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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영감을 제공해 왔다. 영화, 연극, 뮤지컬, 발레 등등 수많은 장르로 다시 만들어졌다. 내가 본 다양한 장르의 로미오와 줄리엣만 해도 수십 종이 될 것 같다. 내가 본 로미오와 줄리엣가운데 최고로 꼽는 작품은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가 안무한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마이요는 1960년 프랑스 태생으로 모나코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몬테카를로 발레단 예술감독으로 활동 중인,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안무가다. 그의 작품 라 벨르신데렐라도 한국에서 소개된 바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 1996년 발표된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2000년 국립발레단의 공연으로 초연됐다. 당시 로미오와 줄리엣은 김용걸-김지영, 로렌스 신부와 캐퓰릿 부인은 이원국-김주원이 맡았다.

고전 발레와는 차별되는 현대적 발레를, 그것도 비교적 최신작을 한국에서 처음 접하고 나는 굉장히 들떴던 것 같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들뜬 이유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으니. 아쉽게도 SBS 뉴스 웹사이트에 기자칼럼으로 올렸던 이 글은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두 번째 한국 공연은 2002년에 열렸다. 이 때는 몬테 카를로 발레단의 주역 커플 베르니스 코피에테르와 크리스 롤랑이 내한해 국립발레단원과 두 차례 공연에서 호흡을 맞췄다. 국립발레단의 주역 무용수인 김주원-장운규 커플도 좋았지만, `원조`를 보는 느낌은 또 달랐다. (당시 볼쇼이 발레단원이었던 배주윤과 국립발레단 주역 무용수였던 이원국 커플도 두 차례 주역으로 무대에 올랐지만, 아쉽게도 이 캐스트의 공연은 보지 못했다.) 마이요도 조안무자만 보냈던 2000년과는 달리, 2002년에는 직접 한국에 와서 공연을 다 보고 갔다.

그리고 2011. 9년 만에 다시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게 되었다. 이번에도 국립발레단의 공연이다. 베르니스 코피에테르가 직접 내한해 무용수들을 지도했다. 개막 전이었던 26일 프레스 리허설이 열렸다. ‘리허설이지만, 관객을 일부 초청해 본 공연과 다를 바 없는 무대였다.

마이요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엄격한 형식을 중시하는 고전발레와는 다르다. (자주 공연되는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같은 게 고전발레다.) 줄거리와 상관없이 눈요깃거리로 춤이 등장하는 '디베르티스망' 같은 건 없다. 2인무 중에서도 고전발레의 형식이 정립된 그랑 파드되도 등장하지 않는다. 뜸들이지 않고 바로 춤으로 이야기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동훈-김주원). 국립발레단 제공

동작은 사실적이다. 발레 테크닉을 활용하면서도, 전반적으로 춤 동작을 평상시 행동하는 것과 비슷하게 했다. 줄리엣이 티볼트의 죽음을 알고 나서 로미오의 뺨을 때리려는 장면이나, 침대 위에 두 사람이 같이 눕는 장면 등에서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보통 발레는 발의 예술이라 하지만, 이 작품은 손으로 이야기하는 대목이 많다. 두 연인의 사랑의 밀어가 손 동작으로 표현되는데, 아주 생생하게 다가온다. 두 사람의 발코니 2인무, 침실 2인무는, 관능적이면서도 순수하게, 사랑의 탐색과 설렘과 환희를 그려낸다. (쓰다 보니 글로 묘사하는 게 부질없게 느껴진다. 그냥 보면 안다. 가슴 떨린다.)

춤 동작은 굉장히 사실적이지만, 무대나 조명은 아주 상징적이고 간결하다. 흰 바닥에 패널 몇 개를 세워 이 패널들의 이동과 조명만으로 침실과 무도회장, 발코니, 무덤을 자유자재로 표현한다. 동양적이고 단순한 느낌으로 디자인된, 황금빛 의상들도 그렇다. 이는 사실적인 동작을 더욱 강조하는 효과를 낳는다. 모두 마이요의 안무 의도에 맞춰 디자인된 것이다.  

