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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에서

다시 만난 '팔리아치'

soohyun 2012. 8. 15. 14:12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한여름밤의 향연' 공연을 보고 왔다. 요즘 경기 필하모닉의 공연 기획 참 신선하고 좋다. 몇 달 전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합창과 함께 하는 바그너 갈라 콘서트'도 자주 연주되지 않는 바그너 오페라의 명장면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는데, 이번 공연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팔리아치'를 오페라 콘체르탄테(오페라의 연극적 요소를 덜어내고 콘서트 형식으로 연주하는 오페라)로 연주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 공연의 휴식 시간에는 한 시간 동안 와인과 음식이 제공되는 파티가 공연장 앞 야외 광장에서 진행됐는데, 마치 유럽의 어느 페스티벌에 와 있는 듯 여유롭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레온 카발로의 '팔리아치'는 작곡가도 서로 다르고, 처음부터 그런 의도로 작곡된 것도 아니지만, 공통점이 많아 같이 연주되면 최상의 '궁합'으로 묶인다. 사랑과 질투, 불륜, 복수, 살인 같은 인간사의 감정과 사건들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사실주의 오페라, '오페라 베리즈모'의 대표작으로 꼽히지만 국내에서는 자주 연주되지 않는다. 내가 두 작품을 함께 하는 실연을 본 것은 10여 년 전 예술의전당에서 국제 오페라단이 공연하는 걸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국립 오페라단이 조금 작은 규모로 한 번 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 공연은 보지 못했다. 서울시 오페라단이 몇 년 전에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만 따로 하는 걸 본 기억은 있다. 

'오페라 콘체르탄테'이니, 오페라의 무대장치나 세밀한 연출은 생략하고 음악에 집중한 공연이었다. 오케스트라가 가장 앞에, 주역 가수들이 중간에, 합창단이 뒤쪽에 위치했다. 가수들은 간단한 동선을 소화하며 노래했다. 오페라의 내용이 전달되는 데 전혀 무리가 없었고, 화려한 무대장치와 의상을 갖춘 오페라 못지 않은 재미를 안겨 줬다. 오케스트라는 구자범 씨의 지휘에 따라 드라마틱하고 집중력 있는 연주를 들려줬는데, 지난번 바그너 갈라 콘서트 때도 그랬지만, 구자범 씨가 지휘하는 오페라를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들게 했다. 


이번 공연은 특히나 남자 가수들이 돋보이는 공연이었다. (포스터에 표기된 소프라노 서혜연 씨는 사정상 출연하지 못했고 대신 이현정, 이지은 씨가 출연했다.) 두 편 모두에서 주역을 맡았던 테너 신동원 씨와 바리톤 유동직 씨가 발군이었다. 나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도 좋았지만, '팔리아치'에 더 끌렸고, 호소력과 박력을 모두 갖춘 신동원 씨가 '팔리아치' 중 카니오의 아리아 '의상을 입어라'를 부를 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아리아는 개인적인 사연이 있다면 있는 곡이기도 하다.  (그 사연에 대해서는 뒤에 덧붙이는 글에 적었다.)


나는 바리톤 유동직 씨 덕분에 '팔리아치'의 토니오 역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사실 '팔리아치'라면 대표 아리아 '의상을 입어라'를 부르는 카니오에게 관심이 집중되게 마련이다. 물론 비극의 중심에는 아내 넷다의 불륜 사실을 방금 알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현실과 내용이 비슷한 연극에 아내와 함께 출연해 관객들을 웃겨야 하는 상황에 처한 광대 카니오가 있다. 하지만 이번에 공연을 보니 '오텔로'의 이아고를 떠올리게 하는 토니오라는 역이 '팔리아치'에서 얼마나 중요한 캐릭터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번 공연을 보면서 '연극이 끝났습니다'라는 '팔리아치'의 마지막 대사는 살인을 저지른 카니오의 것이 아니라, 카니오에게 넷다의 불륜 사실을 알려줬던 토니오의 것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대사가 카니오의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사실 살인을 저지르고 제정신이 아닐 카니오보다는 토니오가 이 대사를 하는 게 훨씬 자연스럽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기억이라는 건 참 믿기 어려운 것이다(... 라고 처음에 썼었는데, 이 글 아래 댓글에 경기 필하모닉의 김원철 씨가 이 대사는 카니오가 하는 경우도 있다고 확인해 줬다. 레온카발로가 그렇게 해도 된다고 승인했단다. 다행이다.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으니.^^)


