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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지젤내한공연이 얼마 전에 끝났습니다.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공연이었어요. P 40만원에서부터 입방아에 오르더니, ‘세계 3대 발레단마케팅에, 막판에는 볼매 지젤(볼수록 매력적인 지젤)’ 같은 이벤트까지, 무리수가 많았어요. 오류와 오역이 많았던 프로그램 책자도 내한공연 기획사가 얼마나 발레에 대한 이해가 없는지를 잘 보여줬습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근간에 그렇게 빈 자리가 많은 건 처음 봤습니다. 결국 흥행 참패로 끝났지요

공연 내용 자체는 좋았기에 더욱 아쉽습니다
. 합리적인 가격과 마케팅이 받쳐줬다면 이 정도의 공연이 그렇게까지 실패할 수가 없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가 역시 스타의 산실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첫날 줄리 켄트와 마르셀로 고메즈가 출연한 공연을 보고 명불허전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고, 최근 ABT 수석무용수로 승급한 서희 씨 역시 자신의 매력을 잘 살려낸 아름다운 지젤을 보여줬어요


돌이켜보니 전 이 공연 관련 기사를 계속 써온 셈이네요
. 지난 5월에는 P 40만원 문제를 지적하는 기사를 써서 예술의전당에서 P석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정책을 발표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지난 20일에는 금요일 8시뉴스 문화로코너에서 세계 3대 발레단을 내세운 마케팅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한국에서만 통하는 세계 3라는 제목으로, 세계 3대 발레단, 세계 5대 뮤지컬, 하는 식으로 세계 몇 대 하는 식의 수사를 좋아하는 풍토를 꼬집는 기사였어요. (제가 쓴 건 아니었지만 함께 공연을 취재하는 기자가 ABT 내한공연 소개 기사도 썼고, 서희 인터뷰 기사도 나갔습니다. 공연 자체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P
석에 이어 또다시 ABT 내한공연 관련 기사를 쓰게 된 건 얼마 전에 제가 썼던 세계 3대 발레단? 3대 로맨스 소설?’이라는 제목의 글이 발단이었습니다. 제 글을 보고 이런 내용으로 TV뉴스에도 기사를 쓰면 어떻겠느냐는 얘기를 저희 회사 동료인 이현식 뉴욕 특파원이 하더군요. 안 그래도 발레계에서는 세계 3대 발레단얘기가 화제가 되고 있었고, 발레 애호가들은 세계 3대 발레단마케팅에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TV 뉴스에서는 그 동안 다뤄보지 않은 종류의 기사지만, 한 번 써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쓰기 위해 국립발레단 최태지 단장
, 유니버설 발레단 문훈숙 단장, 서울발레시어터 제임스 전 예술감독, 이 세 사람을 인터뷰했습니다. 제 생각에 제 기사의 관건은 우리 나라 발레를 대표하는 비중 있는 인사들이 육성으로 세계 3대 발레단이라는 말에 대한 견해를 얘기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발레뿐 아니라 다른 장르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무용. 음악 칼럼니스트 유형종 씨에게는 좀 더 전반적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인터뷰를 청했습니다