마이요는 훌륭한 연출가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거리 가운데 중요한 부분만을 강조해서 신속하게 풀어나간다. 그가 극을 전개해 가는 것을 보면, 감정 이완의 타이밍과 프로코피에프가 작곡한 음악의 구조를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건 로미오가 티볼트를 살해하는 장면의 안무이다. 이 작품의 '중심'으로 느껴지는 장면이다.

티볼트가 머큐쇼를 죽인 이후, 격분한 로미오가 티볼트를 따라가서 목을 조르는 장면. 로미오가 티볼트의 목을 조르기 직전까지, 음악은 제 속도를 유지하되 장면은 `슬로우 모션`으로 느리게 진행된다. 한편에 머큐쇼의 시신이 누워있는 무대. 몇 사람은 시신을 붙잡고 통곡하고 있다. 캐퓰릿 가와 몬테규 젊은이들이 서로 엉키고 밀쳐내면서 싸우고, 로미오는 적개심에 불타 티볼트에게 다가간다. 누군가가 막아서지만, 로미오는 그를 물리친다. 티볼트는 그가 접근하는 것을 보고 놀라 눈동자가 커진다. 피하려고 하지만 늦었다.

로미오가 천으로 티볼트의 목을 감아 누르는 순간, 슬로우 모션이었던 동작은 다시 제 속도로 돌아온다. 사람들은 경악에 빠지고, 티볼트는 목을 졸린 채 둥, , 둥 하는 드럼 소리에 맞춰 발버둥친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다. 나는 티볼트의 몸이 축 늘어지며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야 겨우 그동안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무용 평론가 문애령씨가 초연 때 티볼트의 죽음장면을 이렇게 요약한 게 아직도 기억 난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담긴 세 가지 큰 주제인 사랑과 증오와 죽음 중에서 아직까지 죽음을 강조한 안무는 없었다.......특유의 비극적인 멜로디를 들으며 살인 광경을 속속들이 지켜보는 관객들은 비극의 진정한 출발점은 바로 여기였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렇게 뚜렷한 이유를 간과하고 엉뚱하게 가문의 대립, 결혼 예정자 파리스의 등장, 잘못 전해진 로렌스 신부의 편지를 탓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이요의 '죽음'을 강조하는 독특한 안무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빛을 발한다. 십자가 형태의 조명으로,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눴던 줄리엣의 침대는 무덤이 된다. 로미오가 줄리엣이 죽은 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은, 소품 칼 대신 무대장치를 이용해 아주 창의적인 방식으로 표현된다. 줄리엣이 깨어나 로미오와 시신을 발견하고 절망하고, 함께 죽음을 택하는 장면 역시 절절하다. 마이요는 로렌스 신부를 이 죽음의 목격자로 남겨놓았다.  

줄리엣이 죽은 줄 알고 절망하는 로미오(김주원-이동훈). 국립발레단 제공

'로미오와 줄리엣`은 여성의 캐릭터가 강조되는 작품이다. 줄리엣의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고, 어머니 마담 캐퓰릿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마담 캐퓰릿은 조카인 티볼트에게 미묘한 애정을 느끼는 것으로 설정되는 것도 이 작품의 특징이다. 마담 캐퓰릿과 티볼트가 연인이라면, 이 역시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이뤄지기 어려운 사랑을 하는 연인이다. 티볼트의 죽음에 절규하는 마담 캐퓰릿은 조카이기보다는 연인을 잃고 슬퍼하는 여인의 모습이다. 마치 로미오를 잃은 줄리엣처럼.

줄리엣은 적극적이고 강인한 여성이다. 마이요는 `줄리엣은 소녀가 아니라, 사랑을 이끌어가는 여인, 더 나아가 사랑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작품은 몬테카를로의 주역 베르니스 코피에테르가 없었다면 이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베르니스는 줄리엣의 캐릭터 창조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180센티미터 가까운 큰 키에 중성적인 매력을 지녔다.) 줄리엣에 비하면, 별 생각 없이 로잘린을 따라다니다 줄리엣을 보고 한눈에 반해 버리는 로미오는 순수하지만 철부지 같아 보이기도 한다. 

