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하프,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천사의 악기? 아름다운 여인이 연주하는 천상의 악기? 우리 머릿속 하프의 이미지는 이 정도다. 실제로 우리가 음악회에서 만나는 하프 연주자들은 대개 여성이다. 자비에르 드 매스트르는 이런 이미지를 깨버리는 남성 하피스트다. 사실 처음 그의 홍보용 사진만 봤을 때, 나는 비주얼을 내세워 승부하려는 아티스트가 아닌가 생각했다. 팔 근육을 드러낸 채 하프를 잡고 있는 위 사진 말이다. (재밌는 건 공연기획사가 여러 장의 연주자 사진을 매체에 제공했지만, 모든 매체들이 약속이나 한 듯 긴 팔이 아니라 짧은 팔 셔츠를 입고 있는 이 사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커리어를 들여다보고, 음반을 들어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뛰어난 연주력으로 25살 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하프 수석이 됐고, 빈 필하모닉 역사상 첫 하프 협연자로 무대에 섰다. 2년 전 꿈의 오케스트라라는 빈 필하모닉을 뛰쳐나와 홀로서기를 하고 있다. 빈 필하모닉 단원으로, 오케스트라 뒤편에서 하프 파트가 나오는 단 몇 분을 기다려 연주하기보다는, 다양한 연주 활동을 하며 하프 연주자로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과거에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빈 필하모닉의 단원으로, 그리고 KBS 교향악단과 협연하기 위해. KBS 교향악단과 협연할 때는 플루티스트 최나경 씨(재스민 최)와 함께 모차르트의 하프와 플루트를 위한 협주곡을 연주했다. 하지만 이번 내한은 독주회를 위한 것이었다. 흔치 않은 남성 연주자인데다 흔치 않은 하프 독주회. 흥미가 생겨 자비에르 드 매스트르를 공연 며칠 전에 인터뷰했다.

는 사진만 보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다. 일단 외모는 우리가 갖고 있는 하프에 대한 이미지를 배반한다

하프에 대해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이 두 가지 있지요. 하나는 하프는 솔로 악기가 아니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프는 아름다운 여성이 연주해야 한다는 것이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가 과거에도 이런 질문을 얼마나 많이 받았을까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게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할 수 없다. 나로선 처음 만나는 사람이고, 한국의 뉴스 시청자들은 이런 걸 궁금해 할 터이니까. 자비에르는 내 질문에서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문구가 나오자마자 그럴 줄 알았다며 크게 웃었다

"맞아요. 하프와 긴 머리, 긴 드레스의 아름다운 여성. 그런 이미지가 있는 게 사실이고, 저는 이 이미지와 맞지 않죠. 저는 이 이미지를 깰 수 있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이미지는 사실 이 악기한테는 좀 억울한 것 같아요. 왜냐 하면 하프를 진지한(serious) 악기가 아니라 살롱 악기정도로 보는 관념이 깔려 있기 때문이죠. 하프는 정말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악기예요. 아주 다양한 색채를 표현할 수 있고요.”

비에르는 자신이 이 악기가 갖고 있는 역동적인이미지를 상기시킬 수 있고, 이것은 하프를 지금까지의 관념에서 벗어나 솔로 악기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는 하프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은 오케스트라 전체가 낼 법한 아주 다양한 소리와 색채를 표현할 수 있다는 데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하프는 완벽한 악기라고도 했다

물론 하프만을 위해서 쓰여진 레퍼토리가 그리 많지는 않아요. 하지만 다른 곡들을 하프에 알맞게 편곡해서 연주할 수 있죠. 하프 솔로도 할 수 있고,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수도 있고, 실내악으로 연주할 수도 있어요.” 

그가 어떻게 해서 하프를 처음 연주하게 됐을까 궁금해졌다.

"
어릴 때 부모님이 저를 음악학교에 보내셨어요. 거기선 음악이론을 배워야 했는데, 제가 음악이론을 가르친 여자 선생님한테 반해버렸죠. 이 선생님은 원래 하프 선생님이었는데, 학생이 많지 않아서 음악이론을 가르쳤던 거였거든요. 그래서 이 선생님이 연주하는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처음에는 하프가 좋아서 한 게 아니라 선생님이 좋아서 따라 한 셈이죠. 물론 나중에는 이 악기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바뀌었지만.” 

당시에도 하프를 배우는 소년들이 많았느냐 물어봤더니, 아니었다고 고개를 젓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
사실 19세기에는 남성들이 하프를 많이 연주했어요. 그러다가 20세기 들어서는 어떤 이유에선지 여성 하프 연주자가 대다수가 됐죠. 물론 자발레타가 있긴 하지만요(니카노르 자발레타는 1907년생 바스크 출신의 남성 하피스트다. 1993년 세상을 떠난 그는 그 자신이 많은 편곡을 했을 뿐 아니라, 많은 현대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쓴 하프 곡들을 연주하며 하프의 레퍼토리를 넓혔다. 많은 유럽과 남미의 작곡가들이 자발레타를 위한 하프 곡을 썼고, 대부분이 그에게 헌정됐다) 저는 더 많은 소년들이 하프를 연주할 수 있도록 제가 일종의 선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악기의 가능성을 더 개발할 수 있도록 말이죠."

비에르는 하프가 보기에도 아름다운 악기라고 했다. 하프를 연주하는 모습도 관객 입장에서 흥미진진(Spectacular)할 것이라고 했다. 47개의 현에 7개의 페달이 있는 현악기 하프. 하프의 무게는 45킬로그램 정도 나간다고 한다. 결코 가볍진 않다. 크기도 만만치 않다. 자비에르는 악기를 옮기는 문제 때문에 연주하는 곳마다 자신의 하프를 갖고 다니지는 않는단다. 이번 공연에서도 그는 자신의 악기를 가져오지 않고, 빌려서 사용했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하프 조율사가 따로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란다. 튜닝을 위한 기계를 사용해 연주자가 직접 조율한다고 한다. 조율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 않고, 민감한 악기라서, 자주 조율을 해 줘야 한다. 그는 공연 전에 스스로 조율하는 시간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했다. 조율하면서 악기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 일종의 의식이 돼버린 셈이다

자비에르를 인터뷰하고, 리허설을 취재해 쓴 기사는 22 8시 뉴스에 나갔다. 그는 23일 호암아트홀에서 리사이틀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나는 이 공연을 볼 생각이었으나, 갑작스런 사정으로 가지 못하게 돼 많이 아쉬웠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날 그의 팬이 됐다고 한다. 그는 드뷔시의 두 개의 아라베스크, 타레가의 알함브라의 궁전 등 다른 악기를 위해 쓰여진 곡들도 하프 곡으로 편곡해 연주했는데, 스메타나의 몰다우 같은 곡에선 마치 오케스트라의 연주 같은 웅대함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위 동영상에 나온 파야의 스페인무곡도 연주했다.   

소성은 어느 분야에서든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희소성만으로 스타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자비에르 드 매스트르는 단지 흔히 보기 힘든 근육질 남성 하피스트라서가 아니라, 하프 연주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스타 연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공연은 아쉽게도 보지 못했으니, 그의 다음 한국 공연을 기대해 봐야겠다

*SBS 뉴스 인터넷 취재파일로도 송고했습니다.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