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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맥밀란이 안무한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을 유니버설 발레단의 공연으로 봤다. 원수지간인 두 집안의 남녀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국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는 이야기. 영화로, 연극으로, 뮤지컬로, 발레로, 참 여러 번 봤는데도 지겹게 느껴지지 않는 건 원작이 그만큼 매력적인 얘기라는 뜻이다. 물론 그만큼 원작을 잘 구현해 내는 작품이어야 한다는 건 당연지사. 이번에 발레를 보면서도 뻔히 아는 결말에 또다시 울컥 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발레를 볼 때 주인공이 아니면서도 계속 나의 관심을 끈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줄리엣에게 구혼하는 패리스였다. 그는 줄리엣의
부모인 캐퓰릿 부부가 줄리엣과 짝지어준 귀족이다. 그러나 줄리엣은 로미오를 만나기 전부터도 별로 패리스에게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캐퓰릿 가의 무도회 날. 원래 로잘린이라는 아가씨를
쫓아다니던 로미오는 패리스와 춤추는 줄리엣을 보고 첫눈에 반하고, 줄리엣 역시 로미오에게 운명적인 끌림을
느낀다.
부모가 맺어주려 하는 남자 패리스에는 관심이 없고, 부모가 싫어하는 남자 로미오에게 더욱 빠져드는 줄리엣. 로미오가
원수집안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나 부모가 짝지어준 남자 패리스가 있다는 건 오히려 두 사람의 사랑을 더욱 깊게 만든다. 부모의 반대나 주위의 장애가 연인의 사랑을 더욱 깊게 한다는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다. 패리스에 대한 줄리엣의 냉담함은 그만큼
배가된다.
줄리엣의 부모는 티볼트의 죽음 이후 하루라도 빨리 줄리엣을 패리스에게 시집 보내려 하고, 이미 로미오와 몰래 결혼한 상태였던 줄리엣은 운명을 건 선택을 하게 된다. 패리스와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날 아침, 줄리엣은 싸늘한 시신(사실은 로렌스 신부의 약을 먹고 죽은 것처럼 보이는 상태였지만)으로 발견된다.
결혼식날이 신부의 장례식날이 돼 버렸으니, 패리스에게는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패리스는 장례식을 마치고 캐퓰릿의 가족들까지 떠나간 후에도 줄리엣의 시신 발치에 홀로 남아 깊은 슬픔에 빠진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줄리엣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에 나타난 로미오가 칼을 휘두른다. 패리스는 로미오의 칼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다.
국립발레단에서 공연했던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로미오와 줄리엣 ‘버전에서는 패리스가 로미오의 칼에 맞아 죽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이 버전을 볼 때는 패리스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그리 많이 들지는 않았는데, 이번에 맥밀란 버전을 보면서는 자꾸 패리스가 측은해졌다. 나는 맥밀란 버전을 두 차례 봤는데, 그래서 두 번째 볼 때는 패리스가 등장할 때마다 표정이며 연기를 더 유심히 보게 되었다.
패리스는 줄리엣이 자신에게서 돌아설 때마다 난처한 표정으로 줄리엣의 부모를 쳐다본다. 미래의 장인 장모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 같다. ‘줄리엣이 날 외면하는데 어떻게 하죠? 어떻게 된 거죠?‘ 하고 묻는 듯하다. 그 때마다 줄리엣의 부모는 패리스를 안심시킨다. 줄리엣이 아직 어려서 뭘 몰라서 그래. 혹은 줄리엣이 티볼트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져서 그래. 이런저런 핑계를 댔을 것이다. 패리스는 결혼식 전날에는 조금 과감해진 모습을 보인다. 이제 넌 나의 신부야, 줄리엣! 싫다 해도 소용없어! 그는 몸을 비틀며 빼내려 하는 줄리엣을 억지로 끌고 춤을 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패리스는 신부를 얻지 못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여자를 사랑한 탓에 죽음까지 맞이한다. 줄리엣의 사랑을 얻지 못한 것도 통탄스러운데, 로미오의 손에 죽게 되니, 이렇게 불쌍한 남자가 없다. 그는 죽어서도 줄리엣의 동정심조차 얻지 못한다. 약에서 깨어난 줄리엣은 무덤에서 패리스의 시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달아나 버리는 것이다.
주인공인 로미오와 줄리엣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지만 이들은 죽음으로써 영원히 맺어지는 것이니, 패리스의 ‘개죽음’과는 성격이 다르다. 패리스의 죄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를 짝사랑한 것뿐인데. 눈치 없이 장인 장모 될 사람의 말만 믿고 이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죄라면 죄일까.
공연을 보고 나와서 유니버설 발레단 임소영 팀장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자꾸 패리스한테 관심이 가더라고요. 여기서 제일 불쌍한 남자인 것 같아요” 했더니 정말 그렇다고 맞장구를 쳐줬다. 그리고는 ‘지젤’의 힐라리온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패리스와 비슷한 캐릭터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젤’을 볼 때도 힐라리온이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었다.
‘지젤’의 힐라리온은 지젤을 짝사랑하는 사냥꾼이다. 지젤이 알브레히트와 사귀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알브레히트가 신분을 숨기고 거짓말을 하며 지젤과 사귀어왔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원래 심장이 약했던 지젤은 알브레히트가 사실은 약혼자가 있는 귀족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숨진다. 지젤의 시신 앞에서 힐라리온은 알브레히트와 결투를 벌이기 직전까지 간다. 두 남자는 서로 ‘지젤이 죽은 건 너 때문’이라고 탓한다.
지젤을 잊지 못하는 힐라리온은 지젤의 무덤을 찾아가 슬픔에 잠긴다. 그런데 지젤의 무덤은 남자에게 버림받고 죽은 처녀귀신 윌리들이 사는 숲에 있다. 윌리는 남자가 찾아오면 지쳐 쓰러져 숨이 끊어질 때까지 춤을 추게 하는 방법으로 복수하는 원혼이다. 따라서 윌리들의 숲을 찾아온 힐라리온 역시 복수의 대상이 된다. 그는 윌리들에게 붙잡혀 춤추다 쓰러져 죽는다. 역시 윌리들에게 잡힌 알브레히트가 지젤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목숨을 구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패리스가 줄리엣의 무덤에서 살해된 것처럼, 힐라리온 역시 자신이 사랑했던 지젤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죽음을 당한다. 지젤은 죽어서 윌리가 된 후에도 알브레히트 구하는 데에만 마음이 가 있지, 힐라리온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참 불쌍한 남자다. 힐라리온 역시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를 짝사랑했던 죄밖에 없다. 눈치 없이 알브레히트의 거짓말을 폭로하면 지젤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던 것도 죄라면 죄일까.
패리스와 힐라리온 처지에서 보면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지젤’의 결말은 선택 받지 못한 자의 불행한 최후다. 주인공의 시각에서는 죽음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 두 사람은 주인공인 두 남녀의 사랑에 ‘장애물’로 존재하면서 이 사랑을 더욱 깊게 하는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를 낳고는 죽음을 맞이하는 캐릭터들이다. 눈치 없이 사랑한 죄밖에 없는 불쌍한 남자들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인 걸 어떻게 하랴.
‘로미오와 줄리엣’과 ‘지젤’을 보고 주인공이 아닌 패리스와 힐라리온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다니.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짝사랑의 경험을 해봤을 터이니,
이들의 아픔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라 믿는다. 이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로미오와 줄리엣’과 ‘지젤’의 사랑 이야기는 완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SBS 뉴스 웹사이트에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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