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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푸른 눈의 국악원로 해의만 선생을 인터뷰하고, 역시 귀화 외국인으로 한국 예술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로이 토비아스, 한국명 이용재 선생을 떠올렸다. 그는 한국 발레의 큰 스승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쯤 했던 마지막 인터뷰는 공들여 했던 만큼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인터뷰다. 클럽발코니 매거진과 졸저 '나도 가끔은 커튼콜을 꿈꾼다'에 실었던 글을 다시 올려본다.  

기자로 일하면서 참 많은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가 취재의 알파요 오메가라지만, 사실은 구색 맞추기 인터뷰, 의례적인 인터뷰를 위해 잠깐 스치듯 만난 사람들도 많다. 이런 경우는 인터뷰 대상이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 해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그러나 공들여 인터뷰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세월이 지나도 기억이 생생하고, 개인적으로 친근감을 느끼기도 한다. 


 무용가 로이 토비아스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1927년 미국에서 태어났고, 아메리칸발레시어터의 최연소 단원, 뉴욕시티발레 창단 멤버이자 수석 무용수를 역임한 세계적인 무용가다. 그러나 내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이런 화려한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1981년 국립발레단 객원 안무가로 한국과 첫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1988년 유니버설발레단 3대 예술 감독으로 취임해 한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으며, 1995년 서울발레시어터 창단과 함께 예술 감독으로 취임했다. 많은 작품을 안무했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가 없는 한국 발레의 오늘은 상상하기 어렵다. 

1999년, 그는 제자들의 나라인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고, 자신도 한국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용재’라는 이름의 한국인으로 귀화 수속을 밟았다. 용 龍 있을 在. 그는 경기도 여주의 ‘와룡(龍)리’의 시골집에 살면서(在) 한국인으로 늙어갔다.

내가 그를 인터뷰하고 싶어졌던 것도 그 즈음부터였다. 공연장에서 몇 번 선비 같은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고, 서울발레시어터 김인희 단장이 ‘로이 선생님’이라고 할 때 묻어나는 존경과 애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엔 스케줄이 안 맞아, 나중엔 그의 건강이 악화돼, 인터뷰는 몇 년간 이뤄지지 못했다. 마침내 인터뷰가 성사된 것은 지난해였다. 한동안 다른 부서로 갔다가 다시 문화부로 돌아오면서 인터뷰 요청을 했다. 건강이 더욱 나빠졌다는 소식에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그의 집을 찾아갔다. 눈부시게 화창한 봄날이었다.  

그는 당시 서울의 작은 아파트에서 간병인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고령으로 지병이 악화돼 거동이 불편하다고는 들었지만, 내가 인사하며 건넨 명함조차 받아들지 못할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명함을 받는 대신 ‘마음 같아선 춤이라도 춰드리고 싶은데...’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의 한국어가 서툴렀기 때문에 인터뷰는 영어로 진행됐지만, 낯선 외국인과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는 정말 ‘한국사람’이었다. 몸은 불편했지만, 정신은 그지없이 자유롭고 맑았다. 

그는 인터뷰 도중 자신이 처음 한국에 왔던 때를 회상하며 꿈꾸는 듯 아련한 눈빛이 되기도 했고, 마침 그날 집에 찾아온 김인희 단장을 비롯한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사랑과 긍지 가득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좀처럼 외부인을 만나지 않던 그가 인터뷰에 응한 이유도, 어렵게 발레단을 꾸려가는 제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였다는 얘기를 후에 전해 들었다. 

“한국 발레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에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한국 발레가 더 눈부신 꽃망울을 터뜨릴 때, 나는 살아서 그걸 볼 수 없겠지요. 하지만 지금 나는 행복해요. 지금은 봄이고, 봄은 모든 것이 자라나는 계절이니까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감하는 듯했지만 그의 표정은 밝고 환하기만 했다. 나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가 꼭 건강을 회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인터뷰를 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그 소망은 이뤄지지 못했다. 

 지난 8월 16일, 그가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터뷰를 한 지 1년이 조금 더 지나서였다. 당시 인터뷰는 결국 그의 생애 마지막 인터뷰가 된 셈이다. 한 대학병원에 차려진 빈소를 찾았다. 취재를 위한 것이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도 조문을 하고 싶었다. 서울발레시어터의 김인희 단장과 제임스 전 부부가 문상객을 맞고 있었다. 그리고 영정 사진 속의 그가 크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인터뷰하던 그날처럼 말이다.

“당신은 자식을 낳지 않으셨지만, 한국에 참 많은 자식들을 두고 떠나셨어요. 선생님은 저희들 모두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셨어요.” 유니버설발레단 문훈숙 단장은 인터뷰 도중 눈물을 흘렸다. 나까지 덩달아 눈시울이 붉어지려 했다. 줄곧 빈소를 지켜온 김인희 서울발레시어터 단장은 오히려 말갛게 담담한 얼굴이었다. 이미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렸으리라.

빈소를 나서면서 ‘이용재’라는 이름에 다시 한 번 눈길이 갔다. 용재.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용재’라는 이름을 가진 예술가가 또 한 명 있구나! 최근에도 나는 그를 만나지 않았던가.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음악적 성과뿐 아니라, 어릴 때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됐던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애틋한 가족사로도 잘 알려져 있는 바로 그 ‘용재’ 말이다. 그는 미국인 ‘리처드 오닐’로 자라났지만, 후에 스승인 강효 교수에게서 ‘용재(勇才)’라는 한국 이름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로이 토비아스와 리처드 용재 오닐은 공통점이 많다. ‘용재’라는 이름은, 미국인으로 태어났지만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은 두 예술가에게, 그 인연을 상징하는 소중한 이름인 셈이다.  


 내 머릿속에서는 어느새 며칠 전 세종체임버홀에서 리처드 용재 오닐이 연주했던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슬프도록 아름답고 절절한 선율이, 한국 발레 큰 스승의 영전에 바치는 깊은 추모의 음악처럼 느껴졌다. 나는 잠시 멈춰섰다. 나는 이 순간, 고인과 인터뷰로 맺은 작은 인연을 기억하는 담당 기자요, 발레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고인을 추모하는 나름의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용재’의 음악으로 ‘용재’를 떠나보낸 것이다.<2006년 10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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