이들에게 물었습니다
. ‘세계 3대 발레단이 어디어디냐고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내한공연 기획사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가 파리 오페라 발레단, 영국 로열 발레단과 함께 세계 3대 발레단이라고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인터뷰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런 말은 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라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훌륭한 발레단들이 많은데, 그 중 3개 단체만 골라서 세계 3대 발레단으로 꼽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유형종 씨는 뚜렷한 기준만 정해지면 선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근본적인 순위라든지 예술을 감식하는 절대적 잣대라든지 이런 식으로 보는 건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뚜렷한 기준만 정해지면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덧붙입니다. 가끔 음악 전문지에서 세계 10대 오케스트라하는 식으로 전문가들의 의견을 받아 몇몇 단체를 선정하는 것을 봅니다.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가 2008년 영국의 권위 있는 그라모폰 지에서 선정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였다는 정보가 그래서 나온 겁니다. 이런 경우는 선정 기준이나 출처가 분명히 밝혀져 있으니 의미 있는 정보로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인의 취향은 각각 다른 것이니 아무리 전문가가 세계 최고로 뽑았다 해도 내가 좋아하는 오케스트라하고는 다를 가능성도 크지요. 그러니까 참고는 하되 절대적인 순위로 보는 건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제가 인터뷰한 발레계 인사들은 수많은 발레단 중에 세 단체만 뽑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세계 3대 발레단이라는 말 자체를 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굳이 기준을 정해 뽑는다 해도, 발레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러시아의 볼쇼이나 마린스키 발레단이 빠져 있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공연기획사는
세계 3대 발레단을 이번 공연 마케팅의 초점으로 삼았습니다. 선정 기준도 출처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기획사 관계자에게 물었더니, 이 말의 출처는 특별히 없고,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세계 3대 발레단이라는 말이 있길래 ABT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이 표현을 썼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 세계 3대 발레단이라는 표현은 이번 ABT 공연 기획사가 처음으로 쓴 말은 아닙니다. 예전에 ABT가 왔을 때에도 가끔 등장했던 말인데,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받아쓴 것이지요. 전문가에게 자문이라도 구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번 공연 와중에
세계 5대 발레단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이른바 세계 3대 발레단에 러시아의 볼쇼이, 마린스키 발레단을 더한 것이 5대 발레단입니다. 그러나 세계 3대 발레단과 마찬가지로 세계 5대 발레단이라는 말 역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OOO가 선정한 5대 발레단하는 식으로 출처가 명확하면 모르겠지만, 막연하게 세계 5대 발레단이라는 건 별로 의미가 없고 공감대가 없는 말이라는 겁니다.  


강수진 씨가 활약하고 있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왔을 때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5대 발레단 중 하나로 알려진 적도 있습니다. 지금도 강수진 씨를 설명할 때마다 세계 5대 발레단의 수석무용수이라는 말이 따라붙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발레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별로 공감대가 없는 말입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세계 5대 발레단에 들어간다면 앞서 언급한 세계 5대 발레단 중에서는 어느 발레단이 빠져야 하는 걸까요? 이렇게 꼽을 때마다 달라지는 세계 5대 발레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러시아
3대 발레단은 또 어떻고요? 러시아 볼쇼이, 마린스키 발레단, 이 양대 발레단만 고정이고, 나머지 한 단체는 계속 달라집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때 내한하는 러시아 단체가 러시아 3대 발레단이 됩니다. 내한 단체의 위상을 높여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수사이니 그때그때 달라요’. 그러니 관객 입장에서는 그리 신빙성 있는 정보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말들은 발레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 제가 기사에서도 언급했지만 뮤지컬 미녀와 야수는 국내에서 세계 5대 뮤지컬로 알려진 적이 있습니다. 물론 해외에서는 통하지 않는 홍보용 수사였지요. 유형종 씨는 서양음악의 ‘3B(바흐, 베토벤, 브람스)’라는 말을 예로 들었는데요, 그저 이름 철자가 B로 시작하는 3명의 작곡가들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서양음악사의 3대 위대한 작곡가로 인식되면서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의 미적 감각을 제한해 버리는 폐단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전
세계 3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었던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3대 바이올린 협주곡은 베토벤, 차이콥스키, 멘델스존의 작품이라고 들어왔고, 그게 상식인 것처럼 여겼는데, 어느 순간 궁금해지더라고요. 이 세 곡 말고도 수많은 바이올린 협주곡의 명곡들이 있는데,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누가 이 세 곡만 추려서 ‘3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정했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세계
3, 5, 같은 말들이 등장하는 것일까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등수 따지기 좋아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1등부터 꼴찌까지 등수가 나오고 경쟁적인 교육 환경 자체가 어려서부터 등수 매기는 걸 좋아하는 문화를 만들고 있다고 할까요. 꼭 등수 매기는 게 아니더라도, 우리는 첫째는 뭐, 둘째는 뭐, 셋째는 뭐, 이런 식으로 숫자를 매겨 간명하게 정리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긴 말 필요 없는 세계 3같은 수사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도 그런 점에서는 우리와 비슷하다니, 수많은 세계 3가 어쩌면 일본에서 건너온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기사를 통해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는 예술에 순위를 매기는 게 예술의 본질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였습니다
. 제가 인터뷰한 사람들이 모두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경제와는 다르게 발레는 순위가 나오는 게 아니고, 관객의 마음에 닿는 것입니다. 관객들마다 생각하는 세계 최고 발레단이 다를 거고, 그건 관객의 자유라고 생각해요. (최태지 국립발레단장)

