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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색 피아노들이 아름다운 새 옷을 입었다. 경기도 문화의전당의 피스&피아노 페스티벌 중 한 행사로 열린 ‘팝업 피아노’ 얘기다. 뉴욕 맨하탄에서 설치 미술가들이 거리에 피아노를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누구나 자유롭게 칠 수 있도록 했던 ‘pop-up pianos’ 이벤트에서 힌트를 얻어 기획했다.

경기도 문화의전당은 먼저 어린이 청소년 시설에 피아노를 보내기 위해 개인이나 단체로부터 기부를 받았다. 그래서 피아노 다섯 대가 마련됐다. 이 피아노에 화가들이 재능 기부로 그림을 그렸다. 검정색 피아노의 표면이 화가의 캔버스가 된 셈이다. 참여한 화가들은 김덕기, 김일동, 아트놈, 윤승희, 추혜인. 각자의 개성을 살린 ‘세상에 다시 없는 특별한 피아노’들이 이렇게 탄생했다.

개성 만점의 미술 작품으로 탄생한 피아노 다섯 대는 공연장에 전시돼 누구나 구경은 물론이고 직접 쳐볼 수 있도록 했다. 눈으로 볼 수만 있는 일반적인 미술 전시회와는 다르다. 이 프로젝트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피아니스트 박종훈 씨는 화가들의 작업 과정을 지켜보고, 함께 의논해 개성 만점의 이 피아노들에 맞는 곡들을 선곡해 음악회를 열었다.

이 음악회를 위해 경기도문화의전당 야외 무대에는 모두 여섯 대의 피아노가 설치됐다. 일반적인 연주용 그랜드 피아노와 화가들이 미술작품으로 탄생시킨 피아노 다섯 대. 박종훈 씨는 ‘한 음악회에서 이렇게 많은 피아노를 연주하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음악회에는 화가들도 출연해 자신의 작품에 대해 피아니스트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먼저 그랜드 피아노로 작업한 김일동 작가의 작품(맨 위 사진). 디지털 이미지 시뮬레이션을 통해 출력된 시트지를 피아노 표면에 부착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예술은 나비요, 관객은 꽃이다. 콘서트 현장의 꽃과 같은 존재인 관객들을 향해 날개를 활짝 벌리며 날아가는 나비로 피아노를 형상화했다. 박종훈 씨는 이 피아노로 우아한 날갯짓이 보이는 듯한 쇼팽의 왈츠를 연주했다. 그랜드 피아노의 상판에 그려진 그림이 잘 보이도록, 평소 연주회에서 그랜드 피아노가 놓이는 방식과는 반대로 놓였다. 
이미지추혜인 작가의 작품(위 사진)은 피아노의 광택을 살린 채 오일스틱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 활기찬 도시의 야경, 흥겨운 재즈 음악의 선율을 생각나게 한다. 음악회를 진행한 박종훈 씨가 이 피아노를 보고 떠오른 느낌을 묻자 객석에서도 비슷한 대답이 나왔다. 박종훈 씨는 이 느낌을 살려, 이 피아노로 경쾌한 재즈 곡을 연주했다. 
이미지다음은 윤승희 작가의 작품(위 사진)이다. 판화를 전공한 작가는 대상을 음각해 색을 칠했다. 무성한 나뭇잎들 사이로 발레리나의 모습이 비친다. 집안의 공간을 피아노 표면에 구획하고 작은 인형 같은 일상의 오브제들을 사랑스럽게 담았다. 비밀스러운 소녀의 꿈을 속삭이는 듯하다. 다른 피아노들도 다 멋졌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피아노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집에 한 대 있으면 피아노를 정말 열심히 칠 것 같다. 박종훈 씨는 이 피아노에서는 소녀의 꿈을 담아낸 듯한, 잔잔한 느낌의 자작곡을 연주했다.

