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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예술 후원과 관련된 글을 잇따라 올리고 있다. 지난해 썼던 이 글도 이김에 다시 올려본다. 역시 영국 연수 시절에 알게 된, RSC의 CRM과 기업의 다양한 문화 후원 방식에 관한 글이다. 씨엘로스 웹진에도 기고했다.
영국이 자랑하는 로얄 셰익스피어 컴퍼니(Royal Shakespeare Company. 이하 RSC). 셰익스피어의 고향인 스트랏포드-어폰-에이번(Stratford-upon-Avon)에 본거지를 두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주로 공연하는 극단의 이름이다. 몇 년 전 영국에서 연수할 때 살던 곳이 스트랏포드-어폰-에이번과 가까웠다. RSC는 스트랏포드-어폰-에이번의 전용 공연장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거의 매일 공연하고 있는데, 인기 공연은 티켓이 몇 달 전에 이미 매진되는 게 보통이었다. 부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RSC 코트야드 시어터. RSC 전용 공연장 가운데 가장 작지만 주건물이 공사 중일 때는 이 곳에서만 공연이 열렸다. 지금은 가장 큰 공연장이 개축 공사를 끝내고 문을 열었다.>
RSC의 마케팅은 영국 내 다른 공연단체들도 선망할 정도라는 얘기를 들었다. 마케팅 매니지먼트 과목을 수강할 때 RSC의 세일즈 매니저가 초청강사로 온 적이 있는데, 강연 주제는 RSC의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고객관계관리)이었다. CRM이라면, 개별 고객의 특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각 고객층에 최적화된 마케팅 활동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RSC가 CRM을 도입하기 시작한 것은 2003년이다. 당시 RSC의 매표 수입은 전체 수입의 3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40퍼센트는 정부 지원금, 9퍼센트는 기업 후원금에서 나왔고, 나머지는 개인 후원 등 기타 수입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RSC의 관객들은 점점 나이를 먹고 있었고, 개인 후원도 계속 줄어드는 추세였다. RSC는 더 많은 관객을 끌어들여야 했다.
RSC의 마케팅 팀은 흩어져 있던 RSC의 관객 데이터를 모아서 CRM을 위한 새로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지금까지 분리돼 있었던 매표 데이터와 마케팅 데이터, 기금모금 데이터를 단일한 고객 데이터베이스로 통합했고, 매표와 기부, 회원 가입과 좌석지정 등을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설계했다.
구체적으로는 기존의 RSC 관객 200여 만 명의 7년치 데이터를 분석하고, 런던과 스트랏포드-어폰-에이번 거주 관객들을 몇 개의 범주로 나눴다. 그리고 이 관객들을 다시 여러 잣대를 사용해 분석했다. 1년에 4차례 이상 RSC 공연을 관람하는 단골(Regular); 준 단골(Semi-regular); 인터넷 사용자; 가족 공연 관람자. 여기에 수입과 직업, 자녀의 나이, 라이프스타일 등등의 관련 자료 분석이 더해졌다.
RSC 세일즈 매니저는 방대한 관객데이터를 모으고, 이를 분류 체계에 맞춰 다시 입력하는 게 굉장히 귀찮은 작업이었지만, 새로운 데이터베이스 덕분에 이전에 몰랐던 관객층의 세세한 특성까지 알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이에 따라 마케팅 전략을 쉽게 세울 수 있고, 마케팅 활동의 효과도 매우 커졌다고 했다.
데이터 분석 결과, 공연 시간과 극장, 티켓 가격, 캐스팅에 따라 관객의 구성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런던 거주 관객들은 캐스팅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 관록의 배우 주디 덴치가 나오는 공연은 런던에서부터 오는 관객이 많다. 이런 식으로 관객의 특성을 세밀하게 알게 되면,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마케팅 활동을 할 필요가 없다. 주디 덴치가 출연하는 공연이라면, 주디 덴치 선호 관객층에 홍보 활동을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CRM은 이렇게 기존 관객층의 충성도 강화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관객을 개발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줬다. 외국인 관객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는 해외 어느 지역에 어떤 형태의 마케팅 활동을 집중해야 하는지를 알려줬다. RSC는 또 젊은 층을 관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16-25세 관객을 위한 5파운드짜리 티켓을 도입했다. 3만 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새로 RSC의 관객이 됐다.
