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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바이러스드라마가 뜨면서 ‘~마에라는 명칭이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해졌다. 김명민 씨가 맡았던 까칠한 지휘자는 극중 성이 강씨라서 강 마에로 불렸다. ‘마에마에스트로를 줄여서 부르는 말. ‘마에스트로(maestro)거장이라는 뜻으로 오케스트라 지휘자나 작곡가에 대한 경칭으로 많이 쓰인다. 그런데 마에스트로는 남성형이다. 그럼 여성 지휘자는 뭐라고 부르나? 바로 마에스트라(maestra)’.

사실 서양에서도 클래식 음악계는 굉장히 보수적이고 여성들에게 벽이 높았다. 빈 필하모닉은 오랫동안 여성 단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원들도 그런데 지휘자는 말할 것도 없다.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100여 명의 단원들을 통솔해 자신의 원하는 음악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다. 리더십과 결부된 지휘자라는 자리는 남성에게 적합하다는 통념이 오랫동안 클래식 음악계를 지배해 왔다. 특히 카라얀처럼 제왕적 카리스마를 지닌 강력한 지휘자상이 지배적일 때에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고 있다. ‘마에스트라가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남녀를 굳이 구분하지 않더라도, 음악계에서 지배적인 지휘자 상이, 제왕적 카리스마를 지닌 강력한 지휘자에서 민주적이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지휘자로 흐름이 바뀌어왔다. 여성 대통령, 여성 수상이 속속 등장하는 사회 전반의 변화도 빼놓을 수 없다. 해외에서는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의 시몬 영, 볼티모어 심포니의 마린 알솝 등이 대표적인 여성 지휘자로 활동해왔다.

우리 나라에선 여성 지휘자의 등장이 해외보다는 좀 늦은 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실 우리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여성 연주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 단원의 대다수가 여성인 경우가 많아, ‘여초가 일반적이다. 해외 오케스트라에서는 보기 힘든 현상이다. 앞서 썼듯 빈 필하모닉 같은 경우는 오랫동안 여성 단원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 음악평론가는, 우리 나라는 경제 발전기에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서양음악을 교양 있고 세련된 여성들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받아들이고, 여성의 음대 진학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던 게 한 요인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도 악기 전공자와는 달리, 오케스트라의 리더인 지휘자는 여성이 거의 없었다. 정부나 민간기업에서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 서구보다 훨씬 늦고 미흡했던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지휘자 김경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오케스트라 지휘자로는 현재 숙명여대 교수인 김경희 씨(왼쪽 사진)가 꼽힌다. 김경희 씨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89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서울시향을 비롯해 국내 주요 오케스트라를 두루 지휘한 경험이 있다. 지금은 과천시립아카데미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김경희 교수가 공부할 때만 해도 서양인 교수에게서 왜 여성이 지휘를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김경희 씨 이후, 한국인 여성지휘자의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다. 대표 주자로 성시연 씨를 빼놓을 수 없다. 2009년부터 서울시향의 부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30대 중반의 차세대 지휘자다. 본래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25살 때 지휘로 전공을 바꿨다. 게오르그 솔티 국제 지휘콩쿠르 우승, 구스타프 말러 지휘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 등 입상 경력도 화려하다. 제임스 레바인이 낙점해 전통의 보스턴 심포니에서 부지휘자로 활동했던 경력도 있다.

성시연 씨(오른쪽 사진)는 자신이 지휘를 시작한 계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는 영상을 우연히 봤는데 충격 비슷한 감명을 받았어요. 한 사람의 리더가 100여 명의 단원들에게서 200퍼센트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리더십, 그런 걸 나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는 지휘자는 뛰어난 음악성과 테크닉만 갖고 되는 게 아니라, 리더십과 소통 능력, 문제 해결 능력 등 여러 자질이 필요한 자리라고 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제임스 레바인을 존경하고, 말러를 비롯한 독일 작곡가들을 좋아한다는 성시연 씨는 저는 성격상 독재자가 될 수도 없고, 그냥 같이 음악을 만들고 같이 좋은 상황을 만들어 나가려는 쪽이예요라고 말했다. 또 자신은 아직 가는 도중에 있다며, 토스카니니의 말을 인용했다.

토스카니니가 그랬잖아요. 60세 되고는 이제 지휘가 뭔지 알겠다고. 저도 죽기 전에 지휘가 뭔지 좀 알고나 죽었으면 좋겠어요.”


대표적인 민간 오케스트라인 프라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전임 지휘자는 여자경 씨(왼쪽 사진)다. 오스트리아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다 귀국해 활발하게 연주하고 있다. 나는 여자경 씨를 2005년 국내 처음으로 열렸던 국제 지휘 콩쿠르인 수원국제지휘콩쿠르 수상자로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출산을 며칠 앞둔 만삭의 몸으로 지휘대에 올랐고, 특별상을 받았다. 당시 뱃속의 아이는 지금 일곱 살이 되었다. ‘워킹 맘의 고민도 토로하는 그에게서 나는 친근감과 동병상련을 느꼈다.

여자경 씨는 오케스트라 단원 각자도 음악회에 대한 책임이 있지만 결국 가장 많은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지휘자라는 자리는 남성에게든 여성에게든 쉬운 자리는 아니, 이를 즐기기 때문에 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자경 씨 역시 지휘자에겐 음악적인 면 이외에 인간적인 면이 굉장히 중요하고, 지휘를 하고 있지 않을 때도 사람들과의 만남이 중요한 자리라고 했다.

여자경 씨는 처음부터 지휘자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냥 음악이 좋아서 일반 전공으로 대학을 다니다 중도에 그만두고 음대 작곡과에 진학했고, 대학원에 간 것은 오페라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는데, ‘오페라 공부를 하려면 지휘를 해봐야 한다고 주변에서 권해서 지휘를 공부했단다. 공부를 하다 보니 자꾸 알고 싶은 게 더 생겨서 유학을 갔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자기 이름 앞에 지휘자라는 말이 붙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좋아하는 지휘자를 물었더니, 카를로스 클라이버, 그리고 구스타보 두다멜을 들었다. 특히 두다멜은 지휘할 때 단원들의 실력을 극대치까지 끌어내는 에너지가 아주 강한 것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또 다니엘 바렌보임은 자신이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다시 정신을 차리게 해 주는 분으로 존경한다고 했다.

직접 인터뷰하진 못했지만, 상하이 필하모닉 부지휘자를 역임한 이선영 씨, 스페인 왕립극장에서 지휘하는 등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은선 씨, 본래 첼리스트로 최근 지휘자로서 활동도 늘려가고 있는 장한나 씨 등도 주목 받는 마에스트라. 기사에 다 소화하진 못했지만, 이 밖에도 많은 여성 지휘자들이 활동하고 있고, 지휘를 공부하는 여성들도 점점 많아지는 추세다.

마에스트라가 뜬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남성 지휘자가 여성에 비해 훨씬 많은 게 사실이다. 전반적인 여성의 사회 진출은 분명히 늘었으되, 여성 고위직의 비율은 아직 절대 열세인 여타 영역과도 비슷할 것 같다. 하지만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사회 전반에 불어오고 있는 여풍이 지휘대라고 예외가 될 수 있으랴. 여성이라서 주목 받기보다는, 실력으로 평가 받는 마에스트라를 앞으로 더 많이 만나게 되길 바란다

*SBS 뉴스 인터넷 취재파일로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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