-각 발레단마다 독특한 특징과 성격이 있는데, 여기에 등수를 매긴다는 것 자체가 예술의 본질하고는 어긋난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훈숙 유니버설 발레단장)

-예술의 본질은 비교하는 데 있지 않아요. 훌륭한 작품을 만들려고 경쟁을 하기는 하지만 등수를 매길 수는 없죠. 현실적으로 콩쿠르에서 등수를 매기긴 하지만, 그건 젊은 무용수들을 위한 등용문으로서 의미가 있는 거죠. 콩쿠르에서 1등 했다고 예술가로서 1등이다? 그건 아니죠. (제임스 전 서울발레시어터 예술감독)

 
저는 기사를 통해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가 세계 3대 발레단에 포함되지 않는 별볼일 없는 단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었습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세계 5대 발레단이 아니라서 감동이 없던가요? 뮤지컬 미녀와 야수가 세계 5대 뮤지컬이 아니라서 재미가 없던가요? 세계 3, 5, 이런 식으로 순위를 따지는 게 예술의 본질과는 어울리지 않는데다, 출처도 없이 마케팅을 위한 홍보용 수사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기사가 나가고 나니 제 의도와는 달리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가 세계 3대 발레단이 아니다->즉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는 후진 단체다로 해석하는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 ‘세계 3라는 레토릭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거꾸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언론도 이렇게 등수 매기기 좋아하는 문화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습니다
. ‘세계 몇 대같은 수사는 시청자나 독자의 관심을 확 끌기 위한 문구로 언론에서 선호하지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도 이런 수사의 유혹에 넘어간 적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취재 경험이 쌓일수록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공연 분야에서도 기자 한 사람이 모든 공연에 대해 다 잘 알 수는 없으니 기사를 쓸 때 공연 보도자료에 어쩔 수 없이 의지하게 되는 게 현실이지요. 그런데 이 보도자료가 부실하고 과장된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젭니다. 매체는 또 예전보다 훨씬 더 많아져서 잘못된 정보가 계속 확대 재생산됩니다. 잘못된 정보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간단해 보이는 기사지만 이 기사 쓰면서 많이 고민했습니다
. ABT 수석 무용수로 승급한 서희 씨의 의미 있는 고국 공연에 찬물을 끼얹는 게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서희 씨가 우연히 공연 기간 중에 TV로 제 기사를 봤다는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듣고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세계 몇 대수사가 범람하고 마치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풍토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이는 공연 자체의 수준이나 의미와는 별개의 문제로 짚어줄 필요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번 기사를 쓰면서 방송 기사에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는 건 참 쉽지 않다는 걸 다시 깨달았습니다
. 그러나 방송 전파를 타는 것은 예전에 여러 번 비슷한 취지로 글을 썼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세계 몇 대가 난무하는 상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건 짧은 방송 기사로는 다 못한 얘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제 기사에 제가 얼굴 내밀고 했던 클로징 멘트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뛰어난 예술가와 예술 작품은 모두 다른 빛깔과 향기를 갖고 있고, 관객의 취향도 각각 다르니, ‘세계 몇 대에 집착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더구나 이것이 별 근거 없는 홍보용 수사에 불과하다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요?”  

*SBS 뉴스 웹사이트 취재파일로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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