 출판을 원하지 않았던 거예요. 어린 제자들 연습시키기 위해서 썼던 작은 작품이죠. 그런데 베토벤 동생이 돈이 없어서 그냥 출판사에 판 거죠. 이 두 곡은 베토벤의 평생의 걸작 사이클에 들어가는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네 차례 발매가 예정된 베토벤 소나타 전곡 음반 중 첫 번째 음반이 2월에 전세계에서 발매됐다. (한국에서는 아직 발매되지 않았다.) 전곡 앨범 제작 자체는 모두 끝마친 상태다. 임현정 씨는 지난해 8월 하루 15시간씩 녹음에 매달렸다. 한 곡을 세 차례씩, 중간에 끊지 않고 한달음에 연주했다. 공연 현장과는 달라서 스튜디오 녹음에서 영감을 이끌어내는 게 힘들었다고 한다. 전곡 녹음에는 29일이 걸렸다. 이후 넉 달 동안 녹음 후반 작업도 직접 했다. 음반 속지의 곡 해설도 직접 썼다.
"드디어 음반이 나와서 정말 기뻐요. 베토벤은 정말 인간적인 사람이었어요. 신적인 존재로 숭배되기도 하지만, 지극히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아이디어도 많았고, 사랑도 많이 했죠. 베토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임현정 씨는 음반이 일단 나온 이상 음반 평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작곡가가 곡을 쓰는 순간 곡은 작곡가 손을 떠나는 거고, 연주자의 음반 역시 나오는 순간 독립적인 인생을 살게 되는 거란다. 연주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작곡가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 작곡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했다.
연주 동영상을 보면 임현정 씨의 연주 의상은 항상 똑같아 보인다. 여유롭고 단순한 실루엣의 검정색 옷이다. 그녀는 거침없이 시원시원한 몸짓으로 상의 옷자락을 의자 뒤로 넘기고 피아노 앞에 앉는다. 이렇게 단순하고 편한 연주의상 역시 연주자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작곡가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집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공연은 연주자가 예쁘다는 걸 보여주려는 게 아니고, 작곡가에게 '서비스'하는 자리예요. 화려한 드레스와 파인 옷을 입고 올린 머리 같은 걸 하면 신경이 쓰이죠. 제가 항상 입는 옷은 동양적인 느낌도 있어서 좋아요"
하지만 EMI 앨범 자켓 사진에서는 다른 옷을 입었더라고 얘기했더니, 임현정 씨는 깔깔 웃어댔다.
"맞아요. 녹음 마치고 나서 뮤직 비디오 촬영하러 런던에 갔는데, 거기서 금색 은색 드레스를 가져와서 깜짝 놀랐어요. 다행히 제가 제 연주의상을 가져갔기 때문에 이건 안 입겠다 하고 제 옷으로 갈아입고 쳤어요. 그런데 자켓 사진 촬영할 때는 제 옷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서 거기서 준비한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죠. "
임현정 씨는 벌써 다음 음반을 준비하고 있다. 4월에 라벨과 스크리아빈의 곡들을 녹음할 예정이다. 베토벤 소나타 음반의 녹음 후반 작업을 하면서 밤도 많이 샜다며 이번에는 자신이 녹음 후반 작업까지 다 하지는 않고, ‘일반적인 방식’으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