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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우드 펀딩'과 극단 '뛰다'의 개인후원회원 모집을 취재하고 어제 글을 한 편 썼다. 사실 나는 지난해 영국에서 봤던 개인의 예술후원 사례에 대한 글을 썼던 적이 있다. 재탕이지만, 블로그 이사 작업은 계속 진행 중이니, 이 기회에 다시 올려본다. 



영국에서 문화정책과 예술경영을 공부할 때, 영국인들의 생활 속에 스며든 기부 문화를 여러 차례 실감할 기회가 있었다. 영국에서는 공연장과 공연 단체 역시 주요 기부 대상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드시 부자들만 이런 ‘기부’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영국의 공연장들은 일반인들의 기부를 촉진하는 각종 방법을 동원하는데, 극장 좌석에 기부자의 이름을 새기는 건 아주 고전적인 예에 속한다. 요즘 국내 공연장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 사례다. 나는 버밍엄 히포드롬 극장의 사례가 재미있었는데, 이 극장의 좌석에는 단순히 기부자 이름만 새겨져 있는 게 아니라 ‘생일을 축하합니다’ 등등의 문구까지 있어 기부자의 개인적 사연까지 엿볼 수 있었다.



버밍엄 심포니의 상주 공연장인 버밍엄 심포니 홀은 지난 2001년 개관 10주년을 맞아 파이프 오르간을 새로 설치했는데 이 역시 버밍엄 시민들의 기부로 이뤄졌다. 이 파이프 오르간의 파이프 6천 개에는 각기 다른 주인이 있다. 기부자들은 자신의 파이프를 증명하는 기념 증서를 받았다고 한다.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RSC는 주 공연장을 리모델링하는 공사를 진행하면서, 10펜스(185원)에서 몇만 파운드까지, 다양한 액수의 기부금을 받았다. 기부 캠페인도 다양했다. 좌석에 기부자의 이름을 새기는 방식(Take your seat appeal)을 통해 벌써 100만 파운드(18억 5천만 원)가 모였다. 좌석 기부금은 1,200파운드(222만여 원)부터 시작하는데, 50파운드씩 24개월 분할 납부도 가능하게 했다. 이게 부담스럽다면 
‘벽돌 기부(Sponsor a brick appeal)’방식도 있다. 벽돌 한 장을 50파운드(9만여 원)에 기부할 수 있다.


  RSC 홈페이지에는, 학창 시절부터 RSC의 공연을 봐왔고 결혼 이후 22년간 RSC 인근에 정착해 살아왔다는 한 할아버지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아내를 추억하며 벽돌 기부 캠페인에 참여했다는 사연이 소개돼 있다. RSC가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중요한 부분이 돼 있다는 것을, 그래서 RSC의 새 공연장을 짓는데 기부하는 것 역시 이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RSC의 수입을 항목별로 따져보면 영국예술위원회의 지원금과 매표 수입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이런 기부금과 협찬금이다. RSC 세일즈 매니저 출신이었던 마케팅 과목 교수의 말에 따르면 이 중 개인의 ‘유산(Legacy)’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한다. RSC 공연 애호가로 평생을 지내온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 RSC에 재산을 남기겠다고 유언하는 경우가 꽤 있다는 것이다.

 RSC 마케팅 팀에는 이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이 있어서, RSC에 유산을 남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각종 법률 서비스까지 알선한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유산을 학교나 연구기관에 기부하는 사례가 가끔 지면을 장식하곤 하는데, 영국에선 공연단체에 유산을 남기기도 한다니, 영국인의 생활 속에 문화예술이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런 기부 활동을 촉진하는 ‘기프트 에이드(Gift Aid)’라는 제도가 있다는 것도 영국 문화계 현황을 배우는 개론 시간에 알게 되었다. ‘기프트 에이드’는 자선기관에 대한 기부를 촉진하기 위한 조세 감면제도다. 만약 영국에서 소득세를 납부하는 사람이 자선기관에 100파운드를 기부하고, ‘기프트 에이드’를 행사하겠다고 밝히면, 이 자선기관은 세금 환급으로 약 28파운드의 추가 이익을 얻는다. 즉 기부금 100파운드가 기프트 에이드 덕분에 128파운드의 효과를 내게 되는 셈이다.


  영국의 주요 공연장은 고객이 인터넷으로 공연을 예매할 때마다, 기부를 할 것인지, 만약 기부한다면 ‘기프트 에이드’를 행사할지 여부를 물어본다. 어떤 공연장은 디폴트 값으로 소액의 기부금을 미리 표시해 놓기도 한다. 물론 고객이 ‘기부를 안 하겠다’고 선택하면 기부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처음에 나는 ‘제 값 내고 표 사는데 기부까지 하나’ 싶어 귀찮았는데, 가만 보니 그만큼 영국인들에게는 기부가 일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우리 나라에서도 ‘기부 문화’의 필요성이 많이 거론된다. 일반인들의 기부 활동이 부쩍 활발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기부가 일상이 된 서구 선진국에 비해선 아직 갈 길이 멀다. 특히 문화계에서는 기부가 극히 한정된 부유층에만 해당되는 일로 여겨진다. 이런 면에서 우리 문화계는 좀 더 참신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로 일반인들의 참여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

 벽돌 한 장, 파이프 한 개마다 시민들의 정성이 깃들인 공연장이라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찾게 되지 않을까. 물론 시민들이 기꺼이 기부에 참여할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공연장들이 시민들의 여가와 문화 생활에 크게 기여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 조건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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