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차이콥스키 콩쿠르 여자 성악 1위 소프라노 서선영

차이콥스키 콩쿠르 남자 성악 1위 베이스 박종민

문화부에선 8시 뉴스 톱기사를 쓰는 게 하늘에 별 따기이다. 내가 문화부에 근무하고 있을 때만 꼽아 보면 문화부에서 톱 기사를 쓴 경우가 일본대중문화 개방 때, 그리고 쇼팽 콩쿠르에서 임동민-임동혁 형제가 공동 3위를 차지했을 때 정도였다. 쇼팽 콩쿠르 때 기사를 쓰면서 언제 다시 톱 기사를 쓸 수 있을까 했는데, 올해 차이콥스키 콩쿠르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다시 문화부가 톱을 장식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손열음 조성진이 출전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나는 이들이 뭔가 일을 낼 것 같다는 감이 왔다. 손열음은 이미 화려한 수상과 연주 경력을 자랑한다. 올해 17살의 조성진은 무섭게 떠오른,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유망주다. 실제로 이들은 나란히 최종 결선까지 진출했다. 손열음은 특별상 두 개도 같이 받았다. 바이올린에서도 이지혜가 특별상 하나를 받으며 결선에 진출했다. 나는 결선을 앞두고, 상위권 수상이 유력하니 유럽 특파원을 모스크바에 출장 보내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회사에 보고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냥 국내에서 기사를 쓰기로 결정됐다. 

발표는 6월 30일 밤. 우리 시각으로는 7월 1일 새벽 1시로 예정돼 있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휴가였다. 상반기 휴가 남은 걸 써야 하는 상황이라 휴가를 내고 보니 그렇게 되었다. 콩쿠르 수상으로 기사를 써야 할 상황에 대비해 나는 콩쿠르의 기본 정보와 손열음 조성진 이지혜 연주 자료화면, 차이콥스키 콩쿠르 자료화면을 챙겨 후배에게 넘겨줬다. 우승자가 나오면 어차피 야근 상황이므로 아침뉴스의 1보는 국제부 야근자가 처리하고, 이후에는 문화부후배가 처리하기로 했다.  

후배가 챙겨보겠다고는 했지만, 나는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콩쿠르 수상자 발표를 기다렸다. 어차피 손열음 조성진 연주 실황을, 다는 아니지만, 인터넷에서 챙겨보고 있었던 터였다. 트위터에서도 나처럼 수상자 발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멘션이 이어졌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발표는 자꾸 늦어졌다. 사회자가 하는 얘기를 들으니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느라 늦어진다는 것 같았다. (이번 콩쿠르는 모스크바에서뿐 아니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도 나뉘어 열렸다. 아마도 조직위원장을 맡은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영향력이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싶었다.

결국은 1시간 20분 정도 지나서야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기다리던 수상자 발표는 하지 않고, 지루한 인삿말이 이어졌다. 게르기예프도 나오고, 이 대회 첫 회 우승자였던 미국인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도 나오고...... 듣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갑자기 '까레야!'라는 말이 귀에 확 들어왔다. 성악 부문 수상자를 발표하는데, 한국인이다! 그것도 남자 부문, 여자 부문 다 한국인 박종민, 서선영이 1위를 휩쓸었다. 와! 트위터 타임라인이 환호성으로 들썩였다. 알고 보니 이 두 사람은 모두 1990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성악 우승자인 최현수의 제자였다. 정말 각별한 인연이다. 

그 뒤로도 계속 한국인 이름이 불렸다. 바이올린 부문에서는 이지혜가 3위로 상위 입상. 기다리던 피아노 부문 수상자 발표는 마지막 순서였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꽃'으로 불리며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부문이다. 5위, 4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연주자가 받았고...... 조성진 3위! 최연소 결선 진출자였다는데, 대단하다. 17살의 이 연주자가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 더욱 기대된다. 이제 손열음과 러시아의 다닐 트리파노프만 남았다. 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 사람이 각축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손열음이 우승하면 얼마나 좋을까. 제발, 제발....... 