토니오는 이 모든 비극의 씨앗을 뿌리고 거두는 캐릭터다. 그는 넷다에게 짝사랑을 고백했지만 수치스럽게 거절당하는 꼽추 광대다. 앙심을 품은 토니오는 넷다가 실비오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고 넷다의 남편 카니오에게 이를 알려준다. 곧이어 벌어지는 연극에서도 토니오는 상황을 수습해 보려는 다른 출연자와는 달리, 내내 카니오의 분노에 불을 지른다. 이들의 극중극은 본래 희극이었지만, 결국 토니오가 의도한 대로 끔찍한 비극으로 끝난다. '연극이 끝났습니다'라는 토니오의 대사는 아주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데, 이 모든 비극을 '사주'했던 주도자가 하는 말이며, '프롤로그'로 관객들에게 말을 걸며 오페라를 열었던 토니오가 이 대사로 오페라를 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연을 본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장면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오페라 콘체르탄테'라고 해서  단순히 '오페라를 간소화한 공연'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 같다. 시각적인 재미는 오페라를 보는 것보다 덜할 수 있겠지만, 음악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은 큰 매력이다. 현실적으로 오페라를 올리는 게 쉽지 않은 상황에서 '오페라 콘체르탄테'라는 형식은 훌륭한 대안이 되기도 한다. 이번 공연은 매진이었다고 하고, 서울시향도 이번달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오페라 콘체르탄테로 국내 처음 공연하는데 벌써 표가 동났다고 한다. 그만큼 다양한 작품을 접하고 싶다는 음악 애호가들의 욕구가 커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경기 필하모닉의 다음 공연은 '펠리아스와 멜리장드'를 주제로 열린다. 드뷔시의 '작품을 오페라 콘체르탄테 형식으로 올리는 건가 했더니, 그건 아니고 마테를링크의 희곡 '펠리아스와 멜리장드'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된 관현악곡들을 연주한다고 한다. 포레와 시벨리우스, 쇤베르크의 곡들이 연주된다니, 같은 주제로 다른 시대에 쓰인 곡들을 비교해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역시 궁금하고 관심이 가는 프로그램이다.

언제였던가, 내가 사는 곳 근처인 고양 아람누리에서 열린 경기 필하모닉의 공연을 보고 나서 '경기 필하모닉이 우리 동네 오케스트라처럼 느껴진다'고, '기대되는 공연이 생겼으니 내 인생이 그만큼 더 재미있어진 셈'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요즘은 경기 필하모닉의 정기 연주회가 대부분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열려서 자주 가 보지 못하는 게 개인적으로 아쉽긴 하다. 나뿐 아니라 많은 애호가들에게 경기 필하모닉은 다음 공연이 궁금하고 기다려지는 오케스트라가 된 것 같다. 기다려지는 공연이 있다는 건 공연 애호가들에게는 정말 행복한 일이니, 경기 필하모닉의 참신한 공연이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좋겠다. 



*다음부터는 '팔리아치'의 '의상을 입어라'에 얽힌 개인적인 사연을 적은 글이다. 2년 전쯤 월간 SPO에 기고했던 글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연극은 끝났습니다'라는 대사는 토니오 것이지만, 카니오가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나는 카니오가 이 대사를 하는 걸로 알고 이 글을 썼다. .      

내가 언제부터 클래식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어린 시절 아버지가 즐겨 들었던 매우 낡은 LP 음반 한 장이 나의 음악 취향에 심대한 영향을 준 것만은 분명하다. ‘Ten Tenors & Ten Arias’ 음반이었다. 카루소, 비욜링, 디 스테파노, 탈리아비니 등 전설적인 10명의 테너가 각각 10곡의 유명 아리아를 부른 음반.


맨 처음 나를 매혹한 건 조심스럽게 턴테이블 위에 음반을 올려놓고, 바늘을 제 트랙에 위치시키고, 음반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음악이 울려 퍼지는 바로 그 과정이었다. 어느새 퇴근한 아버지가 마루 소파에 앉아 ‘텐 테너 좀 틀어봐라!’ 하면 음반을 가져와서 트는 ‘의식’은 나의 몫이 돼버렸다. 나는 음반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재빨리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 함께 음악을 듣곤 했다.


카루소가 부른 오페라 ‘팔리아치’ 중의 ‘의상을 입어라!’와 탈리아비니가 부른 ‘사랑의 묘약’ 중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아버지가 이 음반에서 가장 좋아한 노래였다. 나는 ‘남몰래 흐르는 눈물’은 좋았지만, ‘의상을 입어라’는 이상했다. 전혀 감미롭지 않았고, 중간에 나오는 웃음소리가 어색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자기는 굉장히 슬프고 괴로운데도 남들을 웃겨야 하는 광대의 노래’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이상한 웃음소리가 울음 소리 같기도 했다.

