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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독일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리아(North-Rhine Westphalia. NRW) 주의 방문 프로그램에 초청받아 이 지역 문화탐방의 기회가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NRW 주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 지역 문화를 알리고 국제 교류 사업 등을 하는 NRW Kultur(www.nrw-kultur.de)에서 주관하는 것이었다. 독일 서부의 NRW 지역은 인구 1,800만 명으로 독일의 주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고, 쾰른과 뒤셀도르프 등 대도시가 여럿 있으며, 교과서에도 나오는 루르 공업지대를 끼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채탄작업을 시작한 루르 공업지대는 독일의 산업혁명과 라인의 기적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20세기가 저물어가면서 더 이상 경제성이 없어진 탄광은 하나 둘씩 문을 닫고 굴뚝산업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환경오염과 실업이라는 문제를 떠안게 된 NRW 지역은 돌파구를 문화에서 찾았다.

졸페라인 주변 전경


독일 에센 북부 외곽에 위치한 졸페라인(Zollverein)’은 공업지대가 어떻게 해서 문화의 중심지로 바뀌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졸페라인은 전성기에 연간 석탄 백만 톤을 생산하던 세계 최대의 탄광이었다. 하지만 경제성이 없어지면서 한 때 독일의 번영을 상징하던 졸페라인의 거대한 구조물들은 고철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쇠퇴한 공업 시설을 허물고 새로운 공장이나 주거건물을 짓는 게 유행이었다. 하지만 NRW 주정부는 1986년 문을 닫은 졸페라인을 넘겨받아 문화공간으로 다시 창조해 냈다. 붉은 벽돌 건물에 철제구조물, 높이 솟은 탑들이 인상적인 외관은 물론, 내부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개조해 박물관으로, 공연장으로, 디자인센터로, 공원으로, 커뮤니티 공간으로 만들었다.  세계적인 건축가 렘 쿨하스가 마스터 플랜을 맡았다

졸페라인 입구에서 바라본 모습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볼 수 있는 루르 박물관은 졸페라인에서 가장 큰 12번 수직갱도를 중심으로 들어섰다. 관람객들은 길이 58미터, 높이 24미터에 이르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거대한 산업유산의 관문에 들어서게 된다. 렘 쿨하스는 불붙은 석탄이 뿜어내는 밝은 오렌지 색채를 박물관 곳곳에 더해 깊은 인상을 남긴다.

페라인에는 세계적인 디자인상으로 유명한 레드닷 디자인 미술관도 자리잡았다. 이 미술관은탄광의 갱도와 석탄차량, 공장의 녹슨 기계 등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공간에 산업 디자인 작품들을 전시한다. 첨단을 걷는 디자인 상품이 원형을 보존한 공장 건물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이 자체가 거대한 디자인 작품으로 느껴졌다. 

졸페라인은 2001년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근대 공업건축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 큰 평가를 받았다. 졸페라인은 2010년 루르 지역이 유럽 문화수도로 지정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졸페라인은 1,000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연간 200만 명이 방문하는, 루르 지역의 창조산업 중심지가 되었다

나는
졸페라인에 위치한 팩트(PACT) 극장에서 에마뉴엘 가트의 현대무용 ‘Brilliant Corners’를 관람했다. 공연도 공연이지만 팩트 극장 자체가 관심을 끌었다. 현대무용과 연극이 주로 공연되는 팩트는 본래 탄광 광부들의 샤워장 건물이었다. 극장 로비에선 광부들이 세면을 위해 사용하던 비누 선반에 비누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아마도 비누는 요즘 것을 가져다 놓았겠지만)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에마뉴엘 가트의 이 공연은 세계적인 공연예술 축제인 루르 트리엔날레 참가작이었다. 루르 트리엔날레는 졸페라인을 비롯한 과거 공업 시설을 공연장으로 활용해서 이 지역의 독특한 색채를 잘 보여주는 축제다. 현재 예술감독은 세계적인 연출가인 빌리 데커다. 빌리 데커는 안나 네트렙코, 롤란도 비야손 주연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선보여 화제작이 된 라 트라비아타로 오페라 애호가들 사이에 유명한 연출가다. 그는 올해 루르 트리엔날레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연출했다