피아노 부문 우승은 러시아 연주자에게 돌아갔다. 손열음은 2위. 우승을 바랐기에 아쉬웠지만, 정말 장하다. 어릴 때부터 지켜본 연주자라 더욱 남 일 같지가 않았다. 이미 비오티 콩쿠르 우승, 쇼팽 콩쿠르 파이널리스트, 반 클라이번 콩쿠르 준우승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자랑하는 그녀가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출전한 건 아마 더욱 부담스럽고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2위도 대단한 성과다. 피아노 부문에선 1974년 정명훈 씨가 미국 국적으로 출전해 공동 2위에 올랐던 게 역대 한국인 최고 성적이다. 

시상식을 끝까지 지켜보고 나니 새벽 4시가 다 되었다. 나는 이미 잠이 확 달아난 상태였다. 원래 피아노 부문 우승자가 나올 경우 아침 리포트를 하기로 했었다. 성악부문 수상자가 나올 경우에 대해선 이야기한 바가 없다. 사실 성악 부문은 결선이 늦게 진행돼서 다른 부문에 비해선 별로 신경을 안 쓰고 있었다. 속보에 대비해 미리 준비해 놓은 자료도 없었다. 후배에게 맡겨놓긴 했지만, 마음 편하게 잠들 수는 없었다. 

일단 1보 단신 기사부터 써놓고 국제부 야근 기자에게 전화했다. 국제부에선 외신으로는 기사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고, 화면도 뭘 써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성악에서 남녀가 동반 우승했고, 피아노와 바이올린에서도 한국인이 상위 입상했으니 리포트해야 할 것이라고 얘기하고, 박종민 서선영 자료를 검색해 보내줬다. 시상식 화면에서는 어느 부분을 골라 써야 하는지도 알려줬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출전 한국인 역대 성적도 정리해 정보로 올려놓았다. 모스크바 현지에서 시상식을 지켜본 지인을 통해 수상자 전화 인터뷰라도 해 볼까 했는데, 그건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리포트는 파리 특파원이 했다. 아침 6시 뉴스부터 톱으로 나갔다. 결국 휴가 내놓고 밤새 재택근무 한 셈이지만, 뉴스가 별 탈 없이 잘 나가는 걸 보며 흐뭇했다. 아침 뉴스를 끝내고 8시 뉴스 기획서를 썼다. 후배 기자가 리포트할 터이지만, 시상식을 지켜봐서 내용을 아는 내가 쓰는 게 더 쉬울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후배에게 현지 수상자와 연락이 가능할 만한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결국은 밤을 꼴딱 새고 아침 9시쯤에 잠이 들었다. 

몇 시간 자다가 일어나 점심을 먹고 났더니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8시뉴스에 차이콥스키 콩쿠르 수상 소식을 톱으로 올리기로 했단다. 그래서 한 꼭지만 할 게 아니라 기사를 더 써야 한단다. 이른바 '클래식 한류'를 주제로 한 기사란다. 두번째 기사를 쓰기로 한 기자한테 어떤 내용을 써야 하는지 알려주란다. 아. 어쩐지 이럴 것 같더라. 그냥 내가 출근해서 쓰겠다고 했다. 내용도 생소하고 화면도 이것저것 모아서 편집해야 할 것인데, 그걸 딴 사람한테 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휴가를 반납하고 출근하는 것이었지만, 속상하진 않았다. 내가 담당하는 분야에서 경사가 생겼고, 그걸 톱기사로 쓰게 된 것이니, 보람을 느꼈다고나 할까. 정치부나 사회부에서 썼던 기사는 이런 '경사'로 써본 것은 거의 없었으니, 문화부 기자라서 가질 수 있는 보람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이런 느낌이 처음은 아니었다. 임동민 임동혁이 출전했던 쇼팽 콩쿠르, 그리고 김선욱이 나갔던 리즈 콩쿠르, 또 음악은 아니지만, 김주원이 최고무용수상을 수상했던 브누아 드 라 당스까지, 나는 한국인 예술가들이 선전했던 콩쿠르 소식을, 그 때마다 새벽 잠을 설쳐가며, 여러 차례 기사로 써왔다. 어느새 '콩쿠르 전문기자'가 돼버린 것 같다. 


