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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에서

굿바이 학전 그린!

soohyun 2013. 3. 15. 00:14

댐 건설로 고향집이 수몰돼 더 이상 찾아갈 수 없는 사람의 심정이 이럴까. 2013년 3월 6일. 대학로 학전 그린 소극장에서 열린 이별 파티에서 나는 마음이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었다. 학전 그린 소극장의 폐관을 앞두고 열린 파티였다. 극장이 세 들어 있던 빌딩이 팔리면서 건물 용도가 바뀌어 문을 닫게 된 것이다. 

학전 그린 소극장은 1996년에 문을 연 이래 17년 동안 5천 회가 넘는 공연을 열어온 소극장으로  김민기 씨가 이끄는 극단 ‘학전’의 보금자리였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과 뮤지컬 ‘의형제’가 이 공연장의 주요 레퍼토리였으며, 뮤지컬 ‘모스키토’와 장진 연출의 연극 ‘허탕’이 초연됐다. 안치환 콘서트, 들국화 콘서트가 열리기도 했다. 최근에는 뮤지컬 ‘빨래’가 공연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 공연장을 다녀간 관객은 7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별 파티에는 그 동안 학전을 거쳐간 수많은 배우와 스태프들이 모였다. 극장 곳곳에서 함께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이야기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학전을 거쳐간 배우들이 많다는 것은 예전에도 알았지만,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더욱 실감이 났다. 김윤석, 장현성 같은 유명 배우들도, 최근 뮤지컬이나 연극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낯익은 얼굴들을 모두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역대 출연 배우들 모두가 무대에 서서 ‘지하철 1호선’의 한 곡을 아카펠라로 노래하는 장면도 펼쳐졌다. 헤어지기 아쉬운 이들의 이별 파티는 밤새 이어졌다. 

‘홈커밍데이’처럼 학전을 거쳐간 여러 세대의 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여 즐기는 분위기는 사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2000회, 3000회 공연 같은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때에도 볼 수 있었다. 황정민, 조승우 같은 배우들은 그 때 학전을 ‘고향집 같은 곳’이라고 표현했었다. 이번에도 떠들썩하고 발랄한 분위기는 비슷했지만, 느낌은 달랐다. 이 공간이 이제 영영 없어진다는 생각 때문에. 

내가 학전 그린 소극장을 처음 찾은 것은 1998년 가을이었다. 나는 이 때 기자 생활 시작한 이후 처음 문화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학전 그린 소극장은 문화부에 가서 맨 처음 찾아간 대학로 소극장이었다. 뮤지컬 ‘의형제’를 봤다. 배우 황정민, 배해선, 장현성, 권형준, 김학준을 '의형제'에서 처음 만났다. ‘의형제’를 연출한 김민기 씨를 처음 인터뷰했다. 

그 동안 나는 다른 부서로 갔다가 문화부로 돌아오고, 또 다른 부서로 갔다가 또 문화부로 돌아오고 하는 동안에도 취재하러, 아니면 그냥 공연 보러, 학전 그린 소극장을 꽤나 들락거렸다. 그리고 정이 들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참 여러 번 봐서 몇 번 봤는지 헤아리기도 힘들다. 돌이켜보니 다른 곳에서는 모든 것들이 어지럽게 변해도 학전은 ‘변함이 없다’는 게 좋았던 것 같다. 그 자리에 항상 있으면서, 처음 느낌 그대로 그 고집대로 작품을 만들어오고 있다는 것이. 

폐관을 앞둔 극장 곳곳을 둘러보며 이 곳에 내 추억도 몇 조각 걸려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극장을 취재 기자로, 관객으로, 가끔 찾았을 뿐인 나도 이런데, 삶의 한 기간을 온전히 이 극장에서 보냈을 배우나 스태프들은 얼마나 허전하고 아쉬울까. 극장 곳곳에 배우와 스태프들이 써넣은 ‘굿바이 그린’ ‘영원한 안녕은 아닐 거예요’ 같은 글들이 이들의 아쉬움을 실감나게 보여줬다. 

김민기 씨는 이 날 평생 안 하던 일을 했다. ‘신용카드 긁을 때 외에는 하지 않던’ 사인을 ‘지하철 1호선’ 악보집에 해서 파티 참석자들에게 준 것이다. 극장 객석 뒤편 좁은 공간에는 이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배우들이 김민기 씨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따뜻해졌고, 왜 배우들이 학전을 ‘친정집’, ‘고향집’으로 표현하는지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 학전 그린 소극장이 없어진다는 것은 친정 부모님이 오랫동안 사시던 집을 내놓게 된 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까. 

학전은 그린과 블루, 두 개의 소극장을 운영해왔다. 학전 그린 소극장이 문을 닫아도 블루 소극장은 그대로 있으니 학전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아주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러니 건물 주인이 바뀌어서 극장 한 곳이 문을 닫게 되는 게 뭐 그리 큰 일인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건물을 또 찾으면 되지 뭔가 문제인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극장을 단순히 ‘콘크리트와 철골로 이뤄진 건물’로만 보지 않고, 공연을 만드는 사람들의 땀과 눈물과 웃음과 꿈이 담긴 공간으로 생각한다면, 또 공연을 보는 사람들의 추억이 담긴 공간으로 생각한다면, ‘뮤지컬 1호선’ 같은 좋은 공연들의 산실로 대학로를 지켰던 학전 그린 소극장이 없어진다는 것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더구나 최근 많은 대학로 소극장들이 운영난을 겪고 있는 상황이니, 이 극장의 폐관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별 파티가 열렸던 날, 학전 그린 소극장 벽에서 본 글귀는 내 마음 속에도 새겨졌다.

굿바이 그린. 영원한 안녕은 아닐 거예요.    

*SBS 뉴스웹사이트에 취재파일로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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