야르훈데르트할레 외경, 내부 모습(흰색 패널 두 장!)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공연된 곳은 보훔의 야르훈데르트할레(Jahrhunderthalle). 20세기 초 발전소였던 이 건물에는 파이프와 난간, 철제 구조물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연출가인 빌리 데커와 무대 디자이너 볼프강 구스만은 이 독특한 공간에 여백의 미학을 살린 무대를 구현했다. 떠오르고 맞붙었다 떨어졌다, 계속 움직이면서 배가 되고, 밀실이 되고, 섬이 되는 거대한 백색 패널 두 장, 그리고 때로는 달이 되고 때로는 스크린이 되어 욕망의 영상을 투사하는 공 모양 구조물이 무대 장치의 전부. 단순하면서도 역동적인 이 무대장치는 공간과 절묘하게 어울렸다. 


루르 트리엔날레가 함부르크의 탈리아 극장과 공동제작한 연극 맥베스역시 쯔베켈 탄광의 기계실이었던 건물에서 공연됐다. 갱도에 공기와 전력을 공급하는 기계가 설치됐던 이 건물은 가로 너비가 126미터에 이르고, 천장은 높고, 긴 창문이 여럿이다. 휑하니 넓은 공간에 아직도 남아있는 구조물들이 황량한 느낌을 준다. 무대장치는 이 공간에 책상을 여러 겹으로 높이 쌓아 올려 인간 내면의 불안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했다. 건물의 높고 긴 창문을 통해 긴 머리를 내려뜨린 마녀들이 소리 없이 등장해 무대를 스멀스멀 배회하는 등 장소의 특성을 살린 연출은 아주 효과적으로 관객을 극에 끌어들였다.

옛 공장건물에서 공연된 연극 '맥베스' 커튼콜

졸페
공연을 보다 보니 루르 트리엔날레의 주인공은 바로 이런 장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업혁명 시대부터 쉼 없이 돌아가던 공장의 기계는 멈춰 섰지만, 이 장소들은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채로 창의적인 공연예술의 발상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쇠락한 과거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었던 이 장소들은 문화의 힘으로 보존되었고,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

중국인 친구로부터 중국에선 차량 내비게이션 시스템이 무용지물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중국에선 하루가 멀다 하게 새 길이 많이 나고 새 건물도 많이 들어서서 그렇다는 것이다. 한창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나라라서 그런가 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면 한국도 변화가 심하긴 마찬가지다. 무슨 뉴타운 지구에 가면 그야말로 상전벽해. 예전의 모습은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동네를 싹 갈아엎고 새 건물들이 금세 우후죽순 들어선다. 번쩍거리는 새 건물들 속에 과거의 기억은, 역사는, 지워져 버린다. 

그러고 보면, 졸페라인이나 루르 트리엔날레 같은 건 한국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재개발, 재건축을 왕도로 여겨온 곳이니 오래된 공장건물 같은 건 모두 싹 헐어버리고 아파트를 잔뜩 지어 신도시를 만들지 않았을까. 그게 아니라면 졸페라인 같은 옛 탄광지역에 내국인용 카지노를 지어 수입을 올리는 정도?

과거를 무조건 지우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 무용지물로 보이는 옛 것이라도 문화의 힘으로 창조적 재생을 할 수 있다는 것. 나는 루르 트리엔날레의 공연보다도 그 공연이 열린 장소에 감탄했고, 이 장소를 창조적으로 재생해낸 독일인들의 정신에 감탄하고 돌아왔다. 이게 바로 아무리 공연장을 많이 지어도 하루아침에 따라가기 어려운 문화의 힘일 것이다.  

*클럽 발코니 픽스 매거진 이번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9월 22일에 '졸페라인'을 주로 소개한 글도 올린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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