휴가를 반납하고 출근해 쓴 기사는 '클래식도 한류'라는 제목으로 전파를 탔다. 솔직히 '클래식 한류'라는 조어가 좀 '오버'스럽게 느껴지긴 한다. 대중문화의 '한류'를 의식한 제목이다. 콩쿠르 성적이 좋다고 바로 '클래식 한류'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슈를 선점하고 대중의 관심을 끌려는 미디어의 속성상 희망을 반영한 이런 '조어'가 나오는 건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호성적을 대중문화의 한류에 견주어 더욱 강조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콩쿠르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한국인 음악가들이 두드러진 활약을 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인 음악가들은 세계 유수의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왔다. 이번 차이콥스키 콩쿠르 결과를 두고 영국의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가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핫'한 음악가 양성의 요람(the hottest musical nursery)'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다. 여기엔 한국의 예술 영재 육성 시스템이 잘 갖춰진 것이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이번 수상자들은 서울예고 재학 중인 조성진군을 제외하곤 모두 국내에서 대학 교육까지 마쳤다. 조기유학파나 교포가 많았던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해외로 나갔다. 한예종은 예술영재의 조기입학 조기졸업이 가능한 학교이고, 예비 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또 수상자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음악 영재의 발굴 지원을 위해 이 재단이 꾸준히 해 온 일은 평가를 받을 만 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콩쿠르 수상은 연주자의 커리어에 있어서 '시작'일 뿐이다. 콩쿠르 수상자들이 다 성공적인 프로 연주자가 되는 건 아니다. 물론 본인의 노력과 음악성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음악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들이 제대로 세계 무대에서 연주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매니지먼트와 지원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했다. 국제적인 경쟁력과 네트워크를 갖춘 기획자가 나와야 한다고 했다. 


더 중요한 건 몇몇 연주자가 잘 나가는 게 아니라, 음악을 즐기는 일반인들이 더 많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엘리트 체육'도 중요하지만 '사회 체육'도 중요하다는 스포츠계 얘기,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음악계도 마찬가지다. 음악을 잘 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이를 즐기는 사람도 중요하다. 트위터에 이런 얘기를 썼더니 공연계 지인이 '즐기는 사람들이 적어서 잘 하는 사람들이 한국을 자꾸 떠나는 것 같다'는 멘션을 달았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문화부 막내 류란 기자가 차이콥스키 콩쿠르 수상 내용을 톱기사로 전했고, 내 기사는 위에 쓴 대로 한국인 음악가의 약진 배경, 과제 등을 최대한 간략하게, 흥분하지 않고 담으려고 노력했지만, 마음에 차지는 않는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나는 콩쿠르 수상 소식을 톱단락에 전한 것이 좋으면서도 마음에 걸린다. 이게 다 한국인들이 유난히 순위 매기기와 경쟁을 좋아하는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콩쿠르 수상 소식이 마치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이 우승한 것마냥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사실상 그런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콩쿠르는 국가 대항전으로 치러지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콩쿠르 결과를 두고, 올림픽에서 국가별 순위 매기듯이 한국인 수상자가 가장 많았고, 성적이 역대 최고이고, 이런 얘기를 너무 강조하는 건 조금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뒤집어 보면, '세계 1등' '한국인 석권', 이런 식이 아니면 문화부 기사가 중요하게 다뤄지기는 어려운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잘 하는 사람'과 '즐기는 사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나는 '잘 하는 사람이 많아서 즐기는 사람도 많아지고, 즐기는 사람이 많아서 잘 하는 사람도 많아지는' 선순환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진정한 '클래식 한류'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국인 음악가들이 아무리 잘 하더라도, 음악을 즐겨듣는 사람이 적고, 청중은 한정돼 있고, 음반도 안 팔리는 상황이라면, 무슨 소용인가. 물론 클래식 음악 시장이 상대적으로 협소한 건 현실이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더 '즐기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류 얘기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차이콥스키 콩쿠르 수상 소식이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박종민, 서선영이 부르는 곡을, 손열음, 조성진, 이지혜가 연주한 곡을 찾아 듣는 사람이 몇 명이라도 늘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언론이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조금 '오버'한 것도 그저 쓸데없이 흥분한 것에 그치지 않고, 뭔가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굳이 '세계 1등' '한국인 석권' 소식이 아니더라도 문화부 기사가 지금보다 더 의미있게 받아들여질 날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SBS 뉴스 인터넷 취재파일로도 송고했습니다.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