줄리엣과 마담 캐퓰릿(김주원-윤혜진). 국립발레단 제공


줄리엣과 로렌스 신부(김주원-이영철). 국립발레단 제공

다른 캐릭터들도 생생하다. 로렌스 신부는 이 공연을 열고 닫는 길잡이 같은 인물이며, 줄리엣에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전반적인 상황을 지켜보고, 알고, 컨트롤해 보려 하지만, 자신의 노력 때문에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두 복사와 함께 추는 춤에서도 그가 운명을 지배하려 노력하지만, 결국 지배당하고 마는 비극적인 인물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마담 캐퓰릿과 미묘한 러브 라인을 형성하는 티볼트는 배짱 좋고, 다혈질이고, 남자답고, 매력적인 캐릭터다. 티볼트의 죽음은 앞에도 언급했듯, 이 작품의 중심축처럼 느껴진다.

이번 공연이 이전의 공연과 가장 다른 점은 오케스트라다.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이 연주를 맡은 것이다. 안 그래도 프로코피에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정명훈이 사랑하는 레퍼토리다. 사실 예전 공연에선 발레의 감흥을 음악이 깨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오죽하면 차라리 MR(녹음반주)로 하자는 얘기가 나왔을까. 맥 빠지고 감정 없고 삑사리가 끊임없이 몰입을 방해하는 연주 때문에, 나도 모르게 마음 졸이면서 봤다면 이해가 될까. 그런데 이번에는 확실히 달랐다. 역설적으로, 연주가 좋아서 연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발레는 원래 춤과 음악이 하나인 것. 그냥 발레그 자체에 빠져들어 즐기기만 하면 됐던 것이다.

내가 봤던 프레스 리허설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에 이동훈-김주원, 로렌스 신부에 이영철, 마담 캐퓰릿-티볼트에 윤혜진-윤전일이 출연했다. 이동훈은 순수하고 철부지 같은로미오 역에 어울렸다. 오랜만에 무대에 서서 예전보다 약간 둔해진 느낌도 있는 게 좀 아쉬웠지만, 반가웠다.  

김주원이야 뭐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감정 표현, 연기력, 절절하고 농익었다. 9년 전에도 이 역할을 춘 적이 있는 그녀는 원작의 줄리엣은 16살 어린 나이지만, 사랑과 죽음을 모두 겪는 성숙한 여인 같은 역할이라, 경험을 더 쌓은 지금 하는 느낌이 남다르다고 했다. 김주원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이동훈이 끌려가는 느낌이 없지 않았는데, 그건 김주원과 이동훈의 연륜 차이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워낙 이 작품 자체가 줄리엣에 무게 중심이 쏠려 있어서 그런 측면도 있을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침실 2인무(이동훈-김주원). 국립발레단 제공

로렌스 신부 이영철의 카리스마도 인상적이어서, 개인적으로는 초연 때의 이원국을 생각나게 했다. 티볼트 역의 윤전일은 새로운 발견이다. 이 작품 준비하면서 체중도 엄청나게 빠졌다고 하는데, 날렵한 몸매에 남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티볼트다. 마담 캐퓰릿의 윤혜진 역시 든든한 연기를 보여줬다.

티볼트(윤전일). 국립발레단 제공

김지영은, 김용걸의 갑작스런 부상으로 투입된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주역 무용수 아시에르 우리아게레카와 호흡을 맞춘다. 김주원-이동훈 캐스트와는 또다른 느낌의 춤을 선사할 것이다. 2000년 초연 때의 로미오와 줄리엣, 김지영-김용걸의 춤을 다시 보고 싶었는데, 그게 무산되어 많이 아쉽긴 하다. 

이번 주는 보고 싶은 공연들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었는데, 이 중에서도 나에게 발레의 신천지를 처음 보여줬던 로미오와 줄리엣을 첫손에 꼽는 걸 주저하지 않겠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회차의 공연을 다 보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고, 프레스 리허설 때 김주원-이동훈은 봤으니, 다시 본다면 김지영-아시에르가 출연하는 공연을 보는 게 현명한 선택이겠지? 일요일까지 공연이니 몇 회 남지 않았는데, 과연 또 한 번 볼 수 있을까. 2000년부터 지금까지, 여러 차례 봤지만, 나를 들뜨게 하는 이 작품의 매력은 전혀 바래지 않았다. 

*SBS 뉴스사이트 취재파일로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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