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람의 <억척가>을 본 지 꽤 되었건만 아직도 감흥이 다 식지 않았다. 며칠 전 한 기자간담회에 갔다가 만난 작곡가 원일 씨는 <억척가>가 지금까지 해온 판소리 현대화 작업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성취라며, 이를 곧 글로 정리해 볼 생각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늘 글을 써서 공개했다. 원일 씨의 양해를 얻어 내 블로그에 퍼왔다.
2011년 6월 19일 일요일.LG아트센터. '억척가' 공연의 마지막 순간, 가슴에 밀려드는 벅찬 기분을 나는 좀처럼 가늠하기 힘들었다. 사람들의 계속되는 기립박수의 함성 속에서 오늘 공연내내 듣고 보았던... 모든 순간들이 또 다시 빠르게 떠올랐다.
마지막 인사를 한 후 쏜살같이 무대뒤로 사라지는 이자람을 쫒아가며... 그녀의 두 손을 잡던지 아니면 안아주기라도 해야 감사한 마음과 축하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것만 같아 무대... 뒷편으로 몰래 가보았을 때, 거기에.. 바닥에 쓰러져 실신직전의 상태로 아무말도 못하고 이자람은 거친 숨을 고르며 스태프들과 악사들의 걱정스런 눈빛에 둘러쌓여 있었다. 그래도 나는 용기를내어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가 눈빛을 마주치고 가볍게 두 볼을 감싼 후 "고맙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 기분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하나 판소리... 판소리... 아! 위대한 판소리... 이 자람... 이자람... 아!... 위대한 창우 이자람, '억척가'연습도중 너무 지치고 힘들어... 외롭다고 호소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이 자람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우리 모두는 다 외로워"라고 천연덕스레... 그러나 마음의 고통을 숨기고 그녀를 다시 우뚝 추스려 세웠다던 남인우 연출의 뚝심과 저력. 고수의 확대격인 음악반주자 세명의 믿음직스러운 모습들... 오랜기간 함께한 사람들이 보여준 조화의 호흡이 공연내내 살아있었다.
능란한 연기자이며 이야기 꾼, 오페라 가수, 클럽가수, 트롯트 가수, 연기자, 춤과 발림... 싱어송 라이터... 그렇게 그녀는 공연내내 관객들에게 <천의 재능을 가진... 영웅>으로 다가왔을것 같다.특히 이 공연의 음악적 백미로 꼽을 수 있는 2막의 첫 노래... '새 타령'은... 진정 우리의 노래가 무었인지 그리고 노래가 얼마나 인간에게 깊은 감동의 체험을 선사 할 수 있는 예술인지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전통을 알고 창작하는 노래가 무었인지 들려준 완벽한 모델이 되리라...
유유한 우조와 계면조를 넘나들며 적벽가에 나오는 수없이 죽어간 조조 군사들의 원혼을 풍자하는 새타령을 넘어 이와는 전혀다른 이자람 버전의 우아하고 깊이있는 새타령이 탄생한것이다. 요즘 유행한다는 '나는 가수다'의 모든 가수들이 만약 '억척가'를 보았다면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나가수'의 모든 가수를 다 모아놓는다 해도... 그들이 내게 콘서트표를 공짜로 제공해준다해도... 나는 억척가의 이자람이 직접 고심하고 작창(작곡)하였다는 그 노래를 한번만 더 들을 수만 있다면 모든것을 포기하고 당연히 억척가의 '새 타령' 듣기를 선택하겠다. 그 만큼 그 노래는 깊이와 순수성과 전통의 생명력을 담고 깊은 감정과 공허한 마음의 공간에 스며들었다. 적벽가의 새타령을 염두에 두었을... 전쟁의 폐허 한복판을 처연히 걸으며 한 가객이 부르는 듯한 장면을 연출한... 억척가의 새타령을 들으며 내 두 눈 가득 고이던 눈물은 내가 찾아 헤매던 무었인가를 위로하고 채워주는듯했다.
이 공연이 지금까지 판소리 현대화 작업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성취로 기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와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판소리가 무었인지 이해해야한다.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억척가의 작업이 평가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브레히트의 사회 비판적 리얼리즘극의 메세지는 이 팀워크의 정신을 대변하며 인간답게 산다는게 무었인지 묻고있다.전통 판소리가 함축 하고있는 배우의 총체성을 '창우' 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판소리 창우>는 그야말로 서양의 공연예술 개념에서는 부분적으로밖에 설명되어질 수 밖에 없는 우리 고유한 개념이다. 재능만이 아닌 정신과 철학을 지닌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이 귀하게 느껴지는 요즘,우리는 진정 '창우'의 개념적 외연을 넓히고 이를 우리고유의 메쏘드로 적극 개발,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작 브레히트 원작의 '사천의 착한 선인들'을 '사천가'라는 이름으로 함께 작업했던 남인우 연출과 이자람의 호흡은 또다시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자식들'을 각색한 '억척가'에 이르러 판소리의 현대적 계승 방법의 눈부신 장면을 만들어 내었다. 분단국가에 살며 전쟁의 공포와 참상을 전혀 체감할 수 없는 우리들의 부조리한 사회상을 반영하듯 진짜 서민들의 이야기를 예술적 내용과 형식에서 리얼리줌 미학으로 제시했다는 브레히트의 프레임은 동시대 한국의 관객들에게 "열악한 환경의 조건(억척가의 경우 전쟁)에서 인간다운 삶을 완성하는 당위성이 무었인가?" 라고 묻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한 여인의 처연한 이야기로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2시간 30분의 공연을 다섯번째 이어가며 체력이 모두 바닥났을 마지막 공연에서 혼신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 불사르는 이자람의 모습과 극속,억척어멈이 세 자식을 모두 잃고도 살아가야만 하는 마지막 장면을 지켜보며 감동의 일체감이 객석을 휘감는듯했다.
무엇보다 이자람이 들려준 다양한 음악적 변화의 능수능란함은 판소리가 어떻게 건강한 생명의 숨결을 지금 이 사회속에서 불어넣어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보여준다.이번공연을 놓친 사람들은 기다리자,그녀가 충분한 휴식을 가지고 돌아와 '억척가'의 다음 공연에 모습을 나타내기만을....
작성자: 원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