이 아리아에 정말 내 마음이 움직인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난 후였다. 아버지와 함께 음악을 듣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아버지는 하던 일이 어려워지면서 시간만 나면 혼자 등산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는 일이 많아졌다. 집안 분위기는 가라앉았고, 나는 내 방에 틀어박혔다. 그저 우울했다. 사춘기였나 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이 아리아를 오랜만에 다시 듣게 되었다.


라디오를 틀어놓은 채 시험공부를 하던 중이었는데, 전곡 감상 프로그램에서 오페라 ‘팔리아치’가 나왔다. 오페라 아리아는 여러 차례 들어봤지만, 오페라를 전곡으로 감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니 그날 방송된 ‘팔리아치’는 ‘내 인생 첫 오페라’라고 할 수 있겠다. 마리오 델 모나코가 주역을 맡았던 것 같다. 진행자는 ‘팔리아치’가 ‘오페라 베리즈모’의 대표작이며, 작곡가 레온카발로는 실제로 있었던 살인사건에서 힌트를 얻어 직접 오페라의 대본을 썼다고 설명했다. 처음 알게 된 사실이 실감을 더했다. 방송은 중간마다 줄거리 해설을 곁들여가며 이어졌다. 깊은 밤, 나직한 목소리의 해설을 곁들인 오페라에 나는 푹 빠져들었다. 어느새 시험공부는 뒷전이 됐다. 


“유랑 극단의 희극배우인 카니오는 아내 넷다의 불륜 사실을 알고 격분한 가운데서도 공연 시간이 다 되어,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올라야 합니다. 이때의 복잡한 심경을 토로하는 노래가 바로 ‘의상을 입어라!’입니다. 아내의 배신에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서도, 광대 분장을 하고 공연에 들어가 관객을 웃겨야 하는 주인공의 심정이 절절히 나타납니다.”


나는 ‘의상을 입어라!’를 들으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아리아만 따로 떼어 들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이제야 왜 이 사나이가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슬픔이, 절망이, 마치 내 것인 양 느껴졌다. 그의 처절한 절규가 내 가슴을 두드려댔다. 


“카니오는 역시 배우인 아내 넷다와 함께 무대에 오르지만, 점점 극 중 장면과 현실을 혼동하게 됩니다. 카니오는 넷다에게 애인의 이름을 대라고 종용하고, 카니오의 광기에 위협을 느낀 넷다가 애인 실비오를 부르자, 실비오는 무대 위로 뛰어오릅니다. 결국, 카니오는 아내와 그 연인, 두 사람을 다 찔러 죽입니다. 놀란 관객들 앞에서 카니오는 망연자실, '연극은 끝났습니다'라고 중얼거립니다.”

아아. 연극은 끝났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아내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망연자실한 카니오가 내 눈앞에 서 있는 것을 본 것만 같았다. 끔찍한 살인자였지만, 그가 한없이 가엾었다. 이렇게 불행한 사람이, 이렇게 외로운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혼자 실컷 울었다. 눈물이 마를 때쯤, 마음이 묘하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듣지 않았던 ‘텐 테너’ 음반을 꺼내 다시 듣기 시작했다. ‘의상을 입어라!’는 즐겁기는커녕 절망을 온몸으로 토로하는 곡인데도, 우울하고 짜증이 솟구칠 때 들으면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돌이켜 보니, 너무나 불행하고 고독한 사나이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슬픔에 함께 젖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이 말갛게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팔리아치’ 전곡 음반을 사고, ‘팔리아치’를 실제로 오페라 극장에서 본 것은 어른이 된 후의 일이었다. 음악을 듣고 상상만 했던 무대를 눈앞에서 보면서, 인생 역시 한 편의 연극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인생이 연극이라면, 우리 모두가 결국 변덕스런 인생에 휘둘리는 광대 같은 존재 아닐까. 비극으로 치달을지라도, 당장은 ‘의상을 입고’ 희극을 연기해야 하는 광대 말이다. 

나는 요즘도 가끔 ‘의상을 입어라!’를 듣는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딸 은우와 함께 들은 적도 있다. 그러고 보니 은우는 내가 이 아리아를 처음 들었을 즈음과 비슷한 나이인 것 같다. 은우가 처음 이 노래를 듣고 보인 반응 역시 ‘웃음소리가 이상하다’라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한테 들었던 설명을 은우에게도 해주었지만, 별로 관심을 갖는 눈치는 아니다.


은우는 클래식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름의 취향이 있고 생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은우도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되길 바란다. 예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의상을 입어라!’가 은우의 마음에 절실히 와 닿는 순간이 오게 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만약 은우가 이 노래를 정말 좋아하게 된다면, 그건 아마도 인생의 쓴맛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후, 인간에 대한 연민을 좀 더 느끼게 된 후일 것이다. (2010년 10월)


*SBS 뉴스 웹사이트 취재파일로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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