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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작곡가 원일 씨를 만나서 얘기를 하다 보니 올해초 봤던 국립극단의 연극 '오이디푸스'가 생각났다. 원일 씨는 이 연극의 음악을 맡았는데, 매 공연에 출연해 직접 연주했다. 원일 씨의 연주에는 슬픔과 비장함이 가득해 나를 숙연하게 했는데, 알고 보니 사연이 있었다. 옛 블로그에서 옮겨온 글이다. 


국립극단의 연극 ‘오이디푸스’를 봤다. 수요일 오후 2시 공연. 처음 2시 공연을 하기로 할 때, 극단측에서는 걱정도 했다고 한다. 보통 2시 공연은 주부 관객을 주 타겟으로 하는데, ‘오이디푸스’가 주부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첫 2시 공연은 매진이었다. 저녁 공연도 연일 성황이란다.  

 

연출가 한태숙 씨의 스타일을 좋아한다. 그는 비극에 어울리는 연출가다. 내가 본 한태숙 연출작은 어린이극 ‘우당탕탕 할머니의 방’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비극이었다. (그렇다고 ‘우당탕탕 할머니의 방’이 그가 연출한 비극보다 못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연출한 작품은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 어렵다. 항상 보고 나면 뭔가 묵직한 질문을 몇 개씩 넘겨받은 느낌이다.

 

‘오이디푸스’도 그랬다. 원작 자체가 2500년 동안이나 사랑 받고 있는 그리스 비극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낳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극중에 나오는 ‘한치 앞도 모르는 운명 앞에 우린 모두 장님’이라는 대사처럼,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운명 앞에 발버둥치는 인간의 이야기다.

 

한태숙 씨는 그리스 비극의 정형성은 버리고, 이 작품을 현대적으로, 상징적으로 연출했다. 원작의 코러스는 다섯 명의 시민으로 축소돼 ‘민중’을 대표한다. 이들이 매달려 있는 가파른 벽은 짧은 민중의 삶이 이뤄지는 세상이다. 기둥들이 박혀 있어 묘비가 세워진 공동묘지 같기도 하고, 가시가 솟은 낭떠러지 같기도 하다. 날카로운 꼭지점이 무대 뒤쪽을 뚫고 나갈 듯한 삼각형 바닥은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다. 안온함과는 거리가 멀다. 눈먼 예언자 테레시아스와 함께 나왔던 기괴한 ‘새’는 막이 내릴 때까지 이 모든 ‘인간 비극’을 지켜보는 목격자로 등장한다.

 

한태숙 씨가 연출한 ‘레이디 맥베스’에서 밀가루라는 소재를 인상적으로 활용해 인간의 죄의식을 표현했던 이영란 씨가 이번 작품에도 합류했다. 이번에는 분필이다. 이영란 씨는 극이 진행되는 동안 무대 한쪽에 세워진 가파른 벽에, 그리고 무대 바닥에 분필로 그림을 그린다. 분필 그림이 그려지고, 지워지고, 뭉개지고, 가루를 흩날리면서, 인간의 삶을 은유한다. ‘사람 인’ 자와 닮은 오이디푸스의 운명의 세 갈래 길도 분필로 그려진다. 이른바 ‘물체극’을 개척한 선구자 이영란 씨의 내공을 느낄 수 있다. 

 

오이디푸스처럼 참혹한 운명의 극단을 모두가 겪는 건 아니라 해도, 우리 모두는 ‘한 치 앞도 모르는 운명 앞에 장님’이라는 점에서 오이디푸스와 같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은 미리 정해진 역할만 하면서 살아가는 걸 거부한다. 파국을 예감하면서도 진실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진실을 알게 된 후 손으로 눈을 찔러 스스로 눈멂을 택하고, 스스로 목숨 끊음을 택하는(원작에서는 오이디푸스가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으로 나오지만) 오이디푸스의 모습은 그대로 운명의 주인이 되고자 발버둥치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고통스럽고 비극적이지만 그게 인간의 삶인 것이다.

'오이디푸스’를 보다 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오이디푸스는 운명의 덫에 걸린 희생자다. 그는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 자식을 낳는 ‘끔찍한 죄’를 저지르도록 ‘예정’된 운명에 따라 살게 된다. 끔찍한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했던 모든 일들이 결국은 더 깊은 운명의 구렁텅이 속으로 그를 끌어들였다. 모든 것이 밝혀지는 순간 ‘파국’이 닥칠지 모른다는 예감을 안고서도, 그는 어떻게든 얼키고설킨 운명의 실타래를 풀어내려 애쓴다. 그 과정 자체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저주하고, 자신을 더욱 견고한 덫에 갇히게 만드는 것인데도. 


아, 이 작품을 보면서 내 가슴이 더 먹먹해진 이유를 이야기해야겠다. 어느 작품에서나 그렇지만, 특히 이 작품에서 음악의 역할은 크다. 음악을 작곡한 원일 씨는 연주까지 맡아 무대 한쪽에서 극 진행 내내 직접 아쟁을 뜯고, 두드리고, 구음을 내기도 하며 작품의 비극적 분위기를 끌고 가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다. 음악의 분위기도 그랬지만, 음악을 연주하는 그의 모습 자체가 비장했다. 특히 공연을 마치고 퇴장하는 원일 씨의 표정이 너무나 슬퍼 보여 나까지 숙연해질 정도였다.

알고 보니 내가 공연을 본 바로 그 날 원일 씨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한다. 그는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서도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한 것이다. 그의 음악은 대체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랬구나…… 그의 슬픔의 무게가 어떠했을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라야 했던 무대의 무게는 어떠했을지. 나는 가슴이 아파왔다. 그리고 무대를 지키며 혼을 담은 음악을 들려준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는 이후 공연에도 계속 출연하고 있다.  

요즘은 세상사가 답답해 가볍고 유쾌한 공연을 보고 싶을 때가 많다. 하지만 ‘비극’ 오이디푸스가 나에게 연극 보기의 즐거움을 새삼 깨닫게 했다. 유쾌하고 즐겁게 웃는 것만이 연극 보기의 즐거움은 아니다. 손진책 예술감독의 말대로, 연극은 인간에 관한 질문이자 이야기로서 본원적 가치가 불멸인 장르이다. ‘오이디푸스’에는 이런 연극 고유의 원형적 생명력이 넘쳤다. 답을 쉽게 알 수 없는 질문들로 가슴은 먹먹했고, 슬픔도 느꼈지만, 나는 더 충만해져서 돌아왔다. 아마 이게 오이디푸스를 보려는 관객들이 연일 넘쳐나는 이유일 것이다. <11-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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