이미지다음은 아트놈 작가의 작품(위 사진). 피아노 광택을 제거하고 귀여운 캐릭터를 배치해 밝은 색채의 그림을, 완성했다. 작가의 이름처럼 통통 튀고 유쾌한 작품이다. ‘해피 바이러스’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다. 작가는 이 피아노가 기부될 곳의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그렸다고 한다. 박종훈 씨와 선곡을 논의할 때, 농담으로 ‘강남 스타일’을 쳐달라 했는데, 박종훈 씨는 ‘강남 스타일’을 연주하는 대신 작가는 춤을 춰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단다. 결국 관객들은 ‘강남 스타일’ 연주와 함께 작가의 익살스런 말춤을 보너스로 관람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이 피아노에서는 또 관객 중 한 명과 박종훈 씨가 즉석에서 함께 연주한 ‘젓가락 행진곡’ 변주도 울려퍼졌다. 
이미지마지막으로 김덕기 작가의 작품(위 사진). 작가는 광택을 제거한 피아노를 하얗게 칠한 다음, 다시 황금처럼 소중한 일상을 의미하는 밝은 노랑색 물감을 채색했다. 그리고 ‘일상의 행복’을 주제로 한 그의 작품 시리즈에 자주 등장하는 아기자기한 집들과 나무들을 그려 넣었다. 박종훈 씨는 개인적으로는 이 피아노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는 작가가 요청한 대로, 따뜻한 일상의 행복이 묻어나는 이 피아노로 ‘고향의 봄’을 연주했다. 후반부에는 관객들이 함께 ‘고향의 봄’을 노래하는 흐뭇한 광경도 연출됐다.

이 음악회에는 내년 피스&피아노 페스티벌에 주요 연주자로 참가할 예정인 젊은 유망주 윤홍천, 김준희, 김다솔 씨가 우정 출연해 박종훈 씨가 편곡한 군대 행진곡 등을 함께 연주하는 순서도 있었다. 네 대의 멋진 피아노로 네 명의 멋진 피아니스트들이 함께 만들어낸 화음에 관객들은 열렬한 반응으로 화답했다.

이 음악회는 피아노가 보내질 곳 식구들을 비롯해 모두 천 여 명의 관객들이 무료로 관람했다. 피아노를 기부한 사람들도, 기부 받을 사람들도, 작업에 참여한 화가도, 피아니스트도, 관객도 모두 행복해 했다. 윤승희 작가는 ‘이 피아노를 보고 어린이들이 저처럼 예술가의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음악회가 끝나자마자 관객들은 무대에 올라 피아노를 가까이서 구경하고, 쳐보기도 하고, 피아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는 등 자리를 뜰 줄 몰랐다.

미술작품이 된 이 피아노들은 이후에도 며칠 동안 경기도문화의전당 곳곳에 전시됐는데, 많은 관객들이 즐겁게 피아노를 연주했다 한다. 나도 쳐봤다. 사실 나도 어린 시절에 배웠던 피아노의 매력을 잊지 못해 지금도 가끔 시간 날 때마다 피아노를 치고 있으니, ‘누구든 와서 쳐보라’는 이 멋진 피아노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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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직접 ~해봤습니다’는 말은 기자의 스탠드업으로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취재하다가 내가 직접 피아노를 쳐보는 장면을 스탠드업으로 촬영했고, 이 스탠드업이 포함된 리포트는 추석 연휴 첫날  8시 뉴스에 방영됐다(아래 동영상. 대문 화면은 아트놈 작가의 말춤 장면이다). 아주 짧게 연주한 것이지만 이 스탠드업 장면을 두고 회사 내에서는 말들이 분분했는데, 시청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하다^^.


화가와 피아니스트가, 미술과 음악이, 시각과 청각이 만나는 자리. 일반인들이 예술과 친근하게 만날 수 있는 기회. 여기에 따뜻한 기부 문화까지 결합된 유쾌한 이벤트.  경기도문화의전당은 이번 ‘팝업 피아노’ 이벤트에 대한 반응이 굉장히 좋아, 내년에는 더욱 확대할 예정이라 한다. 내년에는 어떤 멋진 작품이 탄생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크다.  

*SBS 뉴스 웹사이트 취재파일로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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