RSC의 CRM은 공연 제작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RSC는 고객 데이터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2006년부터 2007년까지 1년에 걸쳐 셰익스피어의 전 작품을 공연하는 축제(Complete Works of Shakespeare Festival)을 열었다. 이 축제에서는 80여 년 RSC 역사에서 처음으로, RSC가 아닌 다른 극단들도 참여해 셰익스피어 작품 일부를 공연했고, 다양한 관객층을 위해 외국어로 공연된 작품들도 있었다. 이 축제 티켓은 스트랏포드-어폰-에이번에서 50만 장 이상 팔려나갔고, 이는 전년도 시즌에 비해 20퍼센트나 증가한 수치였다.
RSC의 이메일 회원인 나는 아직도 공연 안내 메일을 받고 있는데, RSC는 올 가을에 뮤지컬 ‘마틸다!’를 개막한다고 한다. 원작은 ‘찰리와 초콜릿 공장’ 등을 쓴 동화작가 로알드 달의 작품이다. ‘마틸다!’ 같은 공연들은 가족 공연을 선호하는 관객의 욕구를 반영한 것이다. 내가 아직도 스트랏포드-어폰-에이번 옆 동네에 살고 있다면,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망설이지 않고 표를 샀을 것이다.
RSC의 CRM은 공연 단체가 관객 데이터를 어떻게 분석하고 이에 따라 어떤 마케팅 전략을 수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였다. 하지만 내 관심을 더욱 끈 것은 이 CRM에 글로벌 컨설팅 업체인 액센추어(Accenture)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었다. 액센추어는 RSC에 데이터 분석을 위한 소프트웨어와 전문인력의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했다.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분석하는 데에는 전문적인 기술과 인력이 필요하다. RSC 내부 인력만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고, 외부 인력을 고용했다면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이는 액센추어가 벌이고 있는 주요 후원 활동 가운데 하나다. 액센추어는 RSC 외에도 루브르 박물관과 라인가우 뮤직 페스티벌, 골프 토너먼트 등의 공식 후원사이다. 액센추어는 후원 대상 기관이나 행사에 브랜드를 빌려주거나 후원금을 내는 것 외에도 자사의 전문적 기술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후원 활동을 하고 있다.
액센추어가 RSC에 기술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후원한 것은 직접적으로 돈을 내는 것 이상의 효과를 냈다. RSC이 CRM을 도입한 이후, RSC 회원은 40퍼센트 늘어났고, 회원의 공연 관람 횟수도 많아졌다. 매표 수입도 크게 늘어, 전체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5퍼센트에서 43퍼센트로 증가했다. 액센추어와 RSC의 긴밀한 관계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액센추어는 RSC의 유일한 ‘성공 비즈니스 파트너(High Performance Business Partner)’로서, RSC의 경영 전략 수립을 돕는다.
한국에서도 기업의 문화 후원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특정 문화행사에 후원금을 내주거나, 티켓을 대량으로 사준다거나, 혹은 직접 문화행사를 개최하거나 하는 방식이 많다. 이런 방식은 1회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기업의 문화 후원은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액센추어의 RSC 후원은 한 예일 뿐이다.
나는 문화부에서 공연을 취재하면서, 공연 단체들의 재정적 어려움도 문제지만, 경영 지식과 노하우가 없는 것도 문제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홍보 마케팅이 중요하다면서 보도자료 하나 제대로 못 쓰고, 변변한 관객 데이터도 없는 영세한 단체가 있는가 하면, 관객 데이터만 쌓아놓고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단체도 있다. 주 관객층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공연을 제작하기도 한다.
이런 공연 단체들에 관련 자문을 해주는 것도 일종의 ‘후원’이 될 수 있다. 꼭 돈 많은 대기업만 후원하라는 법도 없다. 중소기업이나 개인도, 작은 공연이나 단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후원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를 후원하는 기업이, 개인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RSC와 액센